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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4) (195/210)


195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4)
2023.04.16.


언제까지고 시체로 득실거리는 땅 한가운데에 멍청히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유리아와 나이아는 일단 어느 쪽으로든 걷기 시작했다.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나이아의 물음이었다. 자이안과 같이 왔으면서 왜 뿔뿔이 흩어졌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유리아라고 해서 이유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모르겠어요. 아르스 언니가 따로 말해준 것도 없고. 아마 예상치 못한 사고였을 거예요.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대책을 세울 수 있도록 미리 얘기를 해줬겠죠.”

“그럼 일단 돌아다녀야겠네.”

나이아의 말은 다소 막막하게 느껴졌다. 유리아는 마계가 얼마나 넓은지 모른다. 그래도 고작 수십 분, 수 시간 만에 곳곳을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좁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책도 없이 멍하니 있을 수는 없잖아.”

“……그 말이 맞네요.”

검은 땅은 발을 디딜 때마다 재를 연상시키는 검고 뿌연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럴 때마다 매캐한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유리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도, 달도, 별도 없는 하늘 전면이 피로 칠한 것처럼 붉다.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은 불길한 색이다.

“여기는…….”

유리아가 입을 열었다.

“세계 자체가 저희를 거부하는 것 같네요.”

다소 맥락 없지만 정확한 감상에 나이아는 피식 웃었다.

“아주 날카로운걸. 마계의 본질이라는 게 원래 그래. 정확히는, 찬탈자의 본질이라고 해야 하나.”

나이아는, 정확히는 나이아의 일부가 찬탈자에게 먹히며 태어난 그녀는 그 탄생 과정 덕분에 찬탈자에 대한 몇 가지 진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유리아에게 자신이 아는 것을 천천히 얘기해주었고, 유리아는 그 말을 전부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모두 기억해두었다.

자이안과 재회했을 때 그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하며.

“저희가 얼마나 걸었죠?”

“글쎄. 세 시간쯤?”

천체도 뭣도 없는 핏빛 하늘과 죽음만을 품은 검은 땅은 시간이 흘러도 어떠한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나이아의 대답은 태연했으나 그녀 역시 명확하게 시간을 인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보다 덜 지났을지도 모르고, 그보다 훨씬 오래 지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와중에 또다시 마물의 눈에 띄고, 거듭 전투를 벌였다. 이번에는 첫 전투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몸은 평소보다 좀 무거웠지만 그래도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 같은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나이아가 가진 무언가의 영향이 아닐까 하고 유리아는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그때 오빠한테 그랬거든. 오빠 술 먹을 때마다 웃음 자판기 되는 거 알고는 있었냐고. 그랬더니 오빠가 표정이 어땠냐면, 아, 내가 직접 그 표정 만들어볼게. 그러니까…….”

서로 간의 어색함이 어느 정도 허물어지자 나이아는 급격하게 말수가 많아졌다. 단신으로 지구라는 세계를 구한 영웅이 아니라, 그냥 밝은 성격을 가진 그 나이대 여성 같은 느낌이었다.

현실의 나이아는 자이안을 8살까지 키우고 서른 중반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나이아는 20대 중후반까지의 기억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유리아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위화감을 느꼈다. 그런 한편, 눈앞의 유리아가 자이안과 만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기도 했다.

“아르스 언니가 도망간 오빠를 찾아내서 화학 퇴비 재료로 써버릴 거라고 벼르다가…… 잠깐, 저거 뭐야?”

나이아가 그 말을 꺼낸 것은, 체감상 한나절 가량을 동행했을 무렵이었다.

잠시 걸음을 멈춘 유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이아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녀가 뭘 발견한 건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곧 유리아도 나이아가 뭘 보고 그런 말을 한 건지 알아차렸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 줄기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눈을 부릅뜬 유리아가 뭔가를 깨닫고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불을 뿜거나 하는 마물이 간혹 존재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마물은 불을 피우지 않는다.

지금 보이는 연기는 사람의 흔적이 분명했다.

“하하. 대담하네. 마계 한복판에서. 그래도 효과적이긴 하다. 그치? 이렇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잖아.”

뒤따라붙은 나이아가 태평하게 말했다. 유리아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면서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 자신들이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도 계속 부정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유리아는 주변의 마물들이 알아차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속도를 높였다.

“어머.”

연기가 피어오르는 현장 한복판에서 태평한 탄성이 들렸다.

“유리아 님. 무사했군요.”

“소, 소아레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유리아는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한 줄기 연기가 높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기의 근원은 보글보글 끓는 냄비였다.

“아니, 이게…… 어.”

“아하하하!”

유리아가 얼이 빠진 채 횡설수설하고, 뒤따라온 나이아가 발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며 우아하게 인사한 소아레스는 나이아를 보며 작게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새로운 친구를 사귀신 겁니까? 대단한 친화력이시군요.”

“그게, 어, 아니, 소아레스는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보면 알아! 아니, 왜?!”

참으로 지리멸렬한 질문이었다. 소아레스는 작게 웃으며 둘을 손짓했다. 유리아는 혼란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다가 돌연 느껴진 위화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몇 걸음 다가갔을 뿐인데 공기의 질이 확연히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곧 큰 싸움이 있을 겁니다. 미리 든든히 식사를 챙기지 않으면 제 힘을 발휘하기 어렵겠지요. 그리고, 피어오른 연기를 보고 누군가가 저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유리아 님처럼 말이지요.”

“자칫 잘못하면 마물들한테 습격을 받을지도 모르는데…….”

“마를 쫓는 결계네.”

나이아의 말에 유리아의 표정에 마침내 깨달음의 빛이 돌았다. 마를 쫓는 결계. 말 그대로 마물로부터 몸을 숨기는 결계다.

범위를 좁혀 효과를 강화하면 지금처럼 적진 한복판에서도 여유롭게 불을 피우고 식사를 준비할 수 있을 정도다.

유리아 역시 소아레스와 비슷한 수준의 결계를 구사할 수 있었다. 다만 일행들과 떨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초조해서 조금 전까지 아예 그 발상을 떠올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낯선 분께서는 결계술에 조예가 깊으시군요.”

“별로 그렇진 않은데. 항마 결계는 각성자가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거거든.”

지구의 각성자들이 많은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낸 이 결계는 마물의 습격으로부터 민간을 보호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물론 그래도 지구는 종말 직전까지 몰리긴 했지만, 그것마저 없었다면 이미 수십 년 전에 멸망했을 것이다.

“반가워. 네가 유리아가 찾던 동료 중 하나구나? 난 나이아 알코스야.”

“나이…… 예?”

소아레스가 눈을 크게 떴다. 얌전하긴 하지만 본질적으론 유리아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나이아가 장난을 성공시킨 악동처럼 웃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아마 사실일 거야.”

소아레스의 시선을 받은 유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어진 설명을 모두 들은 소아레스가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의 뒤를 잇게 될 누군가를 위해 안배를 남기다니…… 놀라운 혜안이군요.”

“설마 그게 나도 모르는 내 아들이 될지는 몰랐지만 말야. 피는 못 속이나 봐. 하하.”

장난스럽게 웃은 나이아가 아직도 보글보글 끓는 냄비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둘을 돌아보았다.

“배고프다. 밥 좀 먹고 할까?”

잠시 멈칫한 소아레스가 이내 살포시 웃으며 그녀의 앞에 마주 앉았다.

이제 일행은 셋이 되었다.

“남은 건 케이하고 자이안이네.”

“자이안 님은 혼자서도 잘하고 계실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유리아 님.”

“그렇겠지. 근데 자이안은 누가 안 보면 자기 멋대로 무리하는 성격이잖아.”

“다른 각성자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의논 끝에 자이안보다 먼저 케이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물론 정말로 케이를 먼저 찾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셋 모두 마계의 지리도, 남은 일행이 어디에 떨어져 있는지도 전혀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소아레스를 이렇게 빨리 찾을 수 있었던 것만 해도 엄청난 행운이었다.

“케이도 소아레스처럼 눈에 띄는 뭔가가 있으면 찾기 편할 텐데.”

유리아가 별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중얼거림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어? 유리아하고 소아레스다!

귀를 통해 들리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직접 꽂히는 것 같은 앳된 목소리에 둘은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동행하던 나이아가 고개를 들었다. 날씨의 변화 따위가 없어야 할 마계의 하늘 먼 곳에 짙은 먹구름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먹구름은 시시각각 셋을 향해 가까워졌다.

“다른 친구가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미리 좀 해주지 그랬어.”

구름 속의 존재를 꿰뚫어 본 나이아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셋의 머리 바로 위까지 다가온 검은 구름 속에서, 거대한 머리가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천룡으로 화한 케이가 이어 짧은 앞발을 구름 속에서 내밀고는 신나게 흔들었다.

-처음 보는 친구도 있네? 안녕? 난 케테르크라고 해. 용이야!

“그러게. 딱 봐도 그래 보이는걸. 반가워. 난 나이아 알코스야.”

-나이아 알코스? 자이안 엄마잖아?

먹구름이 지면에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그 안에서 뱀처럼 미끄러져 나온 케이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툭, 땅바닥에 착지했다. 모두에게 익숙한 어린 남자아이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한결 대하기 편한걸. 그나저나 넌 별로 안 놀라네? 유리아하고 소아레스는 내 이름 듣자마자 기절할 것처럼 굴었는데.”

“그 정도로 놀라진 않았거든요.”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건 분명 놀라운 일이지만, 우리가 차원의 벽을 넘어 이렇게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만큼 놀랍지는 않지. 그래도 궁금하긴 하다. 어떻게 되살아난 거야? 원래 죽은 영혼은 그 즉시 영자로 분해돼서 윤회의 고리에 휩쓸리는 게 대우주의 법칙인데.”

“그거야 간단한 편법이지. 난 죽었다가 되살아난 게 아니거든.”

나이아가 자신이 태어나게 된 경위를 얘기했다. 그 얘기를 모두 온전히 이해한 케이는 호기심과 존경으로 눈을 빛냈다.

“세상에. 너 머리 좋다!”

“아하하. 고마워. 용한테 그런 칭찬을 들으니까 날아갈 것 같다.”

만난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나이아와 케이는 벌써 절친인 것처럼 친근하게 굴었다.

몇 걸음 떨어져 둘을 지켜보던 유리아와 소아레스는 서로를 마주 보고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넷이 모였다.

이제 가장 중요한 하나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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