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평화?(10)
(183/210)
183화 평화?(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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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화 평화?(10)
2023.04.04.
이른 아침. 자이안은 오랜 습관에 따라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쭉 기지개를 켜고, 주섬주섬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어느덧 날씨는 가을을 지나 초목이 앙상해지는 겨울에 접어들었다.
처음 저택을 떠나고 프레이를 만났을 때를 기준으로는 약 2년, 마지막으로 두 마족 탐욕과 분노를 쓰러뜨렸을 때 기준으로는 4개월가량이 지났다.
그동안 일상에 찾아온 변화는 없었다. 아르스는 포기하지 않고 균열을 열기 위한 연구를 계속했지만, 최근에는 그마저도 쉬엄쉬엄이 되었다. 자이안 역시 이를 보채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균열을 열어 마계로 넘어간다는 당초의 목적은, 이대로는 영영 이룰 수 없음을.
‘그게 나쁜 일은 아니지.’
생각에 잠기면서도 자이안의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저택을 나와 기사단 연병장으로 발을 옮긴 뒤 손에 익은 연습용 철검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자이안은 스스로의 움직임을 확인하려는 듯 아주 천천히, 세밀하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이안의 몸과 마음은 평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금도 가끔씩 까닭 없는 불안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또다시 균열이 열리고 마물이 쏟아져 나온다면? 변치 않는 상황에 싫증이 난 찬탈자가 직접 마수를 뻗는다면? 그런 식으로 한 번 불안에 잠길 때면 부정적인 생각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래도 당초에 비하면 많이 얌전해진 셈이었다. MP의 냄새에 과민 반응하지도 않고, 불안이 실체화된 듯한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다가 한밤중에 깨어나는 일도 없으니까.
지금에 이르러선 때때로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매일 아침 검을 휘두르는 이 훈련도 이제 와서는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
‘……의미가 없는 건 아닐 거야.’
균열은 모두 닫혔으나 마물마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도 대륙 곳곳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마물의 무리가 숨어있을 터.
게다가 프레이의 고찰에 따르면 균열이 모두 닫힌 뒤에도 한동안은 마물이 계속해서 나타날 거라고 한다.
자이안의 세계는 이미 한 번 멸망 직전까지 MP에 침식된 경험이 있고, 그때의 피해가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마물은 MP로부터 빚어지는 생물이니, 적어도 세계수가 제 역할을 모두 마칠 때까지는 마물의 위협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여기저기에 균열이 존재하던 시기와 비교하면 사소한 수준이겠지만.
설령 마물이 완전히 사라진다 한들 무력이 전혀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프레이가 말했듯, 진정한 자유는 강한 힘이 밑바탕 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평화롭지만, 언젠가 다시 힘이 필요한 날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도련님! 오늘도 가장 먼저 나오셨군요.”
짙푸른 새벽하늘이 서서히 밝아올 때쯤 저택에 상주 중인 기사들이 속속들이 연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이안은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며 시선과 고갯짓만으로 그들의 인사에 가볍게 답했다. 비번을 제외한 기사들이 전원 연병장에 모였을 즈음에야 자이안은 비로소 검을 내렸다.
“모두들 좋은 아침입니다. 디오네스 경하고 아코르 경이 안 보이네요?”
“둘은 오늘부터 휴가입니다. 디오네스 경은 한창 깨가 쏟아지는 신혼이고 아코르 경은 조만간 둘째가 태어난답니다.”
“오, 잘됐네요. 나중에 두 분 오시면 제가 축하드린다고 했다고 좀 전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죠?”
“하하, 같은 대답을 또 반복하게 만드시는군요. 순수하게 존경심에서 비롯된 호칭이니 도련님께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라 한마디를 하려다가, 자이안은 그냥 입을 다물고 어깨만 한 차례 으쓱였다.
본래 기사들이 자이안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절연을 선고한 이상 자이안은 공식적으로 알레프 가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민간인에 지나지 않는다.
부적절한 호칭은 가문의 위계질서를 흩트릴뿐더러 바란드의 후계자 자리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바란드가 후계를 잇는 걸 달갑지 않아 하는 이들이 자칫 자이안의 복권을 주장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기사들하고 너무 친하게 지냈나.’
‘순수한 존경심’이라는 표현이 빈말은 아닐 것이다. 오래도록 알레프에 충성을 바친 이들이 그 정도도 구분하지 못하지는 않으리라.
어쩌면 그 안에 다소나마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섞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택에 상주하는 기사들 중 대부분이 과거 자이안이 ‘자이안 알레프’일 때부터 안면이 있던 이들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미오네의 학대에 찬동했던 이들이기도 했다. 미오네의 권력 때문에 강제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대다수기는 했지만.
‘그래도 첫날엔 너무 심하긴 했어.’
이런 식으로 기사들과 엮이게 된 건 우연이었다. 단순하게 시간을 잊고 검을 휘두르는 데 몰두한 탓에 기사들이 연병장에 모일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기사들과 자이안 사이에 감돌던 분위기는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어색했다.
-어…… 으음, 저희 가볍게 대련이라도 할까요?
어떻게든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꺼낸 한 마디가 화근이 되었다.
반은 미안함과 어색함으로, 나머지 반은 자이안의 신들린 검술을 목도한 충격으로 얼어붙어 있던 기사들이 투지로 불타기 시작했다.
손대중을 한다고 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억지로 져 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당연히 기사단원 수십 명이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모두 사이좋게 연병장을 나뒹굴게 됐다.
그리고 그때부터 기사들 사이에 한 가지 기묘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과거 따위는 모두 집어치우고, 순수하게 자이안을 지고의 경지에 이른 무인으로서 존경하며, 하나라도 더 많은 가르침을 받아내자고.
‘좋게 생각하자. 좀 귀찮긴 해도 그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낫지.’
생각을 정리한 자이안이 철검을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고 목검을 대신 꺼내 돌아왔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철검은 자칫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목검도 물론 맞으면 많이 아프지만, 그래도 철 덩어리에 비할 바는 아니다. 검이 부러지지 않도록 힘을 조절하는 좋은 훈련이 되기도 했고.
“그러면…… 오늘은 누구부터 시작할까요?”
목검을 든 자이안이 연병장 한가운데에 섰다. 목이 빠져라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이 앞다투어 그의 앞으로 몰려들었다.
평화로운 어느 겨울날 아침의 광경이었다.
* * *
파직!
거센 스파크와 함께 프레이의 손이 뒤로 휙 퉁겨졌다. 검게 그을린 손가락 끝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프레이는 손을 휘휘 털며 와락 인상을 썼다.
“쯧. 세부 조정이 어렵구만.”
눈앞에 둥둥 떠 있는 펜던트가 마치 너 따위의 손길은 받고 싶지 않다고 온몸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금방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애를 먹는 작업이었다.
“이제 변명할 말도 없는데…… 그냥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하나.”
집중을 풀자 방 안에 휘몰아치던 MP의 격류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공중에 떠 있던 펜던트도 그대로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걸 가볍게 한 손으로 받아낸 뒤, 프레이는 지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이게 이렇게까지 애쓸 일인가?’
아마도 일어날 가능성이 한없이 0에 가까운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시작한 일이었다.
노파심이라고 할 수도, 강박관념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몇 달째 성과가 없이 제자리걸음만 하게 되니 점점 회의감이 밀려왔다.
‘이렇게까지 어려울 줄은 몰랐는데.’
사실 계획은 한참 전부터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막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일행 중에서 펜던트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르스가 첫 번째, 프레이가 두 번째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르스가 첫째, 자이안이 둘째, 프레이는 셋째에 불과했다.
그리고 주인인 자이안의 독단으로 중간중간 크고 작은 개조를 여러 번 거친 펜던트는 당초 프레이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아티팩트가 되어 있었다.
아바타 소환 메커니즘에 간섭해 트리거 하나를 새로 만드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젠장. 모르겠다. 난 할 만큼 했어.”
포기한 듯 욕설을 뱉으며, 프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멀리 보이는 기사단 연병장에서 자이안이 수십 대 일로 싸우며 신나게 날뛰는 모습이 보였다.
삼촌인 자신은 골방에 틀어박혀서 혼자 고생하고 있는데, 조카란 놈이 그것도 모르고 태평하게 놀고 있는 꼴을 보니 문득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화는 곧 가라앉고 대신 허탈한 심정이 가득해졌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비해 괜한 짓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되돌아보니 헛웃음만 났다.
“그래. 할 만큼 했지. ……이젠 좀 쉬어도 되겠지.”
그런 비슷한 말을 자이안에게도 몇 번 했던가. 정작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한 시도 쉬지 못하고 있는 건 자이안이 아니라 프레이 자신이었다.
힘없이 한숨을 뱉고, 프레이는 탁자 위에 펜던트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괜히 화풀이 삼아 손끝으로 펜던트를 툭툭 건드렸다.
펜던트 가운데에 박힌 보석이 프레이의 속도 모르고 영롱한 빛을 냈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노려보다가, 프레이는 옷도 안 갈아입고 그대로 침대에 뛰어들어 드러누웠다.
자이안이 그랬듯, 그 역시 평화에 익숙해질 때였다.
* * *
한때 복마전이라고 불렸던 거친 평야. 균열은 모두 닫혔지만 땅은 여전히 MP에 짙게 침식되어, 풀 한 포기 없이 메마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츠즈― 치지지직―
깊은 밤. 갑자기 메마른 땅 위에 푸른 스파크가 번뜩이며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MP의 거센 격류와 충돌이 만들어내는 빛과 소음이었다. 사위를 뒤덮은 밤의 장막이 찢어지며 스파크와 소음이 몸집을 키웠다. 그리고 어느 순간.
쩍, 하고 허공이 갈라지며 무저갱의 암흑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기가 불온하게 요동치며 거센 돌풍을 만들어냈다. 그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암흑은 그저 고요히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이었다. 서서히 바람이 잦아들고, 다시 모든 것이 침묵한 그때.
무저갱의 암흑을 찢고 한 쌍의 손이 튀어나왔다.
두 손이 허공에 만들어진 균열을 붙잡아 좌우로 크게 열어젖혔다. 보이지 않는 힘의 격류가 퍼져나가며 메마른 땅을 거칠게 찢어발겼다.
이윽고 한층 넓어진 균열 속에서 두 팔과 다리가, 갑주와 망토를 두른 몸이, 왕관을 쓴 머리가 완전히 빠져나왔다.
“하아아아…….”
남자가 깊이, 깊이 숨을 들이켰다.
“생명의…… 냄새.”
감미롭게 중얼거리며, 남자가 눈을 떴다. 고개를 들고 어느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발을 디뎠다. 지면이 움푹 파였다.
복마전 전체가 뒤흔들리며 고통에 차 비명을 터뜨렸다. 마에 물든, 그 무엇보다도 죽음에 가까운 땅마저 남자의 존재를 차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모든 반응이 남자에게는 더없이 기꺼웠다.
눈을 가늘게 뜨고 생명이 내지르는 비명을 음미하며, 남자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오직 한 방향만을 향하고 있었다.
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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