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1화 적진으로(4) (191/210)


191화 적진으로(4)
2023.04.12.


“이게 바로……!”

탁상 위에 놓인 물건을 보고 자이안이 감회에 찬 목소리를 뱉었다.

장식 없이 둥글고 소박한 펜던트처럼 보이는 그 모습은 열쇠라 부르기에는 다소 동떨어져 있었지만, 어차피 아티팩트에게 겉모습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게 갓 만들어진 시제품이라는 건데…….”

비어있는 아무 의자에나 털썩 앉으며 아르스는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막상 게이트를 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아마 좀 위험할 거야.”

“균열이 열리는 순간 강력한 에너지 폭발이 일대를 휩쓸게 될 거다. 미리 대비를 해야겠지.”

뒤따라 회의실로 들어온 신스가 아르스의 말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누나답지 않은 말이네요. 그런 건 개선하면 그만이잖아요?”

“개선은 불가능해. 더 이상 재료가 없거든.”

반년에 걸쳐 만들어낸 아티팩트, ‘열쇠’. 신스가 체내에서 뽑아낸 펜던트를 기반으로 완성된 그 아티팩트는 더 이상 어떠한 조정이나 개선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였다.

시간을 들이면 무언가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기약이 없었다.

“그럼 결론은 하나구만.”

프레이가 별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며 자이안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자이안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 부담이야 감수하면 된다. ‘열쇠’를 만들어낸 것만으로도 아르스는 제 할 일을 모두 완수한 것이다.

“그럼 앞으로 남은 시간 마저 준비를 철저히 하고, 모든 준비를 마친 뒤 열쇠를 사용하겠습니다. 혹시 다른 의견 있는 분 있나요?”

자이안의 말에 모두는 말없이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최종 결전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초읽기에 들어섰다.

* * *

그로부터 약 2개월. 일행들은 훈련을 비롯한 준비에 더욱 가열하게 박차를 가했다. 아르스를 비롯해 공학조 역시 최대한 열쇠의 위험 부담을 줄여보려 애썼다.

그 결과 초기에는 왕도 전체를 흔적도 없이 쓸어버릴 규모였던 에너지 폭발을 왕성 하나를 쓸어버리는 수준으로 억제하는 것에 성공했다.

“슬슬 균열을 열어보려 합니다.”

어느 날 오후, 회의실. 자이안이 한 명도 빠짐없이 일행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금방이라도 싸울 수 있다는 듯 호전적으로 웃는가 하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긴장 섞인 한숨을 뱉거나, 그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더 이상의 준비는 무의미할 것 같아요. 유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요.”

신스는 유예 기간을 1년으로 잡았지만,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행동은 빠를수록 좋았다. 너무 시간을 오래 끌면 교만 역시 그만큼 힘을 회복하게 될 테니까.

“내일 오전, 마계로 통하는 균열을 열겠습니다.”

이견은 없었다. 예상치 못한 사고도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약속된 날 아침이 밝았다.

자이안이 가장 먼저 공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왕궁의 건물 중 쓸모없는 일부를 무너뜨리고 만든 넓은 공터였다. 에너지 폭발에 대비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것이다.

두 번째로 프레이가 나타났다. 아직 약속 시간이 되기는 한참 남은 시간이었다. 자이안이 그에게 작게 묵례했고, 프레이는 눈짓으로 인사를 받았다.

“다른 분들은 아직인가 봐요.”

“나름대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물론 죽으려고 가는 녀석은 없겠지만…… 자칫 일이 틀어지면 고향은커녕 전혀 상관도 없는 다른 차원에 뼈를 묻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자이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러는 너는?”

“예?”

“네 기분은 어떠냐고. 아무 후회도 없냐?”

자이안은 잠시 멍하게 굳어 있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이제 와서 뭘 후회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지 않습니까.”

“글쎄다. 마음속 미련을 겉으로 드러내면 네 마음가짐에 변화가 있을 수는 있겠지.”

자이안은 재차 입을 다물었다. 프레이는 팔짱을 끼고 그의 곁에 서서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후회는…….”

자이안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후회는 항상 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숙인 그의 표정에 자조 섞인 쓴웃음이 번졌다.

“삼촌도 참 잔혹하십니다. 그런 건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는데.”

“사람이 자기 판단을 후회하고 미련을 가지는 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어차피 우리는 바라는 모든 걸 손에 넣을 수는 없어. 무언가를 할 때는, 선택하지 않은 무언가를 버려야 하지.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는 크든 작든 미련이 하나둘 쌓이는 거다.”

“전 그러기 싫어요. 제가 바라는 모든 걸 손에 넣고 싶습니다.”

“그래. 나도 안다. 욕심 많은 녀석 같으니.”

“하하. 제 성격이 이렇게 된 건 다 삼촌 때문인데요.”

잠시 프레이의 말문이 막혔다. 처음 만난 시기, 자이안이 한창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할 때 프레이의 말은 그의 등을 밀어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어찌 보면 그때의 행동 역시 프레이에게는 하나의 후회였다.

그 덕분에 자이안은 아무 일에나 오지랖을 부리며 목숨이 위태로운 싸움을 셀 수도 없이 겪었다. 만약 그때 프레이가 다른 방향으로 자이안의 등을 밀었다면?

‘그러면 자이안이 구할 수 있었던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겠지.’

프레이는 피식 웃었다. 과거의 어떤 행동을 후회한다고 해서, 그때 다른 행동을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게 왜 내 잘못이냐? 네 천성이 오지랖 많은 호구인 탓이지. 자식이, 나한테 목숨값 빚진 건 생각도 안 하고 말이야.”

“그건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근데 그거랑 이건 다른 얘기죠. 그런 식으로 교묘하게 화제를 돌리는 화법으로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다면 오산입니다.”

“어쭈. 항상 감사해? 그럼 내가 당장 갚아달라면 갚을 수 있냐?”

“물론이죠.”

자이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프레이의 말문이 막혔다.

“저는 언제든 그때의 빚을 갚을 준비가 돼 있습니다.”

“……농담에 그렇게 진지하게 대답하면 여자한테 인기 없다.”

겨우 입을 뗀 프레이가 장난하듯 화제를 얼버무렸다.

“여자요? 글쎄요…… 별로 생각이 없는데.”

“너 벌써 18살, 아니지. 곧 19살이잖아. 성인군자도 아니고, 여자 생각 좀 한다고 해서 이상한 건 아니다.”

“얼버무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없습니다.”

“진짜? 정말 아무 욕심도 없다고? 흠, 유리아는 어떠냐?”

“예에? 유리아는 가족 같은 존재라고요. 어떻게 그런 눈으로 봅니까? 망측하게.”

눈치 없는 대답에 프레이는 한숨을 뱉으며 이마를 감싸고 말았다.

유리아 역시 기본적으로는 자이안을 가족처럼 친근하게 대하지만, 그 친애의 감정은 덜 자란 연정이 뒤섞인 복잡미묘한 것임을 프레이는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정작 유리아 본인은 자기가 그런 눈으로 자이안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당사자들이 모르는데 내가 끼어들어서 훈수를 두는 것도 이상한 노릇이고.’

자이안이나 유리아나 평범한 유년기를 보낸 것이 아니다 보니 그런 감정에 익숙지 못한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이안의 경우는 아예 그런 마음조차 전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지만.

‘에라, 모르겠다. 다 큰 성인들인데 알아서 하겠지.’

잠시 이리저리 생각해보던 프레이는 그냥 손을 놓기로 했다. 원래 남녀 사이에는 섣불리 끼어들어서 좋은 꼴을 못 보는 법이다.

그리고 그 시각. 화제의 당사자 중 또 한 명인 유리아의 방.

“…….”

준비를 마친 유리아가 천천히 일어났다.

‘여길 나가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겠지.’

걸음이 더뎌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유리아는 한 번 이를 악물고, 몸에 엉겨 붙은 거미줄을 떼어내는 것처럼 강하게 발을 내디디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방을 나서기 전. 유리아는 잠시 자리에 멈춰 방을 돌아보았다.

탁상 위에 낡고 해진 브로치가 놓여 있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알즈레드 상회의 상징. 빈털터리로 나라를 떠나야 했던 그녀가 간신히 가지고 나온, 아버지 벤야 알즈레드의 유품이기도 했다.

다시 등을 돌린 유리아가 미련 없이 방을 나섰다.

과거도 후회도, 모두 유품과 함께 등 뒤에 놔두고. 아버지를 구하지 못한 것이 그녀의 마지막 후회였다. 자이안과 동행을 시작한 뒤로 그녀는 단 한 번도 그 결정을 후회한 적이 없다.

“주군께서 바라시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오직 자이안에 대한 헌신으로 여기까지 함께한 소아레스도.

“잘못된 모든 것들을 바로잡을 때가 머지않았네. 에스폴카네. 내 첫 번째 친구이자 나의 아버지. 이제 만족하니?”

옛 친구와의 우정, 그리고 두 번째 친구와의 우정으로 함께 한 케테르크, 최후의 용도.

때가 되자 모두가 공터로 모였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시선을 맞추고, 이내 자이안이 중심에 나섰다.

“시작하겠습니다.”

프레이와 유민이 공터를 완전히 감싸는 강력한 결계를 펼쳤다.

이 정도면 에너지 폭발이 일어나도 바깥에는 큰 영향이 없을 터. 결계의 모습을 확인한 자이안이 ‘열쇠‘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허공에 꽂았다.

쿠우우웅――

낮고 무거운 진동음이 들렸다. 공기가, 아니 공간 전체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허공에 꽂힌 열쇠가 거칠게 진동했다. 자이안이 손을 놓고 물로서도, 열쇠는 여전히 허공에 꽂힌 채였다. 진동 역시 강해졌다.

“온다!”

프레이가 강하게 소리쳤다. 그 순간 엄청난 압력이 모두의 몸을 짓눌렀다.

“크윽……!”

자이안은 자세를 낮추고 이를 악물며 광포한 폭발을 견뎠다.

온몸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일행들도 각자 결계나 아티팩트 등의 힘으로 문제없이 폭발로부터 몸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돌연 몸을 짓누르던 압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마안을 연 프레이가 허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낮게 탄식했다.

공중을 가득 채운 차원 에너지가 빠르게 허공의 점으로 수속되고 있었다. 힘을 응축한 열쇠가 환한 빛을 내뿜었다.

쩌적.

공간이 세로로 길게 갈라지고, 백색으로 빛나는 균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