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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화 적진으로(2) (189/210)


189화 적진으로(2)
2023.04.10.


마계. 본래 찬탈자가 존재했던 거대한 무저갱의 공동. 그 중심에 백색과 회색이 어우러진 커다란 건물이 한 채 부유하고 있었다.

성이라기엔 지나치게 현대적이고, 반대로 빌딩이라기엔 지나치게 장식이 많고 호화로운 건물. 상반된 두 문명의 장점만을 절묘하게 융합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겉모습과 달리 내부는 휑하기 그지없었다. 층 구분도 없이 대부분의 공간이 수직으로 뻥 뚫려 있고, 장식품이나 집기 따위도 전무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의 모습도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 건물의 안쪽. 가장 깊은 곳에 공허하게 자리한 옥좌.

한때는 클레피오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그러나 지금은 그저 ‘교만’에 불과한 남자가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생각보다 부담이 크군. 지성 없는 반쪽짜리일지언정 일단은 초월자라 이건가.’

고요한 겉모습과 달리 그의 내부에서는 두 가지 상반된 의지가 끊임없이 부딪히며 격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한쪽은 교만 그 자신의 의지. 그리고 반대편은, 그가 일전에 완전히 흡수하는 데 성공한 ‘찬탈자’의 남은 조각들이었다.

적어도 수천 년 전. 이제는 햇수를 기억할 수도 없게 된, 까마득히 오래된 과거. 찬탈자에게 잡아먹혔음에도 의지를 잃지 않은 이는 나태, 테라플로리크뿐만이 아니었다.

교만 역시 멀쩡히 기억과 의지를 유지했다. 나태처럼 미리 수를 쓴 것도 아니고, 순전히 정신력 ― 즉 영혼의 강함으로 버틴 것이다.

의지를 가진 채로 찬탈자와 연결된 교만은 이를 통해 찬탈자에 대해 아주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찬탈자의 과거. 본래 찬탈자는 어느 작은 차원의 가스 생명체 종족이었으며, 돌연변이로 태어나 무엇이든 포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됐다.

동족을 비롯해 자기 차원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포식한 그는 종국에는 세계 그 자체마저 먹어 치웠다.

그리고 차원 바깥의 거대한 무한 우주, 그 우주에 흐르는 ‘아무것도 아니며 모든 것이기도 한 미지의 힘’을 받아들여 마침내 초월자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초월자가 되었어도 그 본질은 그저 본능대로 주변의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지성의 편린조차 가지지 못한 아둔한 가스 생명체에 불과했다.

아무 차원이나 거리낌 없이 침공해 마구잡이로 먹어 치우는 그 행동은 무한 우주에 은둔한 다른 초월자들의 심기를 건드렸고, 찬탈자는 결국 그 어떤 생명도 싹트지 않는 척박한 왜계(矮界)에 유배되고 말았다.

‘그 왜계가 바로 이곳. 인간들이 마계라 부르는 죽음의 차원, 진정한 불모의 땅.’

초월자들은 그 시점에서 찬탈자에 대한 관심을 끊어 버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련의 사건은 본능뿐인 찬탈자에게 한 가지 명확한 목적을 심어주는 결과가 되었다.

자신을 유배한 초월자들에게 복수하고 그들의 위치를 빼앗는 것. 즉, 찬탈. 단순하게나마 자의식을 가지게 된 그는 그때부터 스스로를 ‘찬탈자’라고 지칭하게 되었다.

‘그 이후의 모든 행동은 찬탈을 위한 밑거름이었고.’

마계를 완전히 침식해 차원 그 자체와 동화되고, 시행착오를 거쳐 마물이라는 수족을 만들어내고, 더 많은 차원을 먹어 치우고 강한 힘을 손에 넣고자 침략을 시작했다.

몇 개의 작은 차원이 찬탈자의 손에 멸망해 잡아먹혔고, 교만의 차원 역시 그런 전철을 밟을 뻔했다.

‘고향은 물론이고, 더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친 지구라는 차원조차 먹어 치우는 것에 실패했지. 게다가 생각지 못한 반격까지 당했다.’

필멸자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무한 우주의 틈새를 뛰어넘어 단신으로 마계를 침공한 인간, 나이아 알코스. 비록 격퇴에는 성공했으나, 득은 없고 손해뿐인 싸움이었다.

찬탈자가 스스로의 육신을 쪼개 빚어낸 수족 중 대다수가 나이아의 손에 파괴된 데다, 정작 그녀를 잡아먹지도 못하고 유유히 도망치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찬탈자의 입장에서는 두 번째 실패였다. 심지어 상대는 그의 입장에서는 작디작은 미물에 불과한 필멸자 한 명. 그가 느낀 당혹과 분노, 그리고 두려움은 필설로 형용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것이었으리라. 그 결과, 찬탈자의 의식에 커다란 빈틈이 생겼다.

‘나이아 알코스가 아니었더라면 찬탈자의 의식을 완전히 흡수하기까지 한참 더 오랜 시간이 걸렸겠지.’

그가 그 아들 자이안에게 계속해서 호감을 보인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에게 자기와 함께하자고 한 제안도 단순히 떠보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교만은 그가 결코 자기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리라는 사실 역시 직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지.’

교만의 눈앞에 흐린 불꽃이 떠올랐다. 모두 총 네 개. 각각 탐욕과 분노, 폭식, 음욕의 영혼이다. 찬탈자의 체내에 파묻혀 있던 영혼의 조각을 추출해낸 것이다.

‘자이안, 네가 너희 종족을 수호하는 것처럼 나 역시 동족들의 목숨을 짊어지고 있다.’

다음 순간, 그 주위로 수십만의 작은 불꽃이 일시에 타올랐다.

그 모두가 그와 동료들을 믿고 따른, 그 결과 찬탈자의 농간에 희생당하고 만 동족들의 영혼이다.

교만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주위에 불타는 수십만의 영혼이 차례대로 날아와 그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그럴수록 교만은 자신의 영혼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짊어진 모든 생명의 무게였다.

“……마계에서는 결코 생명이 싹트지 않지.”

천천히 눈을 뜬 교만이 나직하게 말했다.

영혼만 남은, 그마저도 불완전한 조각뿐인 동족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기 위해서는 생명의 힘이 넘치는 다른 차원의 힘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자면 찬탈자의 힘을 이용한 테라포밍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 본래 그 차원에 존재하던 다른 생명체들은 어쩔 수 없이 희생되고 만다.

“나와 내 동족을 위해, 자이안. 너희의 세계는 내가 가지겠다.”

* * *

대륙 각지에 이변이 일어났다. 분노와 탐욕을 쓰러뜨린 뒤로 잠잠해진 듯하던 마물들의 준동이 다시금 활발해진 것이다.

교만이 물러나고 두어 달가량 지났을 무렵이었다. 더 큰 거점의 필요성을 느낀 일행들이 왕궁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기 위해 일리움 왕도로 향했고, 그 과정에서 몇 번이고 하위 마물 무리와 마주치며 이상함을 눈치챈 것이다.

“균열 때문은 아닐 거야. 혹시 새로 균열이 열리지 않았는지는 내가 일주일 단위로 계속 확인하고 있으니까.”

“지난번에 교만이 침략했을 때 놈이 품은 짙은 마나가 대륙 전역으로 퍼진 것이겠지. 마나는 마물의 생명력을 더욱 크게 활성화시키니 말이다. 자연적으로 번식을 시작한 놈들도 많을 게다.”

아르스와 신스의 설명에 자이안의 얼굴이 굳었다. 기껏 사람들이 마물의 위협에서 해방됐는데, 또다시 같은 위험을 겪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너 혼자서 대륙 전체를 싸돌아다니며 마물들을 때려잡을 셈이냐? 얼토당토않은 소리 좀 하지 마라, 자이안.”

프레이의 엄한 질책이 자이안의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를 식혔다. 잠시 고민한 자이안이 타협책을 냈다.

“세계 곳곳에는 아직도 많은 유적과 유물이 숨어있습니다. 그중에는 펜던트에 먹일 만큼 뛰어난 성능을 가진 아티팩트도 분명 있을 거예요. 그런 아티팩트를 찾아다니는 김에 겸사겸사 주변의 마물들도 처리하는 건…… 안 될까요?”

“안 돼.”

“삼촌!”

“……라고 말하고 싶지만, 네 성격에 무작정 뜯어말리기만 하면 혼자서 몰래 떠나버릴 테니. 좋다. 단, 유적을 찾으러 갈 때는 반드시 우리 중 한 명과 동행할 것. 한 번 떠나면 일주일 안에는 무조건 돌아올 것.”

“삼촌! 사랑합니다!”

“징그러우니까 좀 꺼지고.”

그 때부터 자이안의 일정은 이전과 비교할 수도 없이 바빠졌다. 안 그래도 최후의 싸움을 위해 준비할 게 많은데 거기에 원정이라는 일정이 추가된 것이다.

그러나 바빠진 것과는 반대로 자이안의 눈은 항상 의욕이 넘쳐 흘렀다.

때때로 자이안은 원정 도중 공화국이나 제국, 성국과 보석탑 영역에 잠시 들르기도 했다. 언젠가 또 찾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했고, 마물의 준동이 격렬해졌으니 걱정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걱정 마라. 제국은 네가 걱정하는 것처럼 약한 나라가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빠르게 과거의 힘을 되찾고 있지. 마물 따위는 제국을 조금도 흔들지 못한다.”

클라비수스 황제의 말은 자신감이 넘쳤다. 단순히 자이안을 안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제국은 빠르게 과거의 국력을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마인화를 이용해 피로를 회복하며 잠도 거의 자지 않고 정력적으로 집무를 처리하는 황제 본인의 노력이 있었다.

“나는 네가 더 걱정이다만.”

“제가요?”

“마계로 간다고 했지. 이길 수 있겠느냐?”

“…….”

“교만이라는 마족이 나타난 게 세 달 전이랬지. 나 역시 그날 밤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함과 미지의 충동을 느꼈다.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어두운 충동, 마인의 본능 따위가 바깥으로 튀어나오려 날뛰는 느낌이 들었지. 내가 그 마족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진 나조차 그만큼 영향을 받을 정도로 강대한 존재인 건 확실할 터. 자이안, 이길 수 있겠느냐?”

자이안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흔들림 없는 눈으로 황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뭐라 말 좀 해보거라. 나는 네가 걱정스럽다.”

“폐하.”

“편하게 부르거라. 나는 언제나 네 앞에서는 제국 황제 클라비수스가 아니라, 너와 함께한 전우 클라비수스이고 싶다.”

“싸움에 절대라는 건 없습니다. 상대가 제아무리 강해도, 혹은 터무니없이 약해도 말이죠.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생각을 정리한 자이안이 가볍게 웃었다.

“전 적어도 죽으려고 가는 건 아닙니다.”

“…….”

우려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황제가 결국 시선을 거뒀다. 자이안의 고집이 얼마나 강한지는 이미 여러 번 겪었다. 이제 와서 말 몇 마디로 생각을 돌리는 건 불가능한 일일 터.

“그러고 보니 일리움 왕국은 사실상 멸망에 가까운 상태고, 지금은 일리움 왕궁을 거점으로 삼고 있다지? 쾌적한 생활을 위한 물자를 좀 보내고 싶다만.”

“예? 굳이 안 그러셔도 됩니다. 저는 이미 폐하께 받은 게 너무 많아요.”

“그렇게 말할 줄 알고 미리 보내 놨다. 지금쯤 선박이 대양을 가로지르고 있을 거다.”

자이안은 한 방 먹은 심정으로 제국을 떠나 일리움으로 돌아왔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대량의 물자가 제국으로부터 도착했다.

“안 그래도 슬슬 식량이 부족하던 참이었어. 폐하께서 용단을 내리셨군그래.”

“식량이요?”

“백성들 먹일 식량 말이다. 하도 연달아 사고가 터져서 제대로 농사도 못 짓고 있는 백성들이 태반이었어.”

백작의 말에 자이안은 크게 눈이 뜨이는 기분이었다. 다시 살펴보면, 황제가 보낸 물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식량이었다.

자이안 일행만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많은 식량은 필요치 않은데도 불구하고. 자이안 일행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백성들에게 구호를 보낸 것이다.

“저도 아직 부족하네요.”

“부족하긴, 이 녀석아. 네가 폐하와 친분이 있으니까 이런 걸 보내준 것 아니겠냐. 그래, 다음엔 성국에 들른다고? 기대하고 있으마.”

어깨를 두드리는 백작의 말에 자이안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쓴웃음만 지었다.

지난 몇 달 새에 백작은 무인으로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착실히 쌓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언제나 바란드가 함께 하고 있었다.

잠시 왕궁에 머무르며 훈련과 아티팩트 제조 등의 일정을 마치고, 자이안은 다시 급히 일리움을 떠났다. 다음 목적지는 백작의 말대로 성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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