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최후의 적(1)
(184/210)
184화 최후의 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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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화 최후의 적(1)
2023.04.05.
“……!”
자이안은 온몸을 떨며 번쩍 눈을 떴다.
“흡……! 허억, 허읍……!”
급하게 공기를 집어삼킨 폐가 찢어질 듯 아팠다. 자이안은 가슴을 붙들며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알레프 저택의 자기 방이었다. 사방이 불타고 있지도 않았고, 높이 쌓인 시체의 탑도, 발밑을 적시는 피의 강도 없었다.
“끔찍한 꿈…….”
자이안은 이마를 감싸 쥐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전에도 막연한 불안이 형상화된 악몽을 꾼 적은 몇 번 있었다. 그러나 오늘 꾼 꿈은 궤를 달리할 만큼 끔찍한 내용이었다.
차원의 벽을 찢고 직접 나타난 찬탈자가 수천, 수억에 달하는 군세를 이끌고 대륙 전체를 침공했다.
맞서 싸우려 했으나 역부족이었고, 동료들과 각성자들마저 하나둘 쓰러지며 속절없이 밀렸다.
마지막에는 자이안 홀로 살아남아 인간의 시체를 가지고 피의 축제를 벌이는 마물들 한가운데에서 그저 그 광기의 소행을 지켜볼 뿐인, 그런 꿈.
게다가 어찌나 실감이 넘치는지 자이안은 자신이 정말 잠에서 깨어난 건지, 아니면 아직 꿈속에 있는 건지, 그도 아니라면 그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던 건지 제대로 분간되지도 않을 정도였다.
아직도 코끝에 불타고 부패한 시체와 피의 냄새가 뒤섞인 역겨운 냄새가 감도는 것 같았다. 지금도 느껴지는,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짙은 MP의 냄새 때문에 더욱 그랬다.
‘……잠깐.’
MP의 냄새?
“……!”
자이안은 튕기듯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옷을 갈아입을 여유도 없이 망토만을 두르고, 펜던트가 목에 걸려 있지 않아 잠시 헤매다가 프레이한테 맡겨놨다는 사실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복도를 달리고 계단을 내려가는 시간조차 아까워, 자이안은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삼촌!”
잔디가 깔린 바닥에 착지하며 자이안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신이 감지한 위험을 프레이가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의 부름에 답하듯, 프레이가 자기 방 벽을 박살 내며 하늘로 솟구쳤다.
“자이안! 잘 챙겨라!”
하늘로 날아오르며 프레이가 무언가를 휙 던졌다. 급히 손을 내밀어 받아보니 프레이에게 맡긴 펜던트였다.
자이안이 의식을 집중해 펜던트를 장검으로 변형시키는 사이 저택 상공에 멈춘 프레이가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동시에 유민 역시 자기 방 창문을 열고 자이안의 근처에 뛰어내렸다. 프레이가 펼친 거대한 결계가 저택 위를 뒤덮고, 그 위에 유민이 펼친 방호의 십자가가 겹쳐졌다. 그리고 그 직후.
쿠우우웅!
최강의 마법사 두 명이 2중으로 펼친 방벽 위로 무시무시한 충격이 낙뢰처럼 내리꽂혔다. 반동을 그대로 받아낸 프레이의 몸이 금방이라도 추락할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다행히 유민이 한 손으로 십자가를 유지하며 남은 한 손으로 제때 그에게 축복을 걸었다. 한결 부담이 적어진 프레이가 고개를 들고 하늘 저편을 노려보았다.
“초면부터 인사가 과격하구만!”
“인사? 아직 시작도 안 했다만.”
다시, 충격이 2중 방벽을 덮쳤다.
자이안이 한발 늦게 둘에게 힘을 보태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저택을 뒤흔든 엄청난 충격에 그대로 몸이 붕 떠올랐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다시 지면에 선 자이안의 눈에 산산이 부서져 빛을 흩뿌리며 사라지는 2중 방벽의 모습이 보였다.
“허나, 훌륭하구나. 조악한 필멸자의 몸으로 이 몸의 ‘인사’를 막아낼 줄이야.”
귓가를 끈적하게 핥는 것처럼 불쾌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자이안은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오래전 교만을 상대할 때 당할 뻔했던, 아주 강력한 정신지배가 깃든 목소리였다.
“경의를 담아, 친히 이 손으로 죽여주도록 할까.”
프레이가 사방을 경계하며 천천히 지면에 착지했다. 유민이 재차 축복을 걸었다. 그 사이 소란을 느낀 다른 일행들이 저택에서 뛰쳐나왔다. 급히 나온 자이안과 프레이, 유민과는 달리 착실히 무장을 갖춘 모습이었다.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하는 주제에 말만은 거창하구만. 그대로 계속 숨어있을 셈이라면 말리지는 않으마. 우리가 무서울 수도 있지, 뭐.”
“숨어? 내가?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나는 너희들 앞에 있다. 너희의 불완전하고 유약한 지각이 내 모습을 거부할 뿐.”
목소리가 방향을 종잡을 수 없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프레이는 쯧, 하고 한 차례 혀를 차고는 어떤 기습에든 대응할 수 있도록 날카롭게 MP를 가다듬었다.
아르스가 은신이나 투명화 따위를 감지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만들기 시작했고, 유민이 모두에게 축복을 걸며 동시에 주변 마물의 힘을 약화시키는 성역을 펼쳤다.
용으로 변한 케이가 날아올라 제공권을 확보했고, 자이안과 유리아, 소아레스 역시 각자 후각과 시각, 청각을 집중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그리고 크룩스가 모두를 지킬 수 있도록 선두에 섰다.
“……자이안!”
돌연, 유리아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뛰쳐나가 자이안을 밀쳤다. 균형을 잃은 자이안의 머리 위를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강렬한 MP의 냄새가 훅 끼쳐와 자이안은 눈을 부릅떴다. 빠르게 흩어지는 잔향을 쫓아, 그는 반무의식적으로 스펙트럼을 휘둘렀다.
“호오.”
목소리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들렸다.
“예상을 뛰어넘는 힘이로군. 과연, 내 분체가 당한 것도 이해가 가.”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그러나 분명 거기에 저택을 습격한 범인이 있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냄새를 쫓을 수는 있었다.
자이안은 재차 검을 휘둘렀다. 더 빠르게, 더 간결하게, 더 정교하게. 칼날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튀며 아주 잠깐 허공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숨을 죽인 채 기회를 노리던 프레이가 바로 그 위치를 향해 번개의 사슬을 휘둘렀다.
“흠?”
사슬에 붙잡힌 적의 표면에 전류가 흐르며 외곽선이 흐릿하게 드러났다. 동시에 유리아의 마안에도 지금껏 감춰져 있던 약점이 선명하게 보였다.
자이안의 등 뒤 그림자에 몸을 숨긴 그녀가 번개처럼 튀어 나가 단검을 내질렀다. 칼날이 적의 약점을 정확히 파고들어 갔다.
“흥미롭군.”
적을 중심으로 돌연 거친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바람이 미쳐 날뛰며 지면을 갈아엎고, 가까이에 있던 이들을 멀리 튕겨냈다. 거리가 크게 벌어진 자이안이 낭패한 심정으로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다.
“장난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더 이상은 너희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으니.”
광풍의 중심에 남자가 서 있었다.
병적으로 새하얀 피부를 가진 장신의 남자였다. 마물의 뼈와 갑각을 엮어 만들어낸 검은색 갑주로 온몸을 빈틈없이 감싸고, 그 위에 선혈로 젖은 듯 새빨간 망토를 걸쳤다.
머리 위에는 부패한 마물의 살점으로 틀을 만들고 중심에 마물의 눈알을 박은 하얀 왕관을 쓰고 있다.
“교만…….”
자이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미 한 번 죽인 마족이 다시 나타났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놀라움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그보다는 올 것이 왔다는 감정이 앞섰다.
일전에 탐욕과 분노에게서 찬탈자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들었을 때, 어쩌면 지금까지 죽인 마족들이 도로 부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으니까.
‘그때는 이렇게 강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한 가지 예상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이었다. 자이안은 처음 교만을 쓰러뜨렸을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강해졌으나, 이는 다시 모습을 드러낸 교만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그때 죽였던 건 분신에 불과했던 건가.”
프레이가 나직하게 중얼거린 말에 자이안 역시 교만의 비밀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 교만이 자기 입으로 ‘내 분체’ 운운하는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다시 보게 되는구나. 나이아 알코스의 아이야.”
“날 기억하는 건가?”
“물론이고말고. 네가 죽인 분체 역시 내 존재의 일부. 분체가 겪은 모든 기억과 경험을 나 역시 공유할 수 있다. 비록 약간의 시간 차가 존재하고, 그 때문에 나의 분체를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교만이 부드럽게 미소 띤 얼굴로 자이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흡사 연인이나 가족을 보는 것만 같은 친애로 가득 찬 표정. 그러나 자이안은 스펙트럼을 쥔 손에 아플 정도로 세게 힘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말거라.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것은 많지 않다.”
“어…… 별로 들을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에.”
“죽음. 혹은 복종.”
나른한 목소리로 끼어든 아르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교만은 그런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해를 하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나는 너희에게 선택권을 주려는 것이다. 나의 대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 자명한 너희에게 말이다. 그만큼 너희의 힘을 인정했다는 뜻인데, 영광스럽지 않느냐?”
“지랄하고 자빠졌네.”
프레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이죽거렸다. 반면 자이안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계라니? 무슨 계획을 말하는 거지?”
“복권. 그리고 지배.”
그 목소리는 감정적 기복이 없이 담담하기만 했다. 마치 자리를 벗어난 물건을 제 자리에 갖다 놓는 듯, 당연히 일어나야 하는 섭리를 설명하는 듯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이 세계는 너희의 것이 아니다. 너희는 세계의 주인을 행세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주인 없는 집에 멋대로 발을 들인 불청객에 불과하지. 그러니 내가, 진정하며 유일한 주인인 내가 너희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되찾는 것은 지극히 올바른 순리다. 동의하느냐?”
거절당할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는 것 같은 물음이었다.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크룩스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프레이를 돌아보았다.
“형, 이거 더 들어줘야 합니까?”
프레이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자이안에게 시선을 던졌다. 눈이 마주치자, 자이안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이안이 저런 미치광이의 개소리는 더 듣고 싶지도 않다는구만.”
“예? 그렇게까지 과격하게 생각하지는 않았…….”
“토벌 대상이다. 죽여.”
프레이의 말이 끝을 맺은 순간 크룩스가 적을 향해 전차처럼 돌진했다. 아르스와 프레이가 날아올랐고, 유민을 중심으로 뿜어져 나온 신성한 빛이 모두의 힘을 북돋웠다.
소아레스와 유리아가 교만의 주변을 맴돌며 그의 주의를 교란시켰다.
마지막으로, 자이안이 스펙트럼을 곧게 세워 들고 적에게 쇄도했다.
최후의 마족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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