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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화 평화?(7) (180/210)


180화 평화?(7)
2023.04.01.


“꺄아아아아악!”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아르스는 찢어져라 비명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티팩트를 이렇게 무식하게 다루는 공학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아티팩트 공학자 실격이야!”

마지막 순간 자이안이 크룩스에게 쏘아 낸 공격. 아르스는 그게 얼마나 위험하고 무식한 공격인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비유하자면 원거리에서 실을 던져 수백 개의 바늘구멍을 한 번에 꿰뚫는 것과 비슷한, 아니 그런 비유조차 한 수 접어 줘야 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였다.

MP가 한순간이라도 정해진 이론을 벗어나 다른 경로를 그렸더라면 무리한 운용의 대가로 스펙트럼이 망가지는 것은 물론 자이안 역시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괜히 봤네. 신경 쓰지 말고 연구나 계속할걸.”

진이 빠진 아르스가 힘없이 한숨을 뱉었다. 균열 연구가 잘 풀리지 않아서, 둘의 싸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믿을 수가 없네에. 내가 아티팩트는 자식처럼 다뤄야 한다고 몇 번을 가르쳤는데.”

검은 파도가 크룩스를 사정없이 휩쓸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모의 훈련실 영역 절반 이상을 뒤덮었다.

핵폭발도 견디는 훈련실 영역이 불안정하게 울렁이더니 노이즈와 함께 픽, 사라졌다. 검은 파도는 그대로 저택 부지를 쭉 가로지르며 하늘 저편으로 날아갔다.

“……진짜 믿을 수가 없네.”

검은 파도가 지나간 뒤 드러난 광경을 보고, 아르스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프레이도 역시 아르스의 방에서 창문 몇 개 더 떨어진 방에서 그 모든 자초지종을 지켜봤다. ‘마검'에 대한 감상은 아르스와는 정반대였다.

“나이아를 넘었군.”

나직하게 억눌린 목소리 아래로 걷잡을 수 없는 환희가 들끓었다.

정말로 자이안이 나이아보다 강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아직 기술도 경험도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 그러나 적어도 방금 전 보여준 대담한 기술만은 생전의 나이아 이상이었다.

“빨리도 자라는구만. 따라가기도 벅찰 만큼.”

조용히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에는 절반의 기쁨과 절반의 아쉬움이 함께 묻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안뜰 한가운데. 이제는 안뜰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미안하게 느껴지는, 엉망진창으로 파헤쳐진 흙바닥 위.

“하…….”

크룩스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대자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웃옷은 넝마가 되어 어깨에 간신히 걸쳐 있고 바지 역시 아랫단이 터져나가 반바지가 되어 버렸다. 반라의 모습을 감출 생각도 않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걷잡을 수 없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많은 감정이 함축된 웃음이었다.

“아, 이거 진짜. 이렇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제가 한 방 먹었네요. 하하하하하.”

검은 수트를 뒤집어쓰고 신체 능력이 극단적으로 증폭되는 형태, ‘수라’. 크룩스가 가진 최후의 수단이며 전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장점만큼 단점도 큰 불완전한 모습이기도 했다.

자이안이 간파한 대로, 수라가 된 동안은 야성이 극도로 증폭되어 공격이 단순해지고 만다. 그 이상으로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손에 넣게 되니 잃는 것보다는 득이 훨씬 많기는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지속 시간이 짧다는 것이다.

‘수라가 끝날 때까지 버티기만 해도 충분했던 건데.’

자이안은 크룩스보다 지구력에서 밀린다는 판단에 속전속결을 감행했지만, 이는 수라의 구조를 알지 못해 일어난 착각이었다.

수라의 지속 시간은 그때그때의 감정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길어도 30분 정도.

그 시간만 버티면 크룩스는 자이안의 승리를 인정할 생각이었다. 그대로 마법으로 견제하며 시간을 끌기만 했어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던 것이다.

수라가 된 크룩스는 만전 상태의 프레이조차도 쓰러뜨리지 못해 시간을 끌며 버틸 수밖에 없는 괴물 중의 괴물이다.

아니, 프레이가 아니라 전성기의 나이아와 싸우더라도 좋은 승부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걸 정면으로 찍어 누르다니.’

순수하게 힘의 승리는 아니었다. 수라가 풀린 건 마검에 담긴 특수한 성질 때문이었다.

게임으로 비유하면 모든 이로운 효과와 해로운 효과를 구분 없이 지워버리는 디스펠 효과라고 해야 할까. 순수한 물리력만 가지고는 수라를 쓰러뜨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백마법도 흑마법도, 성검의 구조에 간섭해 그 성질을 개변시키는 아티팩트 공학 지식도 모두 자이안의 힘이니까.

크룩스는 자이안을 진정한 의미에서 ‘동료'로 인정하기 위해 수라라는 비장의 수를 드러냈고, 자이안 역시 그에 맞서 자신의 모든 능력을 한계까지 쥐어짰을 뿐이다.

서로가 전력으로 부딪쳤고, 그 결과 쓰러져있는 건 크룩스다. 그게 전부다.

“정말 잘했어요, 자이안.”

크룩스가 벌떡 일어나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이안은 지금도 산발적으로 떨리며 주인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스펙트럼을 지팡이처럼 짚고 힘겹게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멍한 표정으로 크룩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제가…… 이긴 겁니까?”

“그래요. 당신이 이겼어요. 진정한 의미로 저를 쓰러뜨린 건 당신이 두 번째예요.”

몸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크룩스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평소의 바로 그 미소였다.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자이안도 이내 현실을 받아들이고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뒤로 넘어가듯 쓰러졌다.

* * *

다행히 잠시 탈진했을 뿐인 자이안은 방으로 옮겨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식을 되찾았다.

자이안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사색이 되어 달려온 유민은 의식이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비몽사몽 한 자이안의 이마를 툭 때리며 가볍게 나무랐다.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걱정했잖아. 다음부터 기절할 거면 미리 얘기하고 기절해. 알았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자이안은 미안함을 담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을 가벼운 장난으로 얼버무렸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까 그 모습은 수라라고 하는 거예요.”

일단 의식을 차린 자이안은 빠르게 기력을 되찾았다. 문제가 없다 판단한 크룩스는 마침내 얘기를 시작했다.

“솔직히 부끄러워서 남한테 보여 주고 싶은 모습은 아니에요. 위험하기도 하고.”

그러나 필요한 일이었다. 서로를 믿고 목숨을 맡길 수 있으려면 숨기는 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 크룩스의 지론이었다.

“이 장갑은 제 안의 본성…… 아까 본 흉폭한 야성을 해방해 주는 열쇠예요.”

그리 말하며 크룩스는 아까도 보여준 밋밋한 검은 장갑을 다시 꺼냈다. 예상과는 다른 말에 자이안은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본성을 해방한다고요?”

“부드러운 말투, 존댓말, 온화한 표정, 이런 건 훈련을 통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죠. 저는 그렇게 만들어 낸 포장지로 제 본성을 감싸고 있는 거고요.”

팔짱을 낀 크룩스가 창문 너머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아득한 과거를 들춰 보기라도 하듯 그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야성적이고 멋지네요! 아, 여기서 야성적이라는 건 칭찬하는 말이에요.”

유리아가 밝게 말했다. 다소 맥락 없는 칭찬에 크룩스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러고 보니 유리아는 되게 자연스럽게 여기 같이 있네요.”

“어어…… 저는 들으면 안 돼요? 나가 있을까요?”

“괜찮아요. 제 제자잖아요. 같이 들어요. 들으면서 분위기 우중충해질 것 같으면 환기도 좀 해 주고.”

자이안과는 결이 다르지만, 그 말 역시 유리아를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유리아는 기쁨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배시시 웃었다.

“제가 각성한 건 15살 무렵이었어요. 나이아 누나나 프레이 형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어린 나이였죠. 함정을 깔고, 무리를 이탈한 고블린 한 마리를 유인한 다음 함정에 빠진 고블린을 돌로 쳐죽였어요.”

계획적인 각성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반드시 각성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복수를 하고 싶었어요.”

각성자에 의한 범죄.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일도 아니었다.

당시에는 각국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각성자를 확보하기 위해 일부 죄목에 면책권을 주는 등 혜택을 남발하던 시기였다.

설령 수백 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쾌락살인마라 할지라도 게이트를 몇 번 맡기만 하면 그가 죽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으니까.

“제 부모님이 각성자한테 죽었거든요. 그렇다고 범인이 장난으로 사람을 죽이는 인간 말종까지는 아니고, 사소한 시비가 커져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거긴 한데…… 그렇다고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건 아니잖아요.”

각성자에 의한 살해. 피해자는 중산층 민간인 둘. 캐나다 주 법원은 범인의 편을 들어주었다.

우발적 살해. 쌍방 심신미약 상태. 각성자 면책 조항. 기타 등등.

길거리에서 사람 둘을 맨손으로 패 죽인 각성자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10개월, 마물 재해 강제 동원 240시간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법정을 떠났다.

처음 각성을 하고 자신의 기형적인 능력을 깨달았을 때 크룩스가 느낀 실망감은 필설로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도저히 복수할 수 있으리란 비전이 보이지 않아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으나, 끝내 목숨을 끊지는 못했다. 죽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죽어 버리면 복수를 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무술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낮은 성공률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올리고 싶어서. 죽을 때 죽더라도 그놈만 죽일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일념으로,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배웠죠.”

그 시기 크룩스에게 두 가지 행운이 찾아왔다.

첫 번째는 체내 MP 조작에 대한 압도적인 재능. 이를 기반으로 크룩스는 고작 2년 만에 캐나다 전역에 이름이 알려진 각성자가 되었다.

맨손으로 마물들을 찢어 죽이는 모습 탓에 다른 동료들, 특히 동양권 동료들에게 두려움 반, 존경심 반으로 ‘수라’라고 불렸다.

두 번째 행운은 복수 대상이 그의 생각보다 약하다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2년이 지난 어느 날 복수 대상과 함께 현장에 투입되어, 마물에 의한 공격인 척 어렵지 않게 그를 죽일 수 있었다.

“사람을 죽이고도 뻔뻔하게 돌아다니는 쓰레기가 제 손에 죽는 걸 보고 전율을 느꼈어요.”

복수를 완수한 순간, 크룩스 내면의 무언가가 돌이킬 수 없이 뒤틀렸다.

크룩스는 고국인 캐나다를 떠나 세계 곳곳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검은 수트로 정체를 숨기고, 범죄를 저지른 각성자들을 사냥했다.

“피에 취한 거죠. 상대를 가리기는 했지만, 사실상 쾌락살인마나 크게 다를 바 없는 상태였어요.”

각성자는 하나하나가 마물 재해를 막기 위한 귀중한 인재다.

당연히 각국에 비상이 걸렸다. 워낙 철저하게 정체를 숨긴 탓에 얼마간은 추적을 피할 수 있었지만, 결국 영국의 어느 마을에서 덜미가 잡혔다.

영국 당국은 깊게 고심했다. 각성자를 학살하고 다니는 이상 범인 역시 각성자일 확률이 높다.

어중간한 실력의 각성자는 보내 봤자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크다. 설상가상으로 범인은 범죄를 저지른 각성자만을 사냥한다는 행동 방침 탓에 일부 시민들에게 지지까지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완전무결한 영웅을 보내자.

“나이아 누나가 저를 잡기 위해 찾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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