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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화 평화?(9) (182/210)


182화 평화?(9)
2023.04.03.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꿈을 꾸는 기분? 멋졌다는 게 아니라, 꿈이 아닌가 싶을 만큼 현실감이 없었거든. 허구한 날 TV에 얼굴이 비치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난 거니까.”

지구의 문명을 잘 모르는 자이안으로서는 그 말에 온전히 공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지구의 문명이 얼마나 세밀하게 발달해 있는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가령 의사라는 직업만 해도 그랬다. 자이안의 세계에서는 성국의 영향 탓에 신관이 의원을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전문이 세밀하게 나뉘지도 않으니까. 모든 국민이 일정 학력에 도달할 때까지 의무로 교육을 받는다는 것도 쉬이 상상치 못할 발상이었다.

“마물이야 그 자리에서 흔적도 안 남기고 없어졌지만, 그다음이 문제였어.”

인근에서 발생한 소규모 게이트를 제때 관리하지 못한 것이 마물이 나타난 원인이었다.

나이아는 근처를 수색해 당장의 위험을 모두 정리한 뒤 곧장 관리를 게을리 한 당국에 따지러 가려 했다. 그러나 거기서 문제가 일어났다. 유민이 대뜸 각성해버린 것이다.

“어흠, 흠. 이걸 내 입으로 말하려니 조금 부끄러운데…….”

각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물 살해에 직접적으로 관여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간혹 그런 상식을 무시하는 이들이 나타나고는 했다. 너무 재능이 없거나, 놀라우리만치 재능이 뛰어나거나. 유민은 후자였다.

유민에게 잠재된 뛰어난 MP 감응 능력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강력한 각성자와 만나면서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눈을 떴다. 강한 자극을 받은 선천적인 감응 능력이 근처에 쓰러진 마물에게서 소량의 MP를 빨아들이고, 그 자리에서 적응까지 마쳐버렸다.

만약 그 자리에 나이아가 아니라 다른 각성자가 있었더라면, 어쩌면 다른 미래가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은 이미 일어나버렸다. 유민은 아닌 밤중에 각성자 등록도 할 겸, 도심 한복판에서 발생한 소규모 게이트 재해의 주요 참고인 겸 그 자리에서 나이아에게 끌려갔다.

“사실 나는 각성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그야 물론 일탈을 바라기는 했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일이잖아?”

유민은 갑자기 손에 넣은 힘을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유민을 위해 나이아가 설득에 나섰다. 그녀는 각성자라고 모두가 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만은 아니며, 능력을 어떻게 발달시키느냐에 따라 다른 업무를 맡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등을 설명했다.

바로 믿을 수는 없었지만, 호기심이 동한 것도 사실이었다. 각성자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매우 위험한 일이지만, 그만큼 많은 이들을 구하고 그들에게 추앙받는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살린다는 점에서는 의사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지친 나머지 일탈을 택하기는 했지만, 사실 유민은 의사라는 직업이 싫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인생을 걸어볼 만한 훌륭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꿈을 좇지 못하는, 모자라고 못난 자신. 그런 상황에서 각성자라는 길은 의사를 대체할 수 있는 그럴듯한 유혹으로 다가왔다.

동경과 호기심, 그리고 현실적인 위험이라는 기로에 서서 고민하던 유민은 나이아에게 조건을 달았다. 부모님을 설득하는 걸 도와달라고. 그리고 각성자라는 게 말처럼 위험한 것만은 아니라던 말을 직접 증명해달라고. 잠시 골똘히 생각한 나이아는 이내 흔쾌히 수락했다.

“다음 날 아침 언니랑 같이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때 부모님 표정이 아직도 안 잊히더라.”

처음 나이아의 설명을 들었을 때 두 부모는 너무 위험하다며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당연히 그리되겠거니, 하고 생각하면서도 유민은 마음 한구석에서 덜컥 겁이 났다. 만약 여기서 두 분을 설득하지 못하면, 기껏 도망친 일상 속에 다시 갇히게 되는 걸까?

유민은 참지 못하고 그동안 억눌렀던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때 두 사람이 지은 표정은 유민이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잘못한 걸 타이를 때도 웃는 얼굴일 정도로 온화한 어머니가. 환자 앞에선 청산유수이면서 가족들에게는 말 한마디도 허투루 꺼내지 않을 만큼 조심성 많은 아버지가. 충격으로 말문이 막히고, 격노한 듯 거칠게 인상을 썼다가, 이내 서로를 마주 보며 힘없이 탄식했다.

유민을 안고는 알아차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더 일찍 이렇게 서로 얘기를 나누지 못해 미안하다고 절절하게 사과했다.

그들의 말은 유민에게서 망설임을 걷어내고 마음을 다잡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프고 힘든 이들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존경하는 두 분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의사라는 직함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게 모든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유민은 부모 밑을 떠나 나이아와 함께 더 넓은 세계로 향했다.

“그 뒤로는 나름대로 자리 잡고 독립하기 전까지 언니네 집에서 같이 살게 됐어. 아, 이건 크룩스한테 들었다고? 그럼 대충 넘어가야겠다. 그때 재밌는 추억 많았는데. 프레이 아저씨 주사 알게 된 것도 거기 살면서였고, 겉으론 멀쩡하게 생겨서 용기 내서 고백했다가 차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머릿속에 근육만 들어찬 멍청이라는 걸 알게 되기도 했고.”

“고, 고백? 언니가 크룩스 오빠한테?”

“응? 왜? 아까 다 들었다며? 잠깐만, 너네 표정이 왜 그래……?”

자이안과 유리아는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유민 역시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다. 멀뚱히 둘을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이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 바보가 혹시 얘기 안 해줬어?”

“…….”

자이안이 차마 목소리조차 내기 무서워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유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침대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못 들은 거야.”

침대 위에 웅크린 채 온몸을 바들바들 떨던 유민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네 방금 전에 아무것도 못 들은 거야.”

자이안과 유리아는 잠시 서로를 마주 본 뒤, 유민의 명예를 위해 조금 전의 기억을 깊이 묻어놓기로 다짐했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그래. 언니는 엄청 바쁜 사람이었어.”

간신히 기운을 차린 유민이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말투는 전과 똑같지만, 슬금슬금 눈을 피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결코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바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내 상상보다도 훨씬 더 바빴지. 내가 봤을 때 언니는, 전 세계 모든 게이트 재해를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직접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 것 같았어. 좀 강박적이지.”

나이아는 단독 행동이 굉장히 잦은 편이었다.

그리고 백마법사로서의 재능을 본격적으로 꽃피우기 시작한 유민은 전천후 만능형인 나이아와 궁합이 아주 좋았다.

둘은 자연스럽게 함께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게 됐다. 국경도, 인종도, 사상도 가리지 않았다. 게이트가 열리고 마물이 나타나 사람들이 고통받는 곳이라면 어디든 발을 디뎠다.

나이아는 분명 비할 데 없이 강력한 최강의 영웅이지만, 그렇다고 신은 아니었다. 나이아가 구할 수 있었던 수보다는 구하지 못한 수가 훨씬 많았다. 때로는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광경을 지켜만 보게 되기도 했다. 그래도 나이아의 태도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난 좀 무서웠어. 사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좀 무서워. 나한테 언니만큼의 능력이 있었어도 그렇게까지는 못했을 것 같거든. 물론 발끝이라도 쫓아갈 수 있도록 노력은 하겠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구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세계를 떠도는 나이아. 그렇지 않을 때의, 가볍고 장난스러운 분위기의 옆집 언니 같은 나이아. 그 간격이 유민에게는 너무나 위태롭게 느껴졌다.

“한번은 오랜만에 집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는데 프레이 아저씨가 날 찾아오더라고. 아, 잠깐만. 이거 내가 마음대로 말해도 되는 게 맞나?”

잠시 고민하던 유민이 될 대로 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알 게 뭐야.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닌데. 아무튼 갑자기 아저씨가 오더니, 언니랑 그동안 오래 붙어 다녔는데 같이 다녀보니 어떤 느낌이냐고 묻는 거야. 처음엔 얼버무릴까 했는데, 그래도 그 아저씨가 언니 가족이잖아. 둘이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냥 느낀 대로 얘기해줬어. 그랬더니 그럴 줄 알았다면서, 언니 좀 부탁한다고 그러는 거야. 그때부터는 내가 멘탈 케어도 본격적으로 담당하게 됐어.”

백마법 중에는 심신을 안정시키거나 긴장을 풀게 만드는 등 정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마법도 많았다.

그러나 과연 그 노력이 나이아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나이아는 미처 지키지 못한 수백 명이 눈앞에서 목숨을 잃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상황을 정리한 뒤 다른 곳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구하러 향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크룩스가 나보고 언니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을 거라고 했다고? 나도 그렇다고 생각해. 그런데 과연 언니의 속마음까지 놓치는 거 없이 다 알 수 있었을까, 하고 물어보면 솔직히 잘 모르겠어. 아니, 아마 거의 알지 못하겠지.”

만약 나이아와 마음을 터놓고 숨기는 것 없이 내면까지 모두 공유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더라면, 어쩌면 그녀의 최후는 지금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유민이 홀로 조용히 숨겨온 작은 후회였다.

“자, 재미없는 얘기 끝! 다 들었으면 얼른 나가. 난 낮잠이나 더 자야겠다.”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밝은 목소리로 유민은 자리를 마무리 지었다. 자이안과 유리아는 크룩스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경의를 담아 깊이 인사한 뒤 방을 나섰다.

“나랑 나이아 옛날얘기? 아, 크룩스랑 유민한테는 이미 대충 듣고 왔다고? 이거 어쩌나. 나는 진짜 얘기할 게 별로 없는데. 나랑 나이아랑은 비지니스 관계에서 시작된 거거든.”

이후로도 둘은 아르스에게 찾아가 크룩스나 유민이 모르는 나이아의 또 다른 면을 듣고자 하기도 했다.

“벌써 20년도 더 됐지. 그때 난 제작 계통 각성자의 선구자로서 한창 주가를 올리면서 뉴욕 한복판에 빌딩을 세워놓을 정도로 잘 나가는 사업가였거든? 물론 경영은 전문 경영인 고용해서 전부 맡기고 나는 물건만 만드는 게 다였지만. 아무튼 나이아는 그때까지 내가 받아본 것 중에서 가장 골 때리는 진상이었어. 어떻게 보면 악연으로 시작된 인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리고 마지막으로 둘이 찾은 곳은 프레이의 방이었다.

“뭐? 옛날얘기? 내가 뭐하러?”

프레이는 별 귀찮은 걸 다 물어본다는 듯 심드렁한 태도였다. 자이안이 그를 어르며 말문을 틔워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나 바쁘다. 그런 거 얘기할 시간 없다고. 됐으니까 펜던트나 내놔 봐.”

“저번부터 펜던트는 자꾸 왜 가져가시는 겁니까?”

“무식하게 막 쓰는 너 대신 나라도 대충 정비 좀 해주려고 그런다.”

“…….”

할 말이 없어진 자이안은 황망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정비를 게을리하지는 않았지만, ‘무식하게 막 쓰는’이라는 표현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일하는 거 방해하지 말고 얼른 나가봐라. 제발 엄한 생각 하지 말고 그냥 푹 좀 쉬라고.”

반 억지로 둘은 떠나보낸 뒤, 조용해진 방 안.

“……쯧. 뭐 이렇게 끈질긴지. 둘러대기도 힘들구만.”

프레이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작게 투덜거렸다.

뒤통수를 한 번 벅벅 긁고, 그는 조심스럽게 펜던트를 두 손으로 쥐어 들어 올렸다.

이윽고 펜던트가 저절로 공중에 떠올랐다. 프레이는 허공에 뜬 펜던트를 노려보며 MP를 일으켰다. 방대한 힘은 방안을 가득 채우며 휘몰아치기 시작했으나, 동시에 자이안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고요하고 은밀했다.

“……거의 다 됐다.”

펜던트를 노려보며 프레이가 말했다.

“……이제, 조금만 더…….”

그 뒷말은 휘몰아치는 MP가 만들어낸 거센 바람소리에 파묻혀 힘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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