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적진으로(1)
(188/210)
188화 적진으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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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화 적진으로(1)
2023.04.09.
“나태가 살아있었다고요? 하지만 그분은…….”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안다. 제 입으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크게 영혼을 다쳤다고 하기도 했고, 실제로 우리 눈앞에서 자살하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육신의 죽음은 모를까, 영혼의 사멸이란 그리 간단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생각지 못한 우연이었다. 세계수의 심장과 융합한 나태의 영혼이 조금씩 자의식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의식을 나태 본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갈가리 찢어진 영혼에 세계수의 힘이 뒤섞여 태어난, 나태의 기억을 가진 새로운 존재가 태어난 것이다.
“헤에. 성국의 성유물과 비슷한 느낌인가?”
아르스의 한 마디에 자이안도 어떤 느낌인지 감이 잡혔다. 완벽하게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얼추 그렇게 받아들여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다시 태어난 나태의 의식은 지극히 불완전한 상태였다. 하지만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지. 세계수의 심장 어딘가에 나태의 영혼이 완전히 분해되지 않고 남아있다는 의미니까. 깊은 곳에 파묻힌 영혼의 조각을 끌어 모아 나태의 의식을 보강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 완전한 자의식을 가지고 대화가 통하며 나태의 기억을 가진, 세계수의 심장에 깃든 정령이라 할 수 있는 존재가 완성됐다.
“정령으로 화한 나태가 가장 처음으로 내게 한 말이 이것이었다. 교만은 죽지 않고 살아있을 거라고.”
세계수라는 거대한 설비의 연산 능력을 기반으로 하는, 미래 예지에 가까울 만큼 정교한 추론이었다. 지구 식으로 비유하자면 나태의 기억을 가진 슈퍼컴퓨터의 계산이었다.
“몇 가지 가설을 도출하고, 순식간에 근거를 보강하고, 그래도 신뢰도가 낮은 가설은 망설임 없이 폐기하는 식으로 추론을 짜내더니, 며칠이 지나 가장 신뢰도가 높은 추론을 말해주더구나. 자이안 네가 공화국에서 죽인 교만은 필시 분체에 불과하며, 교만의 본체는 마계에 숨어서 무언가 다른 계획을 꾸미고 있을 거라고.”
그 계획의 내용 역시 나태가 기억하는 교만의 성격을 토대로 추측했다.
“교만은 분명 가까운 시일 내에 이 세계를 침공하게 될 것이고, 그 시기는 교만을 제외한 모든 마족이 죽은 이후가 될 것이라고 했지. 그래서 우리도 교만의 침공을 대비해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태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이안 너로서도 교만을 상대하는 건 어려운 일일 테니까.”
자이안은 굳은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때 신스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프레이가 전투 불능이 된 시점에서 그대로 패배하고 말았으리라.
“그렇다면 그 몸은 교만과의 싸움을 대비하신 거군요.”
“그것도 있고, 다른 이유도 있지.”
공중 전력이라는 발상은 일전에 프레이와 신스가 나눈 짧은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그때 프레이는 왜 항공 병력을 양산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신스는 낮은 효율과 필요성, 기술의 부족 등을 이유로 꼽았다. 그러나 나태가 정령으로서 힘을 보태자 그 많은 게 해결되었다.
“일단 직접 타 보니까 역시 항공기만 한 게 없더구나.”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신스는 펜던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정확히는 그 너머에서 무표정하게 얘기를 듣고 있는 프레이를 향해.
“그런 식으로 교만의 침공에 대비하며 전력을 가다듬고, 나태와 함께 적절한 타이밍을 계산해 이리로 찾아온 게다. 그러고도 오차가 몇 시간 정도 나서 자칫 늦을 뻔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늦다뇨, 스승님. 정말 최적의 때에 와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진심이 깃든 자이안의 말에 신스도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때마침 신스의 수리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임시 조치에 불과해서 제대로 힘을 쓰려면 아직 더 오랜 요양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신스는 이 정도면 됐다는 듯 손을 휘휘 저어 기계 팔들을 쫓아냈다.
그리고는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가슴팍에 불쑥 손을 집어넣어, 손바닥만 한 무언가를 꺼냈다.
“받거라.”
신스가 내민 그것을 자이안은 엉겁결에 건네받았다. 가운데에 붉은 보석이 박힌, 원형 펜던트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자이안이 목에 건 펜던트와 묘하게 대칭되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아티팩트였다. 확신을 가지지 못한 이유는 그 내부의 MP의 흐름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티팩트 지식을 처음 배우며 펜던트의 구조를 파악해보려 했을 때와 비슷한 인상이었다. 지금 자이안의 능력으로도 쉬이 구조를 짐작하기 힘들 만큼 복잡한 아티팩트라는 의미이리라.
“여길 찾아온 두 번째 이유다.”
눈이 마주치자 신스가 빙긋 웃었다.
“마계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지.”
* * *
신스의 말에 의하면, 아까 교만은 불완전한 상태로 억지로 차원을 건너왔기 때문에 그 반동을 감당하지 못해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
반동 없이 완전한 상태로 이쪽으로 다시 건너오려면 적어도 1년 이상의 유예가 더 필요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저희가 싸운 게 의미가 있었군요.”
교만의 힘이라면 몇 시간 만에 적어도 대륙의 절반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었을 터. 그러나 자이안 일행이 집요하게 막아선 결과 그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물러나야만 했다.
“그놈이 힘을 되찾기 전에 우리 쪽에서 먼저 기습을 할 수도 있겠군.”
마침내 다시 소환이 가능해진 프레이가 신스에게 받은 둥근 펜던트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마계라면 적진 한복판이다. 이쪽에서 쳐들어가면 불리한 싸움을 치르게 되겠지만 이점도 있었다.
민간인을 지키거나 할 필요 없이 마음 놓고 화력을 뻥뻥 쏟아 부을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아직 충분한 준비 시간이 있었다.
“간단하게 분석을 해 봤는데, 당장 게이트를 만드는 건 좀 어려울 것 같아. 그래도 아예 기약도 없던 예전에 비하면 훨씬 낫지! 두고 봐, 늦어도 반년 안에는 무조건 이쪽에서 마계로 갈 수 있는 게이트를 만들어내고 말 테니까. 아참, 자이안. 참고로 쓰게 펜던트 좀 빌려줄래?”
그동안 균열 연구가 풀리지 않아 의욕을 잃어가던 아르스는 오랜만에 두 눈에 힘이 넘쳤다.
그녀가 반년 안에 완성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면, 정말로 반년 안에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다. 자이안은 아르스를 믿고 기꺼이 펜던트를 맡겼다.
쑥대밭이 된 저택과 그 주변을 추스르는 건 알레프 백작이 맡았다. 다행히도 싸움이 벌어진 초기부터 그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제때 대피를 유도한 덕분에 민간 피해는 경미했다.
채 잡아내지 못한 마물 몇 마리가 주변으로 흩어져 인명피해를 내고 말았다는 사실에 자이안은 잠시 스스로를 자책했으나, 그 감정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훈련을 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전투를 담당하는 이들도 그저 멍하니 있지는 않았다. 저택 부지의 숲이 파괴되며 만들어진 넓은 공터에, 자이안과 크룩스의 주도로 그들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유리아와 소아레스 등 평소의 면면은 물론이고 유민과 프레이, 케이까지 함께였다.
“지금부터는 이전과 전혀 다른 방식의 훈련을 하게 될 거다. 어차피 개개의 능력은 다들 충분하고, 이제 와서 빡세게 구른다고 반 년 만에 실력이 눈에 띄게 늘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할 훈련은 강력한 하나의 적을 유기적으로 상대하기 위한 전술 훈련이다.”
통신 마법 등으로 실시간 교신이 가능하고, 오랫동안 함께 싸우다 보니 어느 정도는 눈빛만으로 합을 맞출 수 있기는 했다.
그러나 전문적인 수준은 아니었고, 교만은 그 정도의 어설픈 연계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강적이었다.
“오직 반복 숙달이다.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기 전까지는 밥 먹을 시간도, 잠잘 시간도 없을 줄 알라고. 모두 각오는 됐냐?”
으름장을 놓는 프레이의 말에도 자리에 모인 모두의 눈은 의욕으로 이글거릴 뿐이었다. 프레이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술 훈련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제국에서 처음 만들며 효과를 실감한 강화용 포션도, 각자의 장비도 모두 개선의 여지가 있었다.
스펙트럼은 이미 너무 과하게 마개조가 되어 아르스마저도 성능 개선에 난색을 표했지만, 남은 이들의 장비는 하루가 다를수록 수준이 높아졌다.
“자이안, 이거 봐봐! 이제 이런 것도 돼!”
유리아가 일시에 수십 번 단검을 휘두르자, 그 공격에 맞춰 뻗어나간 충격파가 도중에 뱀처럼 궤도를 틀어 바로 앞의 표적은 놔두고 그 뒤의 표적만 정확하게 때렸다.
충격파의 채찍이라고 표현해야 할 그 공격에, 표적이 난자당해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졌다.
“이런 걸 프레이 아저씨가 장비빨? 이라고 하던데.”
유리아의 단검이 강력한 아티팩트인 것은 사실이지만, 수십 겹의 충격파를 마치 뱀처럼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건 온전히 유리아의 역량이었다.
솔직히 자이안은 유리아의 단검으로 똑같은 공격을 한다고 해도 저만큼 많은 충격파를 정교하게 제어할 자신이 없었다.
소아레스 역시 유리아에 뒤지지 않는 새로운 아티팩트로 무장했다. 발소리와 기척을 완전히 죽여, 유령처럼 적의 등을 파고들어 급습할 수 있게 해주는 신발과 케이프였다.
유리아의 은밀 능력도 대단하긴 하지만 스승인 소아레스의 능력은 그보다 적어도 몇 단계는 더 위. 이로써 두 사람이 보다 특화된 능력으로 곧 있을 최종 전투에 기여할 수 있게 됐다.
-와, 정말이네. 천룡이 됐는데도 주변의 감각이 훨씬 더 선명하게 느껴져.
케이를 위한 아티팩트는 아르스 뿐만 아니라 자이안과 프레이 등 아티팩트에 대한 지식을 가진 모두가 합심해서 만들었다.
생명체로서의 존재가 흐려지고 힘을 남용할수록 의사가 없는, 별의 화신으로 변해버리는 천룡의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었다.
모습이 자유자재로 변하는 케이의 특성상, 물건 형태가 아니라 몸에 새기는 문신 형태의 아티팩트가 되었다.
-이제 너를 지금보다 훨씬 많이 도와줄 수 있겠다!
“하하. 항상 고마워, 케이.”
모두의 전력이 착실히 증강되는 가운데, 자이안도 제자리에 머무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펜던트는 까다로운 아티팩트이지만, 자이안은 그 까다로운 녀석을 주인으로서 2년 넘게 다뤄 왔다.
“다른 아티팩트를 먹이고 그 능력의 일부를 흡수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요?”
“뭐? 어…… 상상도 못 해 본 방법인데. 잠깐 생각 좀 하고.”
아르스에게 자문을 구하자, 그녀는 반나절 꼬박 자이안의 의견을 검토한 끝에 될 것 같다는 답을 내놨다.
사실 펜던트가 스펙트럼과 일체화된 지금 상태를 생각하면 불가능할 것도 없는 일이기는 했다. 펜던트 자체가 워낙 복잡한데다 나이아, 자이안의 손을 거치며 온갖 개조가 되어 있어서 엄두가 안 났을 뿐이지.
그 외에도 할 일은 아주 많았다.
유예 시간, 1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그 시간은 빛살처럼 거침없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