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평화?(8)
(181/210)
181화 평화?(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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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화 평화?(8)
2023.04.02.
자이안은 꿀꺽 침을 삼켰다. 각성자들과 함께 하며 나이아의 이름이 언급된 적은 많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 직접적으로 과거의 행적을 들은 건 프레이를 처음 만난 그날 이후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된통 깨지긴 했지만, 저 나름대로는 선방했던 거 같아요. 버티기도 10분 넘게 버텼고, 누나한테 생채기도 몇 개 만들어줬고. 그 대가로 팔다리가 다 너덜너덜해지기는 했지만.”
“파, 팔다리가 너덜너덜.”
섬뜩한 표현에 유리아가 아연히 중얼거렸다.
“아예 잘려 나가지만 않으면 자기가 고칠 수 있다면서 사정없이 부러뜨리더라고요. 하하.”
즐거운 추억을 되짚어보기라도 하듯 크룩스는 껄껄 웃었다. 자이안과 유리아는 서로를 마주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영국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정부가 저 하나를 잡으려고 벼르던 상황이었어요. 그대로 처형대로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죠. 그걸 나이아 누나가 막아줬어요.”
나이아는 적극적으로 크룩스를 변호했다. 이름조차 모르는, 족히 수십 명에 달하는 각성자를 사냥한 극악한 범죄자를 말이다. 크룩스는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그동안 나이아가 쌓은 이미지, 대재해로부터 고국을 지킨 영웅이라는 위상, 고아 출신이라는 특수한 태생.
만약 나이아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을 경우, 그녀가 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하면 입게 될 손해에 이르기까지. 각국 수뇌부는 깊이 갈등했으나 결국 나이아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여러 정치적 계산이 복합적으로 깔린 결과였다. 당시 나이아는 고작 20대에 불과했으나, 단신으로 강대국들의 수뇌부와 힘 싸움을 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프레이 아저씨는요? 그동안 뭐 했대요?”
“형이요? 저도 몰라요. 그 성격에 그런 일을 신경 쓰기나 했겠어요?”
크룩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짓궂게 말했다. 마주 앉은 둘은 쓴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재판 결과 정상참작으로 풀려난 뒤, 곧장 나이아 누나를 찾아갔어요.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감당할 자신은 있는지 듣고 싶었거든요.”
먼 곳을 바라보며 크룩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추억을 들춰보는 그의 눈동자가 아련한 빛으로 물들었다.
“듣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별생각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죽기엔 아까운 녀석을 살리는 데 무슨 거창한 생각이 필요하냐고. 그래서 제가 다시 물어봤죠. 이번 일 때문에 강대국들이 분명 당신을 고깝게 볼 텐데 무섭지는 않으냐고. 그랬더니 반대로 저한테 묻더라고요. 나라나 입장 같은 사소한 일로 사람이 죽는 걸 그냥 보고만 있는 게 옳은 일 같냐고.”
그때 크룩스는 생각했다. 아, 이 사람은 좋은 의미로는 나쁜 의미로는 평범한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이상한 사람이다.
크룩스는 일견 무책임하게 들리는 그 대답만 가지고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가 생각해도 자신은 많은 사람을 잔혹하게 죽인 나쁜 놈이 맞았기 때문이다. 피에 취하고, 피로 목욕을 하며 수라의 길을 걸었으나 그의 가슴속 한구석에는 인간의 면모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누나가 엄청나게 웃더라고요.”
“예? 거기서 갑자기?”
자이안은 멍청히 반문했다. 분명 자기 어머니가 분명한데, 젊은 시절의 나이아는 행동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냥 내던져놓고 또 나쁜 짓을 하면 그때마다 쫓아가서 혼내주려고 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까 자기 생각보다 싹수가 있는 놈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뒷덜미 잡혀서 질질 끌려갔어요. 그대로 나이아 누나, 프레이 형하고 같이 살게 됐죠.”
그때 프레이를 처음 만난 크룩스는 그가 지은 복잡미묘한 표정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나중에 듣기로는 여동생이 벌써 훌쩍 커서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오게 됐구나, 근데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는 것 같은데 이거 괜찮은 건가, 남자가 생겼으니 그 지랄 맞은 성질머리도 좀 잠잠해지겠구나, 뭐 그런 생각이었다고 한다.
곧바로 나이아에게 사정을 전해 듣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쉬어댔지만.
“그렇게 같이 살면서 가르침을…… 으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는 표현은 좀 이상한가. 같이 마음을 다잡는 수련을 했어요.”
비록 나이아가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영웅이고, 그에 걸맞은 고결한 마음을 가지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20대의 애송이였다. 그녀라고 해서 피로 얼룩진 마음을 다스리는 정신수양법을 아는 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티격태격하며 오랜 시간을 부대끼게 됐다. 무술에 대한 이해도 역시 그런 과정에서 깊어졌다.
“결국 마음속의 수라를 죽이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어느 정도는 제 뜻대로 다스리고, 그럴듯하게 포장할 수도 있게 됐죠. 그 결과가 지금의 저예요. 호인의 가죽을 뒤집어쓴 수라.”
일견 자조적으로 들리는 내용이었으나 정작 크룩스의 말투는 후련하기만 했다. 그 스스로 그런 자신의 모습을 솔직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수라’라는 기술은 예전의 저, 그러니까 복수를 완수한 뒤 피에 취해서 범죄자들을 사냥하며 돌아다니던 시절의 저를 형상화하는 기술이에요. 내력을 특수한 경로로 순환해 내면의 야성을 자극하며 그때의 기억을 억지로 떠올리는 거죠. 신체 능력 증폭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고요. 이 장갑은 그 특수한 내력의 순환을 보조하면서, 제가 수라가 되어도 최소한의 이성은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제어 장치의 역할도 겸하고 있어요.”
“……대단하네요.”
자이안은 멍청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탄성을 뱉었다. 다소 어둡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과거사와는 상반된 감상에 크룩스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자이안이라면 그렇게 말해줄 줄 알았어요.”
크룩스는 장갑을 곱게 접어 새로 차려입은 옷 앞주머니에 넣었다. 그 행동은 마치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대화를 마무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뒤로는 따로 얘기할 만큼 대단한 일은 없었어요. 어느 정도 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돼서 독립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마물도 죽이고 사람도 구하고, 나이아 누나 소개로 사람들도 좀 만나고 하면서 지냈죠. 그러다가 나이아 누나가 마계를 직접 치자는 바보 같은 계획을 얘기하는 자리에 다 같이 모이게 됐고.”
말을 마친 크룩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어때요? 재밌었나요?”
자이안은 대답 대신 몸을 일으켜 똑바로 섰다. 그리고는 가슴에 손을 얹고 크룩스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과거 얘기를 듣는다고 뭐가 크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민감할 수도 있는 과거를 거리낌 없이 들춰 보인 그 행동 자체에 감사했다.
“얘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룩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 있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더 얘기를 듣고 싶으면 유민 씨를 찾아가 보세요.”
방을 나서기 직전 크룩스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조언을 남겼다.
“유민 씨도 저랑 비슷하게 두 분하고 같이 산 적이 있거든요. 자세한 사정은 본인한테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고…… 저도 뭐 두 분이랑 친하게 지낸 건 맞는데, 솔직히 가족처럼 여길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옛날 일 때문에 그런가, 상대가 누가 됐든 거리를 두게 되더라고요. 유민 씨는 저하고는 반대로 진짜 친자매처럼 나이아 누나하고 붙어 다녔어요. 아마 제가 모르는 얘기도 많이 알고 있을 겁니다.”
말을 마친 크룩스가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방에 남은 자이안과 유리아는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으로 쳐들어갈 대상이 정해졌다.
* * *
유민은 천성이 게으름뱅이였다.
일부러 악의적으로 표현하면 그렇고, 정확히는 쉴 때와 일할 때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성격이었다. 즉, 쉴 때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어져서 푹 쉬었다.
그런 반면에 대외적으로는 그런 모습을 털끝만큼도 드러내지 않을 만큼 자기 관리가 철저한 성격이기도 했다.
세인트, 즉 성자라는 호칭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백마법에 특화된 각성자 특성이나 자기희생적 천성도 물론 큰 영향을 미쳤지만, 철저한 자기 관리에서 비롯된 완벽한 이미지 메이킹이 거기에 방점을 찍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내 옛날얘기를 듣고 싶다고? 재미없을걸.”
기습적으로 방을 찾아간 둘을 맞이한 건 침대 위에 질펀하게 늘어진 유민의 모습이었다.
해가 중천에 뜬지 오래인데 아직도 잠옷 차림이었다. 분명 조금 전 급하게 자이안을 진찰하러 나왔을 때만 해도 깔끔한 복장이었는데,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다시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유민 입장에서는 방심했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문을 두드린 게 하필 자이안이 아니라 유리아였던 것이다. 죽이 잘 맞아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된 지 오래였으니, 조금쯤 칠칠치 못한 모습을 보여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 뒤에 자이안이 있는 줄 알았다면 절대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텐데.
자이안의 존재를 깨달은 뒤 유민의 행동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각성자 특유의 신체 능력을 최대한으로 쥐어짜 재빨리 문을 닫고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기까지 걸린 시간이 약 10초 남짓.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둘을 방으로 맞아들였지만, 봐서 안 될 것을 보고 만 자이안의 눈빛은 그대로였다.
“응? 언니는 시험 같은 거 안 봐?”
유리아가 발 벗고 나서기로 했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그녀가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시험이라니?”
유민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뒤늦게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내가 크룩스 같은 근육 돼지도 아니고, 무슨 시험을 봐? 고작 옛날 얘기하는데 유세 부리는 것도 아니고. 자이안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다 알고 있는데.”
유민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크룩스와 자기는 입장이 아예 다르다는 뜻이었다.
“근데 진짜 재미없을 텐데. 난 옛날 썰 재밌게 푸는 재주도 없고. 좀 부끄럽기도 하고.”
“억지로 말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하기 싫으면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니, 누가 하기 싫대? 잠깐만, 기억 좀 정리해 보고.”
유민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보는 그 표정은 놀라울 만큼 크룩스와 닮아 있었다.
“우리 집안이 의사 집안이었거든. 아버지 어머니 둘 다 의사셨어. 자식은 나 하나뿐이었고. 애정도 많이 받고, 기대도 많이 받았어.”
유민이 태어난 나라는 한국이라는 작은 반도 국가였다.
천연자원 한 푼 안 나오는 좁은 땅덩어리, 그 반면 질 높은 인적 자원과 그를 뒷받침하는 학구열, 치열한 경쟁이 특징적인 나라. 마물이 튀어나오고 각성자가 날아다니는 시대가 되어도 그 특징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으면 모를까.
사회적 지위가 높은 부모를 둔 덕에 그녀 역시 어릴 때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비싼 사립학교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고 학교 수업을 마친 뒤에도 돈을 쏟아부어 가며 사교육을 받았다.
어릴 때는 그런 인생에 의문을 품지도 않았고 학업을 따라가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10대 중반을 지나고 고등학교에 접어들면서 그녀는 점점 한계와 염증을 느꼈다. 날이 갈수록 부모가 거는 기대가 커졌지만, 자신은 거기에 부응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하지 않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됐다.
“그래도 참을 수 있을 만큼 참았는데…… 우리나라에 그런 말이 있거든. 참으면 병 된다고. 학원에서 쪽지 시험을 보고 집에 돌아가는데, 갑자기 엄청나게 지치는 거야. 부모님한테도 시험 결과가 문자로 갔을 텐데, 생각보다 더 많이 틀려서 분명 실망하셨을 텐데. 하지만 내 앞에서는 괜찮다고, 이 정도면 잘한 거라고 위로하시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도저히 집으로 갈 수가 없더라.”
늦은 밤중에 그녀는 목적지도 없이 길거리를 방황했다. 자기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자각도 없었다. 부모에게 전화가 왔다며 거슬리게 웅웅 떨어대는 휴대폰은 돌아다니다가 눈에 띈 하천에 내다 버렸다.
“그렇게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마물을 만났어.”
큰일 났다, 얼른 도망쳐야 하는데.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발은 땅에 달라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무서워서 몸이 굳은 건 아니었다. 살기 위해 애쓰고 발버둥 치는 걸 포기해버린 것이다. 차라리 이대로 누구의 눈에도 띄지 못한 채 혼자 몰래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어린 마음에 염세적으로 생각했다.
“아니, 아, 진짜. 이렇게 말하니까 진짜 뭣도 모르는 중2병 같네. 혹시 해서 말하는 건데 그게 진심인 건 아니다? 그냥 그때는 너무 정신적으로 몰려 있어서, 나도 모르게 바보 같은 생각이 들고 그랬던 거야.”
결과적으로 조용히 죽고 싶다는 유민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천문학적인 확률의 우연이었다. 마침 알코스 남매가 한국에 파견 중이었고, 밤공기나 쐴 겸 산책을 하던 나이아가 민감하게 마물의 기색을 포착했다.
유민의 앞에 나이아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