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최후의 적(2)
(185/210)
185화 최후의 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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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화 최후의 적(2)
2023.04.06.
늦은 밤, 알레프 백작은 밖에서 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눈을 떴다.
쿵! 쿠웅!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나려는 듯 저택 전체가 불규칙적으로 약하게 흔들렸다. 멍한 머리를 붙잡고 잠에 취한 의식을 가다듬은 뒤, 백작은 겉옷을 걸치며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또 자이안이나 형님들이 요란하게 훈련이라도 하고 있나? 아니, 이런 늦은 밤중에 경우도 없이?’
그러나 창밖에 보이는 모습은 그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자이안과 그의 일행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밖으로 나와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하늘에는 용으로 변한 케이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보이지도 않고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저택을 흔드는 소음은 그 싸움의 여파로 일어난 것이었다.
‘……피난을 준비해야겠군.’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최종적으로 백작이 내린 판단은 그것이었다. 저택에는 상주 기사단과 하인을 포함해 백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지내고 있다.
그들이 저 싸움에 휘말려 애꿎은 피해를 입기 전에 빠르게 행동해야 했다.
자신도 참전해서 함께 싸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역시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이안 일행 전원이 총 전력으로 나서서 간신히 백중세를 유지하는 싸움이라면 그가 끼어든다 해도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하리라.
백작은 스스로가 인간을 일탈한 강력한 초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자이안과 그 일행들의 힘은 그런 자신조차 몇 수는 접어줘야 할 정도로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사람들을 깨우고, 사태를 설명하고, 안전한 장소까지 대피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텐데.’
머릿속으로 저택에 남은 이들의 수와 그에 따른 대피소요 시간 등을 계산하며, 백작은 급히 옷을 챙겨입고 방을 나섰다. 부디 그때까지는 지금처럼 피해가 크게 퍼지지 않기를 기도하며.
* * *
“으악!”
새된 비명과 함께 유리아의 몸이 뒤로 휙 날아갔다. 벌써 5번째 똑같은 광경이었다.
일행 중 누구도 그 모습을 신경 쓰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 따위는 없었다. 적은 불합리하게 강했고, 그들은 아직까지 적에게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히지도 못했다.
‘아무래도 이상해!’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안전하게 착지하며 유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이번을 포함해 5번 전부 마안으로 간파한 약점을 정확히 꿰뚫었다.
그러나 교만은 죽기는커녕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약점을 찌르기 위해 접근한 유리아를 벌레라도 쫓듯 떨쳐냈을 뿐.
‘내 마안이 이상해졌나? 아니면 상대가 이상한 걸까?’
그동안 마안에 크게 의지하는 전술을 고수해 온 유리아로서는 어느 쪽이든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전력의 절반 이상이 봉인됐다고 봐야 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멍하니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주저로 굳어버린 몸을 억지로 다시 움직여 유리아는 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제기랄. MP의 흐름이 너무 뻑뻑해.’
프레이 역시 유리아와는 다른 방향으로 불온한 낌새를 느끼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흑마법은 체내 MP 제어를 통해 외부의 자연 MP의 흐름을 함께 유도하여 더 강력한 위력의 마법을 일으킨다.
그런데 지금은 자연 MP의 흐름이 녹슬어 제대로 맞물리지도 않은 톱니바퀴를 억지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교만의 영향력인가.’
놈을 중심으로 주변의 MP가 놈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MP 지배력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나이아에게도 져본 적이 없는 프레이마저 버거움을 느낄 만큼 강력한 지배력이었다.
‘젠장. 답답해 죽겠네.’
더 많은 MP를 끌어올려 억지로 마법을 펼치며, 프레이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터뜨렸다. 이럴 때가 되면 항상 ‘아바타’라는 자신의 상태가 불만으로 다가왔다.
펜던트의 소환 메커니즘이 아무리 완벽에 가깝다 한들, 임시로 만들어진 육체인 ‘아바타’와 진짜 자기 몸 사이에는 크나큰 괴리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일상생활을 할 때에는 괜찮지만, 지금처럼 극도의 집중 속에서 가진 바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낼 때면 특히 그 사실이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멀쩡히 있는 두 손을 쓰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느낌이라 2배로 기분이 나빴다.
‘통신 마법도 먹통이고.’
지배력 싸움에서 밀리는 상황이니, 통신 마법을 써도 원하는 상대에게 제대로 목소리가 전해지리라는 보장이 없다.
상황을 알리려면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교만은 그런 잠깐의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한편, 지상에서 교만을 직접 상대하는 자이안과 크룩스도 쉽지 않은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놈은 빠르기도 빠를뿐더러 유령처럼 기척이 옅어서 조금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위치를 놓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공격이 약한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갑주는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 스펙트럼을 휘둘러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고, 일행 중 가장 견고한 방어력을 가진 크룩스가 놈의 공격을 한 차례 막을 때마다 버티지 못하고 주르륵 밀려났다.
절묘한 타이밍에 끼어들어 놈을 교란하는 유리아와 소아레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벌써 수십 번은 위기를 맞이했으리라.
‘그러고 보니 나태가 그랬던가. 칠종주 중에서 가장 강한 게 교만이라고.’
그 말의 진정한 의미가 이제 와서 깨닫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식이면 끝이 없겠어.’
몇 날 며칠 쉬지 않고 싸우는 거야 익숙하지만, 마물 무리를 상대하는 것과 강력한 적 하나를 상대하는 건 또 상황이 달랐다.
누군가의 사소한 실수든, 혹은 예상치 못한 변수든 간에 어떤 식으로든 균형이 깨지는 순간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말 것이다.
“실로 놀랍구나. 아무래도 생각을 바꿔야겠어.”
싸움을 시작한 뒤로 줄곧 말이 없던 교만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치열한 싸움 한복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평이하고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빈틈이라고 여긴 자이안이 가차 없이 교만의 목을 향해 검을 내질렀으나, 그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자이안의 공격을 막아냈다.
“너희는 나의 대계에 함께하기엔 위험한 존재다. 그 힘도, 그 정신도. 그러니…….”
지금껏 한 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던 교만이 가볍게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놈 주변의 MP가 폭발적으로 들끓어 올랐다.
힘의 마안으로 위험의 전조를 알아차린 프레이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이런 X발! 전원 대피! 최대한 거리를……!”
“지금부터는 전력으로 너희를 죽이도록 하지.”
태양이 지상에 나타났다.
프레이가 온 힘을 다해 결계를 펼친 직후, 무시무시한 압력이 그의 온몸을 거칠게 찍어눌렀다. 전신의 뼈가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듯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 위로 유민의 축복이 걸리고 프레이의 결계 뒤쪽에 성호의 십자가가 3중으로 펼쳐졌지만 부담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뚫리면 X된다! 우린 둘째 치고 저택이 송두리째 증발해버릴 거야!’
지나친 부하가 걸린 육체가 말단부터 서서히 부서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바타’가 규격을 넘은 힘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애쓴 보람이 있는지, 결계를 짓누르던 압력이 조금씩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재가 되어 사라져가는 손끝을 바라보며 프레이는 쓰게 웃었다.
‘사람 구하자고 이렇게 애쓴 게 대체 얼마 만인지…….’
“그래. 네가 가장 귀찮은 걸림돌이구나.”
지근거리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강렬한 충격이 프레이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프레이의 몸이 포탄처럼 허공을 가로질러 그대로 저택에 내리꽂혔다. 저택 일부가 무너지며 짙은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교만은 주먹을 쥔 손을 내리며 무심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무너진 잔해와 짙은 흙먼지에 방해받지 않고 원하는 것만을 정확히 보고 있었다.
“커헉. 이런 염병할.”
저택과 지면을 깨부수고 지하 깊숙이 파묻힌 프레이가 마른기침을 뱉으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교만의 주먹에 얻어맞은 가슴이 압착기로 짓눌린 것처럼 으깨져 있었다.
유민의 축복이 제때 들어와서 이 정도지, 그게 없었더라면 아마 주먹에 맞은 순간 상반신이 터져 나갔을 것이다.
“……큰일 났네.”
오감이 급격하게 흐려졌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것이다.
어디까지나 아바타의 죽음일 뿐 진정한 죽음은 아니지만, 안 그래도 위태로운 상황인데 자신마저 이탈하면 어떻게 될지 차마 상상도 되지 않았다.
어설픈 백마법이라도 써서 어떻게든 육체를 고쳐보려 했으나 당연히 택도 없었다.
위로 올라가려 낑낑대는 몸에서 힘이 탁 빠져나가고, 기절하듯 눈을 감은 프레이의 몸이 그대로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 삼촌?”
펜던트의 주인인 자이안에게도 소환된 아바타의 죽음이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나름대로 결계를 펼쳐 다른 일행들을 교만의 공격의 후폭풍으로부터 보호한 자이안이 퍼뜩 고개를 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가 느낀 상실감은 착각 따위가 아니었다.
「이런…… 씹. 머리가 쪼개질 것 같네.」
펜던트 너머, 지구의 자기 방에서 잠든 것처럼 쓰러져 있던 프레이가 머리를 감싸 쥐며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 박자 늦게 조금 전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힘없이 탄식을 뱉었다.
「제기랄. 이거 망했구만.」
머릿속으로 펼쳐지는 그 광경에 자이안은 크게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최악을 면했을 뿐, 전황이 걷잡을 수 없이 기울었다는 사실은 그대로였다.
한 번 죽은 아바타는 재구축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프레이라는 강력한 전력이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이 사라졌구나. 나머지는…… 흐음. 그리 어렵지는 않을 터.”
공중에 뜬 교만이 천천히 지면에 내려섰다. 빈틈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그 누구도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다.
전력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이상, 맞서 싸울 게 아니라 안전하게 도망치는 걸 목표로 삼아야 할 판이었다.
‘……아냐. 그래선 안 돼.’
저도 모르게 떠오른 약한 생각에 자이안은 입술을 깨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교만을 놔두고 도망치면, 당장은 목숨을 건질 수 있겠지만 앞으로 놈이 벌이게 될 살육과 파괴를 방조하는 꼴이 되고 만다. 아까 꾼 악몽이 현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방법이 있을 거야. 아니, 없더라도 해야만 해. 교만을 막을 수 있는 건 우리뿐이야.’
망설임을 쳐내고, 자이안은 굳은 표정으로 스펙트럼을 교만에게 겨눴다. 눈이 마주치자 놈의 눈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마치 포기하지 않는 그 의지를 기꺼워하는 것처럼.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야만 내 대계를 가로막는 걸림돌로서의 가치가…….”
갑자기 교만이 입을 다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이안 역시 까마득한 상공에서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 그리고 무거운 무언가가 우수수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진 무언가가 교만의 바로 지근거리에 떨어졌다.
그리고 폭염을 일으키며 거세게 폭발했다.
그제야 다른 일행들의 시선이 하늘로 모였다. 구름을 가르고 짙은 어둠을 찢으며,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폭탄이라는 이름의 불의 비를 뿌리는, 첨단 엘프 공학으로 완성된 강철의 새.
“……저, 전폭기?”
아르스가 입을 벌리고 멍청히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