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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화 최후의 적(4) (187/210)


187화 최후의 적(4)
2023.04.08.


“스승……!”

절박하게 소리치던 자이안이 돌연 표정을 굳히며 교만에게 똑바로 시선을 향했다. 신스는 가슴을 꿰뚫린 상태로도 흔들림 없이 자이안을 바라보며 입가로 선명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신스는 교만의 팔을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동시에 자이안이 신스의 어깨를 짚고 그녀의 몸을 뛰어넘으며 스펙트럼을 치켜들었다. 넘실거리는 빛의 파도가 빨려 들어가듯 스펙트럼에 모이고 칼날이 찬란한 빛을 발했다.

“부질없는 짓을.”

신스에게 붙잡힌 팔을 움직여보려던 교만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반대쪽 팔을 들어 올렸다. 신스의 난입은 예상치 못했지만 그래봤자 팔 하나가 묶였을 뿐. 자이안을 죽이는 데는 아무 방해도 되지 않는다.

그 순간 까마득한 하늘에서 한 줄기 낙뢰가 정확히 교만에게 내리꽂혔다. 천룡의 권능이 빚어낸 번개는 다른 이에게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고 오로지 교만의 몸을 마비시켰다.

그가 움찔 몸을 멈춘 찰나의 순간. 크룩스가 틈을 놓치지 않고 뛰어나와 교만의 남은 팔을 붙잡았다.

동시에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교만의 후방을 급습했다. 신스와 크룩스의 구속을 풀어내기 위해 꿈틀거리던 망토 자락이 둘이 휘두른 단검에 잘게 잘려나갔다.

그 위에 아르스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들어낸 역작이 떨어졌다. 장침을 연상케 하는 단순한 형태의 아티팩트가 교만의 피부에 닿자 그의 방어력이 걷잡을 수 없이 약해졌다.

모두가 필사적으로 만들어낸 절호의 기회였다. 거기에 유민이 발한 극대 축복이 자이안에게 폭발적인 힘을 불어넣었다. 자이안은 무방비하게 드러난 교만의 목을 향해 망설임 없이 스펙트럼을 휘둘렀다.

“내가 말했지! 훨씬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거라고!”

빛의 칼날이 교만의 목을 베었다.

찰나, 섬뜩하기까지 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눈을 부릅뜬 채 자이안을 바라보던 교만의 목이 천천히 미끄러지다가 툭 떨어졌다.

“모두 그놈한테서 멀리 떨어져!”

그 순간 아르스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목의 절단면에서 평범한 붉은 피도, 그렇다고 마물 특유의 회색 피도 아닌, 시커멓고 끈적거리는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자이안은 가슴 한복판이 꿰뚫린 신스의 몸을 끌어안고 급히 뒤로 뛰어 거리를 벌렸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도, 아르스의 말을 듣기보다도 먼저 본능이 몸을 움직인 것이다. 크룩스 역시 양팔에 각각 유리아와 소아레스를 안고 제때 그 자리를 벗어났다.

힘없이 쓰러진 교만의 몸에서 검은 피가 끊임없이 솟구쳤다. 바닥을 덮은 검은 피의 웅덩이가 빠르게 넓어지고, 근처에 굴러 떨어진 놈의 머리까지 금세 웅덩이에 잠겼다.

‘이 피…… 아니, 이 느낌은.’

자이안은 MP도, 마력이나 성력도 아닌 그저 불길하고 혐오스럽기만 한 그 피의 느낌에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1년 반 정도 전 제국 황궁에서 음욕과 싸웠을 때, 위기에 몰린 그녀가 흘린 검은 액체가 이 피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때 음욕이 분명 찬탈자라는 말을 꺼냈어. 이 검은 액체는 찬탈자의 힘이 물질화된 건가?’

그렇다면 저 액체에 닿는 것만으로도 위험했다. 찬탈자가 선주 인류를 먹어치우고 자기 수족으로 만든 것처럼 자이안 일행도 잡아먹힐지도 모른다.

자이안이 이 사실을 모두에게 전하자 다른 이들도 검은 웅덩이로부터 더 멀찍이 멀어졌다.

‘어쨌든 교만은 죽였으니…….’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하며 자이안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저택 주변은 끊임없이 솟아나는 마물, 이를 막아서는 케이와 엘프 항공대의 충돌로 뭐 하나 성한 것 없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저택 건물은 또 멀쩡하게 서 있는 것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

다행히 저택 부지는 환경 조성용으로 꾸민 숲을 포함해 아주 넓고, 검은 땅은 지금도 조금씩 넓어지고는 있으나 아직 저택 부지를 완전히 침식하지 못한 상태였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마물 역시 케이와 엘프들의 활약으로 계속해서 수가 줄어들고 있고.

‘……잠깐.’

거기까지 생각한 자이안이 지독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교만은 죽었는데. 왜 마물이 계속해서…….’

그 순간 뇌리를 스친 끔찍한 가정에 자이안은 숨을 삼키며 검은 웅덩이 쪽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에 응답이라도 하듯, 계속해서 퍼져나가던 검은 피 웅덩이가 돌연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이거…… 뭔가 이상한데.”

시야에 펼쳐진 홀로그램 계기판을 확인하던 아르스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계기판에 표시된 수많은 그래프 중 주변에 존재하는 마물의 수와 강함 등을 표시하는 그래프가 제멋대로 출렁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수치까지 솟구쳤다가, 다시 말도 안 되는 수치까지 하락했다가,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든 그래프가 동시에 0을 가리켰다.

“너희는 진실로 경이로운 존재다. 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줄이야.”

피 웅덩이에서 교만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나…… 그래서 더욱 안타깝구나.”

피 웅덩이 중심으로부터 무언가가 불쑥 솟구쳤다. 사방으로 퍼지던 검은 피가 불쑥 솟아난 무언가를 향해 빠르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피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처음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난 교만이 측은한 눈으로 일행을 돌아보았다.

“나는 세계의 주인이며, 세계 그 자체. 너희는 ‘나’를 죽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나를 죽일 수는 없다.”

“이 세계의 주인은 너 같은 게 아냐.”

자이안은 굳은 표정으로 스펙트럼을 들었다. 모두의 힘으로 간신히 만들어낸 절호의 일격도 효과가 없었고, 두 번 연달아 성검의 힘을 발휘하느라 혹사를 당한 스펙트럼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치명상을 입은 신스는 사실상 전투 불능에, 프레이는 여전히 소환할 수 없는 상태.

그러나 아직 싸울 수 있었다. 주변에 흘러넘치는 MP를 끊임없이 흡수한 몸은 여전히 힘이 넘쳤다. 상황이 크게 불리해졌지만, 달리 생각하면 고작 그뿐이다. 싸움을 포기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 눈. 흔들리지도 꺾이지도 않는, 고결한 눈.”

교만이 자이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아련하게 말했다.

“너 같은 이가 나와…… 우리와 함께했더라면, 분명 많은 것이 달라졌을 터인데.”

“이제 와서 협상이라도 할 셈인가?”

“돌이키지 못할 과거에 대한 작은 미련일 뿐이다.”

“아직 싸움 안 끝났어.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는 모양이군.”

“그도 그렇군. 사과하도록 하지. 조금 전에 대한 행동은 분명 대적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뜻밖에도 솔직한 대답에 자이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쩐지 조금 전과 성격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죽었다 살아나서 그러나.’

그러나 성격이 얼마나 유순해지건, 그가 쓰러뜨려야 할 적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무엇보다도 아까 전 검은 피를 보며 느낀 혐오스럽고 불길한 기운이 지금도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교만은 마족으로서의 본연의 힘은 물론이고 찬탈자의 힘까지 수중에 두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일행도 자이안과 마찬가지로 각자 무기를, 혹은 주먹을 들고 교만을 노려보았다. 교만의 입가에 진실로 기꺼워하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모습이 사라졌다.

‘조금 전보다 훨씬 빨라!’

사라진 것과 동시에 자이안의 눈앞에 나타난 교만이 주먹을 휘둘렀다.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땅이 뒤늦게 통째로 뒤엎어지며 폭발했다.

자이안이 가까스로 스펙트럼을 들어 공격을 막은 순간 조금의 유예도 없이 반대쪽 주먹이 머리를 노리고 짓쳐 들었다.

크룩스가 끼어들어 교만의 팔을 붙잡으려 했으나 마치 유령처럼 그대로 놈의 팔을 뚫고 지나갔다.

공격을 빗겨내기 위해 대각선으로 세운 스펙트럼 역시 마찬가지였다. 교만의 주먹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그대로 자이안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쯧.”

교만이 미미하게 인상을 쓰며 혀를 찼다. 그의 주먹은 말 그대로 자이안의 머리를 뚫고 들어가기만 했을 뿐, 실제로 자이안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기회라고 여긴 자이안이 휘두른 스펙트럼도 마찬가지였다. 칼날이 교만의 목을 가르며 지나갔으나 마치 신기루를 벤 것처럼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위상이 박리되기 시작했구나. 미처 흡수하지 못한 그놈의 찌꺼기가 발목을 잡은 건가.”

“그놈이라니……?”

“너희가 찬탈자라고 부르는 반쪽짜리 초월자 말이다.”

갑자기 모든 전의를 잃은 듯, 교만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저벅저벅 걸어 뒤로 물러섰다. 그 무방비한 모습에 공격을 가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으나, 자이아은 침착하게 충동을 가라앉혔다.

아마 방금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자신뿐만 아니라 교만도 마찬가지일 터. 그 때문에 교만도 전의를 잃은 것이다.

“이 이상 위상 박리가 심해졌다간 차원의 구조에도 악영향을 미칠지 모르니, 어쩔 수 없구나.”

교만이 두 손으로 허공을 잡아 좌우로 쭉 찢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무저갱의 균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몸을 돌린 교만이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친애가 깃든 미소를 그렸다.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리겠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때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너희가 대적자로 존재하기를 바라마.”

교만이 가볍게 뛰어 균열에 몸을 던졌다. 무저갱의 그의 몸을 끌어안고, 이내 그 모습은 균열 너머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그와 동시에 저택 부지의 침식된 땅에도 이변이 일어났다. 검은 땅이 침식을 멈추고, 더 이상 마물이 솟아나지 않았다. 남은 마물들은 행동을 멈추고 혼란스러운 것처럼 멍청히 주변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지배하던 마족이 사라졌을 때 흔히 보이는 습성이었다. 교만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 그렇지. 스승님!”

그제야 미뤄두었던 여러 가지 문제에 생각이 미친 자이안이 급히 몸을 돌렸다. 신스는 근처의 나무에 조용히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미동도 없는 모습에 기겁하며 달려가니, 다행히 아직 미약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다, 다행…… 아니, 다행이 아니라.”

숨만 붙어있을 뿐, 심장을 포함해 가슴 한복판이 꿰뚫린 상태로 아직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유민을 급히 손짓해 부르고, 자이안은 자신 역시 백마법으로 응급처치를 하기 위해 신스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다 뻥 뚫린 가슴 안쪽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스승님, 이게…… 대체 뭡니까?”

그러고 보면, 아까 전부터 그녀는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교만과의 싸움에 집중하느라 이제야 위화감을 깨달았다.

“……부끄러우니까 너무 그렇게 빤히 보지는 말거라.”

신스가 수줍어하는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고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체내는 피와 근육, 장기가 아니라 금속 골격과 기계 장치, MP가 순환하는 아티팩트로 대체되어 있었다.

* * *

“치명상이기는 하지만, 제때 수리만 받으면 죽을 정도는 아니 걱정 말거라. 물론 내가 이전의 몸이었다면 오래 버티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그리 말하며 자이안을 안심시키는 신스를, 그는 안도와 의문과 불평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거였으면 미리 말씀을 해주시지 그랬습니까. 스승님이 교만한테 공격당했을 때 정말로 돌아가시는 줄 알고 제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십니까?”

“죽을 뻔했던 건 맞는데?”

“제때 수리만 하면 문제없다면서요.”

“어흠. 흠.”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는 신스의 몸은 엘프 항공대가 보급기에서 꺼낸 금속 침대 위에 얌전히 눕혀져 있었다.

기계 팔이 복잡하게 움직이며 그녀의 부상을 치료, 아니 수리했다. 침대 측면에 부착된 디스플레이에는 신스의 상태가 세세하게 표시되고 있었다.

“원래부터 이런 몸이셨던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엘프와 하이엘프는 어디까지나 생명 공학의 산물이다. 이 몸은 네가 떠난 뒤에 개조한 거다.”

몸의 일부를 기계와 아티팩트로 대체하는 시술은 엘프의 과학 기술로도 위험부담이 컸다. 평범한 엘프라면 시술 과정에서 죽을 수도 있고 설령 성공하더라도 부하를 견디지 못할 터. 그러나 엘프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튼튼한 생명체인 하이엘프는 아니었다.

시술이 실패해도 죽을 정도는 아니고, 성공하면 개조된 몸의 출력을 완벽히 끌어낼 수 있다.

“대체 왜 그런 일을…….”

“왜 그랬을 것 같으냐?”

“……더 오래 살고 싶으셔서?”

실없는 농담에 신스도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자이안의 머리를 꽁 쳤다. 그러자 기계 팔 중 하나가 신스의 눈앞으로 다가오더니 얌전히 좀 있으라는 듯 팔을 좌우로 흔들었다. 신스는 어깨를 움츠리며 다시 똑바로 누웠다.

“널 돕기 위해서다.”

신스가 담담히 말했다.

그러고 보면, 하고 자이안은 뒤늦게 의문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교만과의 싸움에 집중하기 위해 의식 한구석에 밀어둔 것이었다. 신스는 대체 어떻게 이렇게 타이밍 좋게, 그것도 항공대라는 지원 병력까지 이끌고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일까.

“너희가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그 의문에 차근차근 답하기 위해, 신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과거를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나태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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