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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1) (192/210)


192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1)
2023.04.13.


마계의 중심, 거성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교만의 왕좌.

“……!”

내면에서 일어나는 찬탈자의 저항을 억누르며 힘을 갈무리하던 교만이 어느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찬탈자를 흡수한 그는 마계의 주인이며 마계 그 자체이기도 한 존재. 마계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 어떤 사소한 일이라도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전혀 사소하지 않은 일이 마계의 구석진 땅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갑자기 차원 균열이 열리다니. 어디와 연결된 거지?’

갑자기 열린 하얀 균열의 정체를 파악하던 교만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고향과 연결되어 있다!’

온몸에 소름이 번지고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넘쳐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것은 분노이기도 하고, 동시에 기쁨이기도 했다.

‘자이안 알코스. 기어이 필멸자의 한계를 극복했구나!’

그의 어미, 나이아 알코스와 똑같은 전철을 밟은 것이다. 교만이 재차 침공하기 전에 자기들 쪽에서 먼저 반격을 가하자는 심산이었을 터.

온갖 감정이 뒤섞인 끝에, 최종적으로 교만의 얼굴에 자리잡은 표정은 환한 웃음이었다.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군. 훌륭하다, 자이안 알코스.’

교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내면에서는 찬탈자의 의지가 악랄하게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그런 사소한 건 아무래도 좋았다.

대적자가 제 발로 찾아왔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 * *

신스 웰플레인은 공터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력한 차원 에너지 폭발이 구형의 결계에 갇힌 채 미친 듯이 날뛰다가, 이내 열쇠로 수습되었다.

마침내 백색으로 밝게 빛나는 균열이 열리고, 제 역할을 다한 열쇠는 그 안으로 녹아들 듯 소멸했다.

“윽…….”

신스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감싸쥐며 흐린 신음을 뱉었다. 평정을 유지하고자 했으나, 가슴 속이 송두리째 비어버리는 듯한 상실감을 도저히 견디지 못했다.

‘다행히 눈치 채지는 않은 모양이군,’

자이안 일행은 눈앞에 나타난 균열을 보며 정말로 계획이 성공한 건지, 이대로 균열을 넘어가도 안전할지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멀리 떨어져서 기척을 숨기고 있는 신스의 존재는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 조금 전에 일어난 강력한 에너지 폭발 덕분에, 반대로 균열의 상태는 지극히 안정적이야.”

아르스가 백팩을 전개해 균열의 상태를 점검하고는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자이안이 결연한 얼굴로 균열의 앞에 섰다.

깊게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은 뒤, 그는 망설임 없이 균열 너머로 몸을 던졌다.

그와 동시에 자이안의 펜던트로부터 소환된 네 각성자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자이안이 펜던트와 함께 차원을 넘으면서 소환 기능이 간섭을 받아, 일시적으로 소환이 풀린 것이다.

자리에 남은 건 유리아와 소아레스, 케이뿐. 그리고 그들 역시 자이안과 마찬가지로 망설임 없이 차례대로 균열로 몸을 던졌다.

‘좋은 동료를 뒀구나, 자이안.’

사실 그들이 자이안을 따라 마계로 가야 할 의무는 없었다.

자이안 역시 내심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 명에게 마지막으로 선택권을 주고자, 자이안은 가장 먼저 균열로 몸을 던진 것이다.

이윽고 균열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억지로 버티고 서 있던 신스의 몸이 결국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그녀가 볼품없이 쓰러지기 직전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커다란 손이 그녀를 부축했다.

“스승님.”

신스가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뿌옇게 이지러져서 사물이 제대로 분간되지 않았다. 그래도 목소리는 아직 정상적으로 들렸다.

신스는 쓰게 웃음을 머금으며, 그러나 자신이 제대로 된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입을 열었다.

“프레지오. 너는 아직도 나를 그렇게 부르는구나.”

“자이안만큼 오랫동안 당신과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저 역시 당신께 가르침을 받은 몸입니다.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다름 아니 스승님 당신이고요.”

“내가 그랬느냐? 하하, 늙어서 그런지 옛날 일은 잘 기억이 나질 않아.”

농담하듯 하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백작은 무거운 표정으로 물었다.

“스승님. 왜 자이안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 겁니까?”

신스 웰플레인의 육신은 곧 죽는다.

본래는 특별한 사고가 없는 한 영생하게 되는 하이엘프의 육체. 마계로 건너가 찬탈자를 쓰러뜨리겠다는 자이안의 목적을 이뤄주기 위해, 신스는 자신의 정수를 직접 추출하고 깎아 ‘열쇠’라는 형태로 재련했다.

신스 역시 나태와 함께 다른 수단이 없을지 찾아 헤맸지만, 서로 다른 두 차원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어내려면 적어도 그 정도의 희생은 치러야만 했다.

“그 아이가 부담을 느낄 것 아니냐.”

“자이안이 돌아오면 자신 때문에 스승님이 희생했다고 생각해서 더 큰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래. 분명 그렇겠지. 그래도 큰 싸움을 앞두고 정신이 흐트러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 그 아이의 앞길을, 그 아이가 짊어진 업을 나 따위가 방해해서야 되겠느냐.”

신스의 의사는 확고했다. 죽음을 앞두고 흐려져야 하건만 두 눈동자는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나저나, 너는 용케도 알아차렸구나.”

“저라고 뭔가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지금 이렇게 쓰러지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습니다.”

“쯧. 조금만 더 참아볼 걸 그랬구나. 그러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조용히 떠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말에 백작의 표정이 슬픔으로 물들었다.

“그런 최후는 너무 외롭지 않습니까.”

“제자에게 자기 목숨값을 억지로 지우려 드는 나쁜 스승의 최후로는 걸맞지 않겠느냐.”

백작이 신스를 조심스럽게 안아들어 왕성으로 향했다. 품에 안은 작은 몸은 마치 깃털을 안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은 시간은 제가 함께 있을 테니 외로울 일은 없을 겁니다.”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와 함께라니. 내가 말년에 벌을 받는 모양이다.”

“스승님께서는 아직도 제가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입니다.”

“마음에 안 들고말고. 난 원래 알레프의 핏줄은 다 싫어해.”

“자이안도요?”

넓고 푹신한 침대로 옮겨진 신스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가늘게 뜬 흐릿한 눈은 두서 없이 과거의 기억들을 헤매고 있었다.

“그 아이는 예외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눈에 확 보일 정도로 자이안을 편애하셨죠. 그 아이의 특별한 태생 때문입니까?”

“그 아이가 짊어진 업 때문이다. 운명을 꺾는 운명이라는, 모순된 별을 타고난 아이.”

신스에게는 한 가지 취미가 있었다. 별의 운행을 읽고 누군가의 운명을 가늠해보는 것이었다.

지구에서 전해진 점성술과도 닮은 기술이다.

하나 차이가 있다면 그녀는 하이엘프 특유의 능력을 기반으로 허구가 아니라 정말로 운명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 정도일까.

자이안이 태어난 날, 그녀는 심상치 않은 별의 움직임을 느끼고 운명을 점쳤다. 그리고 운명을 꺾는 운명이라는 모순된 업을 짊어진 별을 찾아냈다.

“그 별의 주인이 자이안이라는 건, 그 아이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 바로 알 수 있었지. 내가 그 아이에게 힘을 쏟은 건 그런 이유다. 프레지오 너도 아니고, 나이아 그 아이도 아니며, 오직 자이안만이 정해진 운명을 꺾고 모든 것을 불확실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지.”

“…….”

그리고 자이안은 실제로 불가능한 위업을 여러 번 이뤘다. 마족들을 격파하고, 멸망해야 하는 나라를 살렸으며, 반대로 멸망하지 않아야 하는 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이다. 그 아이가 짊어진 업의 끝자락이, 곧…….”

호흡이 흐려졌다. 신스는 천천히 들숨과 날숨을 반복해 보았지만 스스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약했다. 백작은 한 차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치신 것 같습니다. 그만 쉬시지요. 그래야 며칠이라도 더 살아서 제 얼굴이라도 좀 더 보실 것 아닙니까?”

“생애 마지막에 보는 게 네 얼굴이라니…… 하하.”

마른 웃음을 뱉은 신스가 잠들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백작은 섬뜩한 기분에 그녀의 입가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아직은 약한 숨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백작은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얼마간 더 그녀를 지켜보다가 방을 나섰다.

‘자이안 이 녀석은 언제쯤 돌아오려나.’

어려운 요구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그가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와 신스의 마지막 순간에 그 곁에 있어줬으면 했다.

‘허, 참.’

그러다가 문득 든 한 가지 생각에 백작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이안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든가 하는 생각은 아예 조금도 안 하고 있었네.’

아무리 철저히 준비를 했다고 해도, 제 발로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도 백작은 신기할 정도로 걱정이 들지 않았다.

‘그 녀석이라면 잘 해내겠지.’

어느새 자이안에 대한 믿음은 그렇게 크게 자라 있었다.

* * *

속이 울렁거리고, 눈앞에 휘황찬란한 빛이 쉴 새 없이 색채를 바꾸며 휙휙 지나갔다.

자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지 아니면 머리를 땅에 박고 있는지, 그도 아니면 공중에 떠서 허우적거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일그러진 세계. 자이안은 자신이 그런 세계에 미아처럼 휙 내던져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내가 방금 전까지 뭘 하려고 했더라? 의식을 다잡으려 해도 도무지 제대로 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귓가에서는 벌레가 웅웅거리는 듯한 시끄러운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그리고 그 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반가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자이안은 자연스럽게 거기에 귀를 기울였다.

-……안……!

아주 작은 외침. 자이안의 의식은 필사적으로 거기에 매달렸다.

-자이……!

소리가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자이안! 언제까지 퍼져 잘 셈이냐!」

“허윽?!”

자이안은 숨을 크게 집어삼키며 눈을 떴다.

* * *

“삼촌?!”

버럭 소리를 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코끝에 무언가가 새까맣게 불타버린 것 같은 매캐한 냄새가 났다.

「잘도 퍼져 자더구만. 여기가 무슨 안방이냐?」

펜던트 너머로 프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이안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주섬주섬 자리를 일어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

그리고 주변에 펼쳐진 전경을 확인하며 눈을 부릅떴다.

피처럼 붉은 하늘. 모든 것이 검게 죽어버린 땅. 뒤죽박죽이던 머릿속이 정리되고 자신의 목적이 명확하게 떠올랐다.

“여기가…….”

마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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