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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화 최후의 적(3) (186/210)


186화 최후의 적(3)
2023.04.07.


인사하듯 떨어진 첫 발을 시작으로, 다섯 대의 폭격기가 쏟아부은 수십 발의 폭격이 모조리 교만의 지근거리에 내리꽂혔다.

알레프 저택 같은 원시적인 석조 저택 따위는 삽시간에 폐허가 될 만한 강렬한 폭발이 교만의 주변에서 연달아 일어났다.

자이안은 그 여파로부터 저택을 지키기 위해 재차 결계를 펼쳐야만 했다. 유민 역시 그 위에 제 결계를 덮어씌워 힘을 보탰다.

“……테라플로리크의 아이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있었지.”

현대 과학으로도 불가능에 가까운 정밀 폭격이 수 분간 지속됐으나 정작 그 중심에 선 교만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거센 불길과 폭발은 그를 상처 입히기는커녕 망토 자락 하나 그을리지 못했다.

교만이 손가락을 세워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의 주변을 뒤덮은 불길이 마치 빨려 들어가듯 그 손끝으로 모였다.

그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명확했다. 이를 악문 자이안이 교만의 행동보다 한발 앞서 폭연을 뚫고 그에게 달려나갔다.

카앙! 교만이 두른 망토가 멋대로 움직이며 자이안의 공격을 막았다. 기습은 효과가 없었으나, 다행히도 놈은 시선을 하늘에서 거두고 다시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우릴 죽이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 저런 데에 신경 쓸 여유는 없을 텐데!”

“여유가 없다고? 알코스의 아이야, 재미있는 착각을 하고 있구나.”

교만이 불길이 뭉친 손가락 끝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 끝에서 뻗어 나간 불꽃의 뱀이 하늘을 가로질러 폭격기 한 대의 날개를 후려쳤다.

한쪽 날개를 잃은 엘프제 폭격기가 불안정하게 빙글빙글 돌며 땅으로 추락했다.

그와 동시에 교만의 망토 자락이 살아있는 뱀처럼 움직이며 스펙트럼의 칼날을 휘감았다.

무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잠시 힘 싸움을 벌이는 사이, 이번에는 남은 망토 자락이 주먹처럼 둥글게 뭉쳐졌다. 그리고 자이안이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무방비한 그의 안면을 후려쳤다.

“끄악!”

두 번, 세 번, 공격을 허용할 때마다 의식이 뒤흔들리며 시야가 깜빡깜빡 빠르게 명멸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자이안은 망토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눈으로 좇았다.

그리고 네 번째 공격이 이어지는 순간, 스펙트럼이 펜던트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그의 몸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훅 낮아졌다.

투웅!

바닥을 기듯 자세를 낮추며 내지른 주먹이 망토에 막혀 가벼운 소리를 냈다. 그러나 적의 방어를 꿰뚫고 내부로 침투한 MP의 위력은 가볍지 않았다.

쩌적, 하고 교만의 갑주 옆구리 부근이 작게 갈라지며 그 안에서 회색 피가 한 방울 튀었다. 백보신권이 처음으로 놈의 몸에 상처를 입힌 것이다.

“훌륭하구나. 이 내가 피를 흘리게 하다니.”

“이제부턴 훨씬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거다!”

자이안이 재차 백보신권을 내질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망토와 갑주에 완벽하게 막혔다. 교만의 체내까지 침투해야 할 MP가 중간에 억지로 무산된 것이다.

“아직 어리숙하구나. 내가 같은 수를 두 번이나 당해줄 거라고…….”

쐐애애액! 하늘에서 무언가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폭격기의 폭격에 비하면 훨씬 가벼운 소리였다.

말을 멈춘 교만이 슬쩍 고개를 든 순간, 하늘에서 떨어진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놈이 쓰고 있는 왕관 위에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나뭇가지가 부딪쳤을 뿐인데 폭격기의 폭격보다 훨씬 더 커다란 소리가 났다. 견디지 못한 교만의 무릎이 휙 꺾이며 그의 자세가 크게 낮아졌다.

그리고 그 위로, 상공 수 킬로미터 고고도에서 떨어져 내린 신스의 주먹이 다시 한번 내리꽂혔다.

“내 주먹은 고고도 폭격보다는 살짝 더 아플 게다!”

지면이 뒤흔들린다 싶더니 교만을 중심으로 커다란 크레이터가 움푹 파였다. 결국 한쪽 무릎을 꿇고 만 교만에게 자이안이 재차 백보신권을 내질렀다.

주먹은 살아 움직이는 망토에 막혔지만 MP가 놈의 체내까지 침투하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스승님! 여긴 대체 어쩐 일이십니까?!”

“내가 말했잖느냐! 언젠가 시간 내서 다시 만나러 가겠다고!”

“그건 그냥 예의상 하시는 말씀인 줄 알았죠!”

왜애애애애애앵! 무릎을 꿇은 교만에게 쉴 새 없이 연격을 퍼붓는 둘의 머리 위로 이번에는 경보음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공에서부터 수직 궤도로 내리꽂힌 엘프제 급강하 폭격기가 그들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폭격의 비를 흩뿌렸다.

“스승님! 저 강철 새들의 공격은 솔직히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나도 안다! 그래도 정신을 사납게 만들 수는 있지 않겠느냐!”

“……날파리들이 점점 늘어나는구나.”

안면을 노리고 내지른 주먹이 턱, 하고 교만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신스의 나뭇가지도 마찬가지였다. 억지로 힘을 줘 밀거나 당겨보려 해도 놈의 손은 미동조차 없었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구나. 우선 귀찮게 날아드는 날파리들을 좀 정리해야겠어.”

천천히 일어선 교만이 나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의 망토가 멋대로 펄럭거리더니 이내 수천 갈래로 갈라졌다.

갈라진 망토 자락이 지면에 푹 박히고, 그를 중심으로 땅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게 물든 땅에서 불쑥, 마물이 솟아났다.

“마물을 만들어냈어?! 폭식의 능력을 가진 건가!”

크룩스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폭식의 능력은 자기가 먹어치운 마물을 그대로 토해내 다시 만드는 것이지, 지금처럼 땅을 침식시키고 아무 대가 없이 마물을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었다. 폭식이 아니라 찬탈자에 더 가까운 능력이었다.

“침식 속도가 너무 빨라! 조만간 저택 전체가 마물이 태어나는 땅으로 뒤바뀌고 말 거야!”

적의 능력을 분석한 아르스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그 순간 크룩스와 유리아, 소아레스가 동시에 교만에게 쏘아져 나갔다.

정면으로 쇄도한 크룩스의 정권이 무방비한 놈의 안면에 꽂히고, 뒤로 돌아간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땅에 박힌 망토 자락을 잘라냈다.

잘려나간 망토 자락이 생기를 잃은 잎사귀처럼 축 늘어지고, 땅이 검게 침식되는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다.

“저택을 지켜야 합니다! 안에 아직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어요!”

“항공 부대는 지금부터 저택을 지키고 마물을 섬멸하는 데 주력하도록! 마족은 나와 자이안이 함께 맡겠다!”

자이안이 다급하게 소리치자 신스가 귀에 꽂은 통신기에 대고 곧장 명령을 내렸다.

순수한 전자 공학의 산물인 통신기는 교만의 강력한 MP 지배에도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고 그 명령을 폭격기 조종사들에게 전달했다.

침식 지대가 퍼지는 속도는 느렸지만 마물이 태어나는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삽시간에 검게 물든 땅 전역이 마물의 그림자로 뒤덮였다. 게다가 하나하나가 나라 하나쯤은 하룻밤 사이 거뜬히 멸망시킬 수 있는 강력한 마물이었다.

“자이안! 신스 님! 크룩스! 소아레스! 넷이 교만을 맡아! 나를 포함해서 나머지는 마물을 섬멸!”

아르스가 재빠르게 전황을 파악하고 역할을 배분했다.

아홉 명이 동시에 상대해도 버거웠던 교만을 고작 네 명이 맡게 되었으니 부담이 엄청나겠지만, 그렇다고 강력한 마물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사람들을 죽이는 걸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선은 아니더라도 최악은 면하는 판단이라 할 수 있었다.

-아냐! 마물들은 나 혼자 맡을게!

케이가 아르스의 말을 부정하며 높이 떠올랐다. 한 쌍의 뿔에 힘이 모이며 밝은 빛을 발하고, 이내 그 빛이 케이의 전신을 뒤덮었다.

안 그래도 수십 미터에 달한 그 거대한 몸이 빛에 휩싸인 채 더 거대해지고, 뱀처럼 길쭉해졌다. 생물체로서의 규격을 탈피하는 용의 진정한 모습, ‘천룡’이었다.

-걱정 마, 자이안. 무리하지는 않을게.

우려의 눈길을 향하는 자이안에게 케이가 한결 잔잔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자이안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교만을 노려보았다.

‘지금은, 교만을 쓰러뜨리는 것만을 생각할 때야.’

칼자루를 세게 쥔 자이안이 결의를 다지며 교만에게로 내달렸다. 크룩스가 교만과 주먹을 맞대 힘 싸움을 벌이고, 사각으로 접근한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재빠르게 단검을 휘두르며 치고 빠졌다.

아르스가 만들어낸 아티팩트가 놈의 약점을 분석하며 행동을 방해하고, 유민이 쉴 새 없이 축언을 읊으며 모두의 뒤를 받쳐주었다.

그 주변으로, 침식된 땅에서 솟아난 마물들이 살의에 찬 괴성을 질렀다. 마물의 위로 폭격이 빗발치고, 용의 권능이 빚어낸 번개와 폭풍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새벽이 찾아오기엔 오랜 시간이 남은 깊은 밤.

그 싸움 역시 아직 끝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 * *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자이안은 시야 한구석에 희미한 빛이 짓쳐 드는 것을 느꼈다.

카앙! 본능적으로 세워 든 스펙트럼의 칼날 위를 강렬한 충격이 덮쳤다.

그대로 주르륵 밀려나며, 간신히 하늘을 볼 여유가 생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둡기만 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동쪽 하늘에 서광이 비치고 있었다.

극한의 집중력을 요하는 위태로운 싸움이 수 시간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어찌어찌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프레이를 대신하듯 때맞춰 신스가 참전한 덕분이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속절없이 밀리고 말았으리라.

“왜 그러지? 혹시 지쳤느냐?”

다른 이들의 공격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교만의 시선은 오로지 자이안에게만 향해 있었다. 자이안은 이를 악물며 스펙트럼을 높이 들어 올렸다.

“죄송합니다. 다들, 잠시 시간을 벌어 주세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교만을 향한 모두의 공격이 한층 더 거세진 것이 느껴졌다. 자이안은 스펙트럼을 두 손으로 쥐고 의식을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칼날이 점점 거대해지고, 오로라의 띠가 줄기줄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성검을 쓸 수밖에 없어.’

팽팽한 균형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변수를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면 성검이라든지. 그러나 성검을 준비하는 동안 자이안은 짧은 순간이나마 무방비 상태가 된다.

다른 동료들에게 부담을 지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수단이 없었다.

“아윽?!”

무리해서 적의 사각으로 접근한 유리아가 교만의 망토 자락에 붙잡혔다.

목을 조르는 망토 자락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녀를 소아레스가 구했으나, 반대로 이번에는 소아레스가 붙잡히고 말았다.

자이안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지금 충동적으로 움직이면 기껏 그들이 무리해서 벌어준 시간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어딜 감히 우리 유리아하고 소아레스한테!”

적정 거리를 유지하던 아르스가 둘을 구하기 위해 교만에게 접근했다. 그런 아르스에게 향해진 공격을 크룩스가 몸을 던져 막았다.

그리고 스펙트럼이 눈부신 백광을 뿜어냈다.

“하아아아!”

자이안이 스펙트럼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쏟아져 나간 빛의 파도가 그대로 무방비한 교만을 덮쳤다.

“큭……!”

손에 쥔 스펙트럼에서 강한 반탄력이 느껴졌다. 빛에 휩싸여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교만이 성검의 힘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이안은 온 힘을 쥐어짜며 그 저항에 지지 않도록 버텼다.

“……놀라운 힘이로구나.”

빛의 파도를 뚫고 검게 탄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

자이안은 숨을 삼키며 눈을 부릅떴다. 교만은 성검의 힘에 저항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면으로 뚫고 나오고 있었다.

힘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성검의 빛이 더욱 강해졌지만, 교만이 다가오는 속도는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마침내 자이안의 코앞까지 다가온 교만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가장 귀찮은 걸림돌이 나이아 알코스의 아이, 바로 너였구나.”

교만이 무방비한 자이안의 가슴팍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 순간 작은 그림자가 옆에서부터 튀어나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쿨럭……! 주, 주먹이 제법 맵구먼.”

신스의 가슴을 꿰뚫은 주먹이 자이안의 코앞에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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