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적진으로(3)
(190/210)
190화 적진으로(3)
(190/210)
190화 적진으로(3)
2023.04.11.
성국 솔레리온. 나라의 최고 지도자이며 국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성녀 퀴나스 솔레티아는 몇 가지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마물이 너무 없어도 문제. 너무 많아도 문제…….”
부족한 치안을 일부 해결하고 경제를 활성화하고자 트레저 헌터들을 적극적으로 유입하는 정책이 시행된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시행착오는 있었으나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외부의 영향만 없다면 이대로 순항하는 것도 문제는 아닐 터.
그러나 최근 몇 달 새에 정책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났다.
한 번은 몇 달 전, 갑작스럽게 마물의 수가 급감한 원인 불명의 사태. 그에 맞춰서 간신히 정책을 수정했더니, 이번엔 또 잠잠하던 마물이 폭발적으로 수를 늘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자이안이 뭔가 하고 있는 거겠지.’
원망, 까지는 아니어도 조금 야속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하다못해 일을 벌이기 전에 귀띔이라도 한 번 해줬으면 미리 준비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을.
‘누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
그녀가 국정을 앞에 두고 깊은 시름에 빠질 때마다 곁에서 든든하게 도움을 준 전대 성녀는 하필 지금 한 달 정도 자리를 비운 상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나라의 앞날을 위해 정책을 고민하는,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 지도자로서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었다.
‘갑자기 마물이 너무 많아져서 예상치 못한 인명 피해가 커. 예산을 당겨서 구호물자를 더 풀고…… 수습 사제들을 파견을 보내볼까? 적절한 보상만 주어진다면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분명 의욕을 낼 거야. 보물 사냥꾼 길드에 대한 지원도 다시 한번 검토해봐야겠어. 사냥꾼들만 가지고서는 불어난 마물들에게 제대로 대응할 수 없을 거야. 으으, 인력이. 돈이.’
서류를 붙잡은 채 생각을 이어나가던 퀴나스가 책상에 머리를 푹 수그렸다. 어디서 돈이나 물자나 사람이 툭 떨어지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성녀님?”
책상에 머리를 박고 앓는 소리를 내고 있는데 경호를 서던 기사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퍼뜩 고개를 든 퀴나스는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단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테오기스 경? 무슨 일인가요? 급한 용건이 아니라면 되도록 집무가 끝난 뒤에 부탁드려요.”
“자이안 알코스 경께서 방문하셨습니다.”
“……!”
퀴나스는 눈을 부릅뜨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토록 바라던 사람이 하늘에서 툭 떨어졌다.
* * *
신성궁을 찾은 자이안은 성기사들의 안내에 따라 귀빈용 응접실로 발길을 옮겼다.
그들이 내준 차를 마시며 10분가량을 기다리자, 급하게 달려오기라도 한 건지 퀴나스가 숨을 몰아쉬며 응접실로 들이닥쳤다.
“자이안! 잘 왔어요! 진짜 잘 왔어요!”
자리에서 일어선 자이안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퀴나스가 절박하게 소리치며 그에게 달라붙었다.
감격에 겨워 울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허둥지둥하던 자이안이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환영받을 줄은 몰랐는데…… 저도 반가워요, 퀴나스.”
“이렇게 딱 맞춰서 찾아오다니. 역시 당신은 솔라티오의 재림인 게 분명해요?”
“예?”
자세히 보니 퀴나스의 눈은 반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퀭했다. 자이안은 우선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진정시키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사정을 들어보기로 했다.
“아, 마물이.”
“그래요! 그놈의 마물이 항상 문제예요!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자이안, 제발. 저 도와주시려고 온 거 맞죠? 저 버릴 거 아니죠? 아무렴 자이안이 그런 잔인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혼자서 지레짐작하고 불안해하다가 재차 자기 합리화를 하는 등 북 치고 장구 치는 모습을 보니, 그동안 오래도 시달린 모양이었다.
물론 자이안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아티팩트를 명분으로 조금이라도 더 마물의 수를 줄이기 위해 이렇게 원정을 다니고 있었으니까.
“아티팩트요? 아, 그렇지. 안 그래도 얼마 전에 클라비수스 폐하께 따로 연락이 왔었어요. 곧 자이안이 올 테니까 선물이라도 미리 준비해놓는 게 어떠냐고.”
“예? 폐하하고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계세요?”
“그런데요, 왜요?”
“아니, 뭐…… 모르는 새에 언제 그렇게 친해지셨나 해서.”
“저와 폐하와 보석탑의 페시스, 셋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죠. 당신 덕분에 좋게도 나쁘게도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뀌었다는 점이에요. 그게 인연이 돼서 지금은 서로 부담 없이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있어요. 서로 공통점이 있어서 그런지 신기할 정도로 말이 잘 통하더라고요.”
과연 무슨 얘기가 오갈지 궁금했으나, 어쩐지 무섭기도 해 자이안은 괜히 묻지 않기로 했다.
“이건 제가 폐하께 연락을 받은 뒤부터 개인적으로 의뢰를 해서 모은 아티팩트예요. 전부 제 사비로 의뢰한 거예요. 덕분에 한동안 옷도 제대로 못 사 입게 됐어요.”
응접실에서 간단한 안부 인사를 마친 뒤 퀴나스는 자이안을 개인적으로 쓰는 창고로 안내했다. 창고 안에는 수십여 개에 이르는 아티팩트가 두서없이 보관되어 있었다.
자이안이 빠르게 슥 훑어보니, 펜던트에 먹여도 거의 변화가 없을 것 같은 보잘것없는 아티팩트도 많았지만 한눈에 봐도 강한 힘이 느껴지는 아티팩트도 있었다.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자이안은 놀란 눈으로 퀴나스를 바라보았다.
“지금 성국이 자랑할 만한 거라곤 유적, 그리고 보물 정도니까요. 이 정도 유물을 모으는 건 발품 좀 팔면 어려울 것도 없다구요.”
“이건…… 어떻게 인사를 드려야 할지. 고마워요. 잘 쓸게요.”
“공짜 아니에요. 받아먹은 만큼 일은 확실히 해야 해요.”
“물론이죠. 마물은 걱정 마세요.”
원정의 제한 시간은 일주일. 오는 데에 하루가 소요됐고 마찬가지로 돌아가는 길도 하루가 걸릴 테니 실질적 여유는 5일에 불과하다.
자이안은 전광석화처럼 성국 전역에 모습을 드러내며 닥치는 대로 눈에 띄는 마물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이번 원정에 동참한 소아레스 역시 적극적으로 그를 도왔다.
“북쪽 마을에 바실리스크가 나타났다던데. 요즘 마물들이 나타나는 게 심상치가 않아. 이 나라가 정말 망하려 그러나.”
“이놈 봐라. 보물 사냥꾼이라는 놈이 그렇게 정보에 어두워서 어떡하냐?”
어느 날, 어느 마을의 보물 트레저 헌터 길드 지부. 평소 간간이 일을 함께 하며 안면을 튼 두 헌터 사이에서 근거를 알 수 없는 소문이 화제에 올랐다.
“뭐? 갑자기 왜 또 시비야?”
“북쪽에 나타난 바실리스크는 이미 토벌됐어.”
“……진짜? 누가? 아니, 대체 어떻게?”
“그것까진 나도 모른다. 뜬소문으로는 무슨 스물도 안 된 애송이 혼자서 아주 그냥 도륙을 내버렸다던데.”
“바실리스크를? 한 명이? 헛소문이구만.”
“아마 그렇겠지. 바실리스크가 나타났다는 것도 뭐가 잘못 전해진 거 아닌가 싶은데.”
그와 비슷한 일들이 성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소문에서 언급되는 마물의 종류도 제각각이었다. 어떨 때는 코카트리스였다가, 어떨 때는 가고일이었다가, 어떨 때는 샐러맨더였다가.
그러나 공통되는 내용도 있었다.
그 모두가 평범한 헌터는 사냥은커녕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할 만큼 위험한 마물이며, 스물도 되지 않은 청년 혼자서 그 모든 마물을 토벌했다는 내용이다.
소문은 신성궁에 틀어박힌 퀴나스의 귀에도 물론 들어갔다.
쉬이 믿지 못하는 민간의 분위기와 달리, 그게 모두 한치의 과장도 없는 사실임을 알고 있는 퀴나스는 그저 허탈한 심정이었다. 진작에 자이안에게 매달릴걸.
‘……아니지. 언제까지고 남한테 매달리기만 할 수는 없잖아.’
불현듯 떠오른 약한 생각을 퀴나스는 고개를 내저어 털어냈다.
지금처럼 계속 남의 도움을 받기만 해서는 언젠가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진정한 위기의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버린다.
자신은 물론 자신이 짊어진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서도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할 만큼, 퀴나스는 단순한 농가의 딸에서 나라의 지도자로 차근차근 변화해가고 있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저기. 그게…… 미안해요.”
마지막 날. 떠날 채비를 하는 자이안 앞에 나타난 퀴나스가 우물쭈물하며 사과했다. 정작 자이안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저한테 뭐 잘못한 일 있었어요, 퀴나스?”
“아니, 그게 그러니까. 하아. 당신도 바쁠 텐데, 괜히 여기 와서 시간 보낸 거잖아요.”
“아하하. 전 또 뭐라고.”
다소 침울해하는 퀴나스를 마주하고 자이안은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웃었다.
“전 제가 하고 싶은 일밖에 안 해요. 그리고 전 그런 일들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처음 여정을 시작한 뒤로 자이안이 버릇처럼 입에 달게 된 말. 이제 그 말은 온전히 그의 삶의 자세가 되었다.
마지막까지 얼굴을 펴지 못하는 퀴나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주고, 자이안은 예정대로 성국을 떠났다.
자이안 자신이 아직 성장 중이며 더 발전할 여지가 있는 것처럼, 퀴나스 역시 아직 성장 도중의 단계다.
지금과 같은 고민과 갈등을 모두 거친 뒤 그녀는 분명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지도자로 완성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자이안은 활발하게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며 마물들을 구제하는 데 앞섰다.
때때로 추억이 깃든 장소에 머무르며 과거를 되새기기도 했고, 대륙 동북단 보석탑의 영역까지 발을 옮겨 페시스와의 재회를 만끽하기도 했다.
“조만간 이 땅에 작은 나라가 세워질 겁니다.”
“건국……! 결국 그렇게 되는군요.”
“보석탑의 비호도 없이 작은 마을들만 점재한 지금 상태로는 외적으로부터의 방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다만 어떤 정치 체계를 가진 나라가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마법사들에게 아주 크게 덴 탓에, 이곳 주민들은 누군가를 지도자랍시고 떠받드는 게 아주 신물이 난 터라.”
“그러면 공화정의 구조를 참고하는 건 어떨까요?”
“예? 공화정이 뭡니까?”
“서대륙의 웨코스 공화국이라는 나라가 취한 독특한 정치 체계예요. 저도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그건 제가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지구 입장에서는 공화정이라는 건 익숙한 개념이거든요.”
“아, 그럼 크룩스 형한테 설명을 들으면 되겠군요.”
그런 식으로 모두가 충실하게 시간을 보내기를 약 몇 달. 교만과의 싸움으로부터 약 반년가량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콰앙!
근 한 달 내내 단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던 아르스의 공방 문이 거칠게 열렸다.
살아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걸어다니는 시체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운 퀭한 안색의 아르스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리고 왕성의 어느 한 방향으로 향했다.
알현실을 완전히 뜯어고쳐 중요한 회의를 위한 회의실로 개조한 넓은 방이었다.
마침 자이안과 프레이, 크룩스, 유리아와 소아레스까지 많은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술 토의를 하고 있었다.
아르스는 커다란 문을 이번에도 거침없이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경첩이 덜렁거리던 문 한 짝이 결국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꼬라지 봐라. 저거 맨날 저러고 사니까 마흔이 넘도록 독신이지. 쯧쯧.”
가장 먼저 고개를 든 프레이가 가차 없이 독설을 뱉었다.
물론 쌍방 다 농담 삼아 하는 소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르스는 프레이 쪽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커다란 탁상 위에 탁, 하고 물건 하나를 내려놓았다.
“완성했어.”
금방이라도 무덤에 기어들어 가야 할 것만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아르스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이 넘쳤다.
“마계로 갈 수 있는 열쇠야.”
/20230411123659513217_5BEC9BB9EC868CEC84A4ED919CECA7805DECB0A8EC9B90EC9DB4_.png alt="">
/20230411123659513217_EBB7B0ECBBB4ECA688+EBA19CEAB3A0.jpg a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