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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2) (193/210)


193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2)
2023.04.14.


천체도, 바다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공허한 공간 가운데에 커다란 땅덩어리가 우두커니 존재할 뿐인 작은 차원. 그 어떤 정상적인 생명체도 존재할 수 없는 그 차원을 누군가는 마계라 불렀다.

그리고 그 땅덩어리에서도 한층 외곽 지역. 끝없는 핏빛 공허로 이어지는 낭떠러지에 위치한 작은 동굴에서.

“…….”

‘그것’이 눈을 떴다.

“흐으읍― 하아아―”

깊은 호흡. 마치 태어나 처음으로 숨 쉬는 법을 배운 것처럼 천천히, 공기가 폐부에 들어찼다가 다시 빠져나가는 감각을 되새기며 호흡을 잇는다.

이어 시선을 돌린다. 주변의 광경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렇게 뇌리에 새겨진 광경을 바탕으로 자신의 목적을 되짚는다.

자신의 목적. 오래된, 어쩌면 바로 어제처럼 생생한 기억이 일시에 떠오른다.

“……윽.”

작은 신음을 뱉으며 이마를 감싼다. 현기증은 금방 잦아들었다.

그 대신 기억이 더욱 명확해졌다.

“내가…… 할 일.”

유령에 홀린 것처럼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본다.

잠시 뒤, ‘그것’이 당당한 걸음으로 동굴을 나섰다.

* * *

“커흡! 쿨럭, 쿨럭.”

가슴 속이 따갑고 저도 모르게 밭은기침이 났다. 자이안은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차근차근 기억을 되짚었다.

여기가 어디지? 마계다. 나는 왜 여기에 있지? 교만의 침략에 앞서 그를 먼저 찾아 쓰러뜨리기 위해서.

그런데 왜 나는 지금 여기 혼자 있지?

“……!”

뒤늦게 인식하게 된 이상 사태에 자이안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재차 주변을 둘러보았다.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검은 땅 위에 살아 움직이는 거라곤 그 자신뿐이었다. 동료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펜던트 너머로 보이는 각성자들을 제외하고.

‘아. 혹시 나 혼자 오게 된 건가?’

생각해보니 자신은 가장 먼저 균열에 발을 디디고, 동료들이 뒤따라오는 모습까지는 보지 못했다.

‘모두와 함께 왔는데 나 혼자 동떨어졌다’라는 추측보다 ‘애초에 나 혼자 왔다’라는 추측이 훨씬 그럴듯했다.

「저거 또 바보 같은 생각 하고 있는 표정인데.」

프레이의 심드렁한 말이 자이안을 상념에서 일깨웠다. 그러고 보니 그들에게 물어보면 그만인 일이었다.

“다른 동료들은…… 저 혼자 마계로 오게 된 건가요?”

「……진짜 바보 같은 생각이었네.」

프레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넌 걔들이랑 거의 2년을 부대꼈으면서 아직도 걔들을 못 믿어? 걔네가 너 혼자 마계로 떠나게 놔두고 나 몰라라 발을 뺐을 거라고? 진짜 그렇게 생각하냐?」

“그건…….”

아니라고 믿지만, 실제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자이안뿐이었다.

게다가, 누구나 자기 목숨은 소중하지 않은가. 자이안은 동료들이 자신과 함께하지 않는다 해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아오, 저 등신 호구 새끼를 진짜. 야, 당장 나 소환해. 개처럼 처맞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직접 알려줄 테니까.」

「자이안. 지금 네 멍청한 망상보다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해.」

“멍청한 망상.”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아르스의 말을 따라 했다. 아르스까지 그런 과격한 표현을 할 정도인 걸 보면 자기가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을 하긴 한 모양이다.

「다른 애들이 널 뒤따라 같이 마계로 온 건 확실해.」

“예? 그럼 다들 대체 어디로 간 거죠?”

「……우리도 잘 모르겠어.」

아르스의 말은 답지 않게 자신감이 없었다.

「중간에…… 그러니까 차원을 넘는 과정에서 무언가의 간섭이 일어났어. 그 간섭 때문에 일정하게 통일돼야 하는 도착점의 좌표가 개체별로 중구난방으로 흩어졌고.」

“그건…… 저를 포함해서 일행들 모두가 마계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우연히 일어난 불행한 사고가 아니라, 명백히 의도를 갖춘 간섭 때문이야.」

자이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실체가 없는 불안이 유령처럼 등 뒤로 다가와 목을 조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아르스가 그의 불안에 쐐기를 박았다.

「우리가 교만한테 한 방 먹은 거야.」

애써 담담하게 말을 마친 아르스 역시 내심 분함을 곱씹어야만 했다.

소환이 풀리지 않고 계속 붙어있을 수 있었다면, 열쇠의 제작자로서 그 정도 간섭은 어떻게든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교만은 바로 그 빈틈을 이용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자이안은 펜던트를 강하게 쥐었다. 그런다고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 대신 강한 의지가 그의 가슴속을 충만히 채웠다.

“우선은 다른 분들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겠군요.”

자이안은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방향도 거리도 가늠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그 발걸음에는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었다.

오로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일행들과 재회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 * *

“으으…… 윽…….”

가슴이 답답하고 보이지 않는 사슬 같은 것이 목을 죄는 기분이었다. 가슴을 움켜쥐며 미약한 신음을 내뱉던 유리아는 간신히 눈을 떴다.

“허읍…… 콜록! 콜록!”

깊게 숨을 들이켠 유리아는 폐를 면도날로 난도질하는 듯한 고통에 거친 기침을 토했다. 그러다가 돌연 튕기듯 그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이안!”

대답은 없었다. 다급한 외침이 핏빛 하늘을 공허하게 맴돌다가 흩어졌다. 유리아는 당혹스러워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곤 그녀 혼자였다.

-쯔르르륵…….

-끼에에엑! 크륵!

아니, 혼자가 아니었다.

“……!”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불온한 소리에 유리아는 반사적으로 단검을 꺼내 들고 자세를 낮췄다. 물 흐르듯 적을 요격할 준비를 마친 뒤에야 스스로의 상태에 신경이 미쳤다.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지?’

몸이 다소 무겁다. 그러나 아주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단검을 포함해 잃어버린 물건도 없다. 잃어버린 건 다른 일행들뿐이다.

‘반대인가? 다른 일행들이 나를 잃어버린 건가?’

실없는 의문이었다. 유리아는 작게 고개를 젓고 더 중요한 의문을 떠올렸다.

‘다른 일행은, 자이안은 지금 어디에 있지?’

조금의 단서도 없었다. 뒤이어 두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하나,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머무르며 기다린다. 둘, 엇갈릴 것을 각오하고 적극적으로 다른 이들을 찾아 나선다.

‘……한 자리에 가만히 있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닐 것 같아.’

마물의 기척이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계, 마물과 마족의 본거지다.

모르긴 몰라도 어마어마한 수의 마물이 존재할 터. 한 곳에 가만히 있다가는 끝도 없이 몰려오는 마물들을 지쳐 쓰러질 때까지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더 늦기 전에 움직이자.’

유리아가 땅을 박차고 전력으로 달렸다.

그 순간 유리아는 두 가지 의미에서 놀랐다.

몸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마치 며칠 동안 몸살에 시달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감각과는 정반대로, 그녀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지금까지의 전투 중 냈던 최고 속도를 근소하게 상회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느낌이지.’

조악하게 비유하자면, 꼭 자기 몸을 연료로 태워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한 마디로 별로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우선 자리를 벗어나는 것만 집중하자.’

유리아가 안 그래도 한계에 달한 속도를 한층 더 올렸다. 혹시 하는 마음에 시도해본 건데 정말로 됐다.

생소한 생명의 기운을 느끼고 모이기 시작한 마물들의 틈새를 유리아가 물고기처럼 가로질렀다. 전부 약점을 찔러 일격에 죽일 수 있는 별 것 아닌 상대였다. 그저 수만 많을 뿐이다.

‘너무 많아!’

다만 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단 몇 분 만에 쓰러뜨린 마물의 수가 세 자리를 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MP의 농도는 옅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빠르게 짙어졌다.

세계수 북쪽 산맥 너머의 균열들을 정리할 때도 이런 감각이었다. 차이점은, 그때보다 지금 마물의 수가 훨씬 많았다.

‘파고들 틈이 없을 정도야.’

크고 작은 무수한 마물들이 문자 그대로 벽을 만들고 있었다. 틈새를 파고들며 지나치고, 쓰러지는 시체를 밟고 넘어서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게 마계……!’

유리아의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물리적으로 속도를 살릴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쉴 새 없이 몰려드는 마물의 벽에 포위되어, 좁은 섬에 고립된 듯했다.

속도를 살리지 못하는 유리아는 일행 중 가장 전투력이 처진다. 다른 누가 평가를 내린 게 아니라, 유리아 스스로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멍청히 앉아서 죽어주지는 않을 거지만.’

발을 멈춘 유리아가 단검을 여러 번 크게 휘둘렀다. 충격파가 채찍처럼 사방을 후려친다.

반경 수십 미터 정도의 공간이 만들어지고, 유리아가 다시 속도를 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벽에 가로막힌다. 벽이 다시 포위망을 좁힌다.

그런 광경이 셀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그럴수록 유리아의 움직임은 점점 더 날카롭고 정확해졌다. 동작의 군더더기가 빠져,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이 단검을 휘두르고 더 먼 거리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점점 더 몸이 무거워졌다.

‘이건…… 안 좋아. 뭐가 어떻게 안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안 좋아.’

각성자는 죽은 마물에게서 일정량의 MP를 흡수해 끊임없이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다.

다소 변칙적인 방식으로 각성자가 되기는 했지만, 유리아 역시 그 법칙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정밀해지는 움직임이 그 증거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유리아는 뭐라 형용하기 힘든 불길함을 느꼈다.

이대로 계속해서 싸우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이 검은 땅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주는 근본적인 힘이 말라붙어가는 느낌.

발밑에서 몰래 기어와 뱀처럼 몸을 타고 오르는 그 느낌의 이름은 죽음이었다.

마계는 어떠한 생명도 싹트지 않는 죽음의 차원. 동시에, 허락도 없이 찾아온 생명을 일방적으로 죽음으로 끌어들이는 차원이기도 했다.

‘숨쉬기가 어려워’

유리아도 조금씩 가까워지는 죽음의 존재를 눈치챘다. 적을 쓰러뜨리고 더 많은 MP를 흡수할수록 죽음 역시 성큼성큼 가까워졌다.

‘여기서 죽으면 안 되는데.’

죽음 자체가 무섭지는 않다. 유리아의 걱정은 자신이 죽은 다음의 일이었다.

‘아직 자이안을 만나지도 못했는데. 별 도움도 못 줬는데.’

이런 곳에서 아무하고도 만나지 못한 채 혼자 죽는 건, 너무 한심하지 않은가.

‘……그럴 수는 없어.’

점차 흐릿해지던 유리아의 눈동자가 그 순간 선명하게 빛났다.

‘죽더라도, 모든 게 끝난 뒤야.’

강한 의지가 유리아의 의식을 바로잡았다. 짧은 순간이나마 몸을 좀먹는 죽음을 몰아냈다.

유리아가 다시 움직였다. 살아남아 자이안을 만나기 위해. 벽을 무너뜨려 틈새를 만들고 그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갔다.

차근차근 포위망을 무너뜨렸다. 도저히 벗어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쿠우우웅―!

기적이 일어났다.

“……?”

먼 곳에서 굉음이 들렸다. 이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강렬한 진동이 발밑을 흔들었다.

유리아의 움직임이 잠시 무뎌졌다. 치명적인 빈틈이었으나, 주변의 마물들은 그녀를 공격하지 못했다.

어딘가에서 날아든, 오로라를 연상시키는 찬란한 빛의 파도가 마물들을 가차 없이 휩쓸었다.

익숙한 빛깔, 익숙한 기운. 유리아는 눈을 부릅떴다.

“자이……! 안?”

상대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그 이름을 부르려던 유리아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뒤집혔다.

“넌 누구지? 내가 아는 각성자가 아닌데?”

마물의 벽을 우악스럽게 찢어발기고 나타난 상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경계심이 잔뜩 섞인, 가시 돋친 말투다. 그러나 정체를 묻고 싶은 건 유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누구…… 세요?”

자이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일행도 아니었다.

오로라를 두른 맨손으로 마물들을 태연하게 학살하는 그 상대는, 전혀 본 적도 없는 낯선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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