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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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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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3)
2023.04.15.
자이안은 숨을 죽인 채, 눈에 띄지 않도록 기척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검은 땅을 나아갔다.
어디라고 할 것도 없이 사방이 MP의 냄새로 충만하고, 곳곳에서 강한 마물의 기척이 느껴졌다.
조금만 긴장을 늦춰도 마물들이 그를 눈치챌 것이다.
그러면 얼마나 될지도 알 수 없는 마물의 떼를 끝도 없이 상대해야 되겠지. 자연히 걷는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삼촌.”
가슴을 붙잡으며, 자이안이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숨쉬기가, 힘들어요.”
심각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던 각성자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힘들다고? 정확히 무슨 소리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디. 꼭 물속에 잠겨 있는 것 같아요. 들이쉴 때마다 공기가 아니라 다른 무거운 걸 빨아들이는 느낌이고, 내쉴 때는 목 안쪽이 갈라지는 것처럼 따끔거립니다. 그리고…….”
자이안이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흐린 눈으로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몸이 너무 무거워요.”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냐?」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상태로 전투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제 능력을 모두 발휘하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우선 몸을 숨기며 쉴 수 있을 만한 장소를 발견해야겠군.」
“하지만 다른 분들이 아직…….”
「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모든 게 끝이야. 우선순위를 착각하지 마라.」
“…….”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고, 자이안은 발걸음을 재개했다. 속도는 조금 전보다도 더뎠다. 몸이 성치 않은 상태로 기척을 죽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아마…… 마계 자체가 가지는 특수성이 아닐까 싶어.」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던 아르스가 조심스럽게 추측을 꺼냈다.
「자이안. 펜던트에 환경 적응 기능이 있지?」
“환경 적응?”
「널 처음 만났을 때 쓸데없이 네 MP만 빨아먹는다며 기능을 축소시킨 그거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그래. 자이안 네 세계는 그런 게 없어도 멀쩡히 살 수 있을 만큼 지구와 닮은, 생물에 친화적인 환경이지만 마계는 그렇지 않은 거야.」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가 갔다. 자이안은 펜던트를 손에 쥐고 눈을 감은 채 의식을 집중했다.
프레이와 아르스의 조언에 따라 축소된 기능을 정상적으로 다시 활성화시키자, 조금 전보다는 몸이 훨씬 가벼워졌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네요.”
「그만큼 마계의 환경이 생물에게 적대적이라는 거다. 그나마 넌 각성자니까 이 정도지, 아마 평범한 생명체는 여기 발을 디디자마자 죽을걸.」
그와 더불어, 잉여 MP를 끊임없이 흡수하는 자이안의 특성도 이번에는 독으로 작용했다.
자이안의 세계의 MP가 필터를 한 번 거친 것이라 비유하면, 마계의 것은 원액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마물을 죽이지 않아도 MP를 계속해서 흡수하는 특성 탓에 강한 독성이 필요 이상으로 쌓인 것이다.
“다른 분들은…….”
설명을 들은 자이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른 일행에게는 펜던트가 없다.
“서둘러야겠어요.”
마음이 조급해지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직도 사방에서 마물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몸을 사릴 때가 아니었다. 자이안의 행동이 늦어질수록, 그만큼 다른 일행들이 죽음에 가까워진다.
「초조함에 몸을 맡기지 마라. 섣불리 움직이다가 마물들한테 발목이 잡히면 천천히 움직이느니만 못해.」
“그땐 잘 부탁드립니다, 삼촌. 다른 분들도요.”
당당한 대답에 프레이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힘이란 건 쓰라고 있는 거지. 그리고 네 각성자는 자이안이 바란다면 언제고 힘을 빌려줄 것이다.
자이안은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움직인다고 움직였지만, 결국 예민한 마물들이 먼저 그의 존재를 눈치챘다.
환희를 닮은 커다란 동요가 놈들의 무리 전체로 퍼져나갔다. 곧이어, 대지가 술렁이는 듯한 느낌과 함께 검은 물결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포칼립스.”
거리낌 없이 힘을 빌리겠다고 선언했지만, MP 비축을 고려하면 넷 모두를 부르는 건 낭비였다. 그리고 프레이는 굳이 넷을 모두 부를 필요가 없을 만큼 강력한 전력이었다.
빛의 기둥이 핏빛 하늘을 뚫고 높이 치솟았다. 자이안을 향해 달려들던 마물들이 멈칫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냐. 얼마든지 부려 먹혀주마.”
불의 심판이 멍청히 멈춰선 마물들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아포칼립스, 모든 마물의 종말이 마계에 발을 디뎠다.
* * *
“나? 나는…….”
여자의 표정과 말투가 갑작스럽게 어눌해졌다. 그러나 그녀의 손과 발은 마치 다른 생물이기라도 한 것처럼 쉬지 않고 마물을 때려잡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유리아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날 것 같았다.
“글쎄. 날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네.”
“인간…… 인 거죠?”
“음. 아마도? 인간이라고 자칭하긴 좀 그런데. 인간 언저리? 인간 부스러기라고 해야 하나.”
말을 들을수록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더 짙어졌다. 유리아의 표정을 본 여자는 피식,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닌 것도 같네. 일단은 나이아라고 불러. 나이아 알코스.”
“아, 나이아 알…… 예?! 나이아 알코스요?!”
유리아의 목소리가 경악으로 확 뒤집혔다.
“오, 이 이름을 알아? 하긴, 내가 좀 많이 유명하긴 했지.”
“아뇨! 그게, 그게 아니라…… 당신은 죽었잖아요.”
유리아는 인상을 쓰며 혼란스러운 심정을 담아 말했다.
나이아라는 이름을 들은 탓인지, 어쩐지 상대의 이목구비가 묘하게 자이안과 닮은 것처럼 보였다. 그걸 깨닫자 혼란은 더 심해졌다.
“죽었다…… 지구에는 결국 그렇게 전해졌나.”
“그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당신은…….”
횡설수설하던 유리아의 표정이 돌연 딱딱하게 굳었다.
“당신이 나이아 알코스라는 증거를 보여주세요.”
“증거? 미안하지만 그런 건 없어.”
“뭐라도 있을 거 아니에요. 당신만 아는 가족 얘기라든가.”
“나랑 오빠 얘기? 그런 건 증거가 못 될 텐데. 우리 남매 옛날얘기는 TV 토크쇼 같은 데서 어지간한 건 다 얘기해서, 조금만 찾아보면 바로 나오거든.”
“……전 지구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당신이…… 당신이 나이아 본인이라 치면, 당신과 프레이 아저씨 사이에 무슨 재밌는 과거가 있었는지 모르는 게 더 많아요.”
“지구 사람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자칭 나이아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었다. 날카롭게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유리아는 작게 숨을 삼켰다.
“당신부터 말해줘요. 당신이 나이아라는 증거.”
“아니. 너부터 말해야 할 거야. 넌 누구고, 어떻게 여기 이렇게 존재할 수 있으며, 목적은 뭔지.”
얘기가 평행선을 달린다. 어느 한쪽이 의심을 꺾고 스스로를 밝히기 전에는, 두 평행선이 교차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유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는 사이 자칭 나이아는 근방에 몰려든 대부분의 마물을 모두 쓰러뜨렸다.
‘내가 바보 같은 고민을 했네.’
그 모습을 보며 유리아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경위야 어찌 됐건 상대는 마물을 적대하고 있으며, 마물들 틈바구니에 파묻혀 죽을 뻔한 자신을 구했다. 먼저 꺾여야 하는 건 자신이었다.
“전 유리아 알즈레드예요. 당신 아들, 자이안 알코스의 동료…… 친구. 그런 관계고요.”
“뭐? 내가 아들이 있어? 어떻게? 아니, 잠깐. 그 말은 설마.”
“우선 제가 아는 대로 당신에 대해 설명해줄게요.”
유리아가 자이안과 프레이로부터 전해 들은 나이아의 행적을 설명했다.
찬탈자에게 패하고 자이안의 차원에 불시착한 뒤 그녀가 겪은 일들을 차근차근. 얘기를 듣는 상대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내’가 결국 성공했구나.”
종국에 이르러서는 미련을 내려놓은 듯한 후련한 미소를 띠었다.
“얘기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 네가 의심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네.”
자칭 나이아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녀 역시 의심과 경계를 거둔 것이다.
“당신은…… 정말 나이아 알코스가 맞는 건가요?”
“아까 내가 말했지? 난 인간이 아니라 인간 언저리, 인간 부스러기 같은 거라고.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나이아 알코스 본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존재지.”
온몸에 묻은 피를 툭툭 털어내며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는 나이아 알코스가 떼어낸 자신의 일부를 찬탈자가 포식해 태어나게 된 존재야.”
“…….”
유리아의 반응은 침묵이었다. 인상을 쓰며 그 말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 애썼지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걸…… 아니, 왜 그런 일을?”
그저 그렇게 원론적인 물음을 꺼내는 게 한계였다.
“어떻게든 죽이고 싶었거든.”
찬탈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나, 그러니까 진짜 나이아 알코스가 찬탈자에게 패배하고 미지의 다른 차원으로 도망치기 전에, 그런 생각을 했어. 이대로 마계를 고립시키고 나 혼자 도망치면 당분간은 모두 안전하겠지만, 과연 그 안전이 언제까지 갈까? 찬탈자는 반드시 없어져야 하는 존재야. 봉인이니 고립이니, 그런 건 모두 문제를 뒤로 미루는 일에 불과하지.”
나이아는 마지막으로 불확실하게나마 안배를 했다.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 찬탈자에게 먹여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를 탄생시킨 것이다.
비록 일부라고는 해도 그 역시도 나이아 자신이니, 찬탈자에게 정신을 지배당할 리는 없다고 확신하며.
“오만은 아니고, 냉정한 자기 평가 같은 거지. 그 예로, 보렴. 난 이렇게 멀쩡히 존재하고 있잖아? 물론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날 지배하려는 거대한 의지와 맞서 싸우느라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였지만. 아하핫.”
“왜 그런 일을 한 거죠?”
같은 질문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크게 달랐다. 나이아 알코스는 마계를 떠나며 대체 무엇을 안배했는가.
“별거 아니야. 언젠가 나처럼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또다시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거든.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나’는 그 착한 바보에게 작게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어. 같이 싸우고, 조금이라도 찬탈자에 대한 승률이 높아지도록 힘을 빌려주고 싶었던 거야.”
빙긋 웃으며, ‘과거의 나이아’는 곧은 시선으로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안내해주지 않을래? 그 바보…… 내 아들이라는 아이가 있는 곳으로. 도움을 주고 싶어.”
“…….”
강철같은 의지에 압도되어, 유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니. 어. 잠깐만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문제가 하나 있었다.
“왜? 아직도 내가 신뢰가 안 돼? 그건 미안해. 나도 조금 전에는 신경이 좀 날카로운 상태라…….”
“그게 아니라.”
유리아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부끄럽게 말했다.
“자이안이 어디 있는지 저도 몰라요.”
“……으응?”
“저도 어디 있는지 몰라서 찾으러 다니는 중이었거든요.”
휘잉. 메마른 바람이 침묵이 내려앉은 둘 사이를 어색하게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