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9화 평화?(6) (179/210)


179화 평화?(6)
2023.03.31.


“오오~ 요란하게도 하고 있네에.”

저택을 뒤흔드는 요란한 소리에 아르스는 잠시 균열 재현 연구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가 안뜰을 내려다보니, 검은 슈트로 전신을 감싼 크룩스와 자이안이 쉴 새 없이 붙었다 떨어지며 맞부딪치는 모습이 보였다.

한 번 다가붙을 때마다 공기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솔직히 말하면 아르스는 둘 사이에 정확히 몇 번의 공방이 어떤 식으로 오가고 있는지 거의 보지 못했다.

아티팩트의 도움을 받으면 모를까, 맨몸의 아르스의 신체 능력은 그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공방이 오가는지는 몰라도 전세의 흐름을 보는 것만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현재로서는 7:3정도로 자이안이 불리했다.

“크룩스가 아주 작정을 했네에.”

크룩스가 입은 전신 슈트, 그 근간이 되는 한 쌍의 장갑 역시 아르스의 작품이었다.

처음 장갑을 만들 때 얼토당토않은 요구 사항을 듣고 설계도를 만들기 위해 몇 날 며칠 고생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만 봐야지. 괜히 기분만 나빠지게.”

아르스는 어두운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창가에서 벗어났다.

저택의 다른 방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차이점은, 아르스가 침울하게 창가를 떠난 것과는 다르게 느긋하게 웃으며 계속해서 둘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평상시라면 모를까, 전력을 낸 크룩스는 자이안에겐 아무래도 조금 버겁지.’

전투의 양상이 예상대로 흐르는 모습을 지켜보며 프레이는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검사 자이안으로서 상대할 때의 얘기고.’

내심 응원하는 자이안이 크게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프레이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감으로 눈을 빛냈다.

‘네가 누구 아들인지 기억해라, 자이안. 네 엄마가, 나이아가 사람들한테 뭐라고 불렸는지 떠올려 봐.’

그리고 저택의 또 다른 방.

서류가 잔뜩 쌓여 결재를 기다리는 어두침침한 집무실.

“살살 좀 해 이 미친놈들아!”

사정없이 박살 나는 안뜰을 바라보며 절규하는 백작을 뒤로하고, 둘의 싸움은 점점 더 불붙고 있었다.

* * *

쾅! 콰앙!

거친 굉음이 연달아 안뜰을 울렸다.

필사적으로 공격을 막은 자이안이 사력을 다해 거리를 벌렸다. 거력에 맞서기 위해 워해머를 선택한 것이 오산이었을까. 거리를 확보하고 공격을 시도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이대로는 무조건 져.’

크룩스와 자신을 비교하면 당연히 여러 방면에서 뒤처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격차가 두드러지는 것은 지구력이다.

자이안의 지구력은 특출하게 높은 MP 흡수 효율에서 비롯되며, 적이 마물일 때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즉, 적이 마물이 아니면 지구력이 크게 저하되는 것이다.

반면 크룩스는 순수하게 인간을 초월한 체력, 그리고 자이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수준의 내력 운용으로 인한 적은 MP 소모가 지구력의 근간이었다.

자이안과 달리 상대를 가리지 않고 최대한으로 발휘된다.

‘결국 먼저 지치는 건 내 쪽이 될 거야.’

불리한 전세를 인정하는 한편, 자이안의 머릿속은 더없이 냉정 침착했다. 전세를 뒤집기 위해 필요한 게 뭔지, 이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분석했다.

‘한 대 맞아 주는 대신 살을 주고 뼈를 깎으면…….’

너무 위험하다. 크룩스의 주먹은 일격 일격이 자이안의 몸을 통째로 산산조각 낼 수도 있을 만큼 강했다.

모의 훈련실 덕분에 죽지는 않겠지만, 시야 한구석에 반투명하게 표시된 HP가 순식간에 바닥날 것이다.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먼저 적을 분석. 현재 크룩스의 가장 큰 무기는 거대해진 몸집, 거기서 비롯되는 무시무시한 속도와 힘이다.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앞세워, 별다른 기술이나 기교 없이 단순한 공격만으로 자이안을 매섭게 몰아붙이고 있다.

마치 미쳐 날뛰는 맹수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가지게 된 건 알겠다. 아마 온몸을 덮은 검은 슈트 덕분이겠지.

그렇다고 해서 기술이나 기교를 완전히 도외시하는 건 아무래도 크룩스답지 않았다.

자이안이 아는 크룩스라면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오랜 시간 갈고 닦은 정교한 기술에 얹어 더 큰 시너지를 만들어 낼 것이다.

‘날 봐주고 있나?’

순간 떠오른 생각을 자이안은 쓴웃음과 함께 내던졌다. 크룩스가 싸우기 직전 드러낸 기세는 마족을 상대로 공투할 때보다도 더 무시무시했다.

‘그렇게 싸울 수밖에 없는 상태다?’

돌이켜 보면, 크룩스가 장갑을 끼고 그 능력을 활용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분위기가 변했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직후 이어진 거센 공세에 그런 사소한 의문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지만, 어쩌면 거기에 중요한 단서가 있을지도 몰랐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그게 착각이 아니라 진짜였다면. 정말로 성격이 변한 것이고, 그 때문에 단순한 공격만 하게 된 것이라면. 크룩스의 ‘전력’이라는 게 그런 의미라면.

‘이대로는 승산이 없어. 불확실한 요소에 걸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모의전이니까.’

자이안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크룩스의 공격을 피하고 반격을 가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MP를 제어하는 건 예외였다.

자이안은 내력의 흐름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심스럽게 남은 MP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극한까지 집중한 의식이,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만 같은 착각을 초래했다.

감각이 날카로워지고 크룩스의 주먹의 움직임, 그로 인한 거친 풍압과 피어오른 모래 먼지 한 알 한 알까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변수를 만든다.’

그리고 마법이 완성되었다.

‘암석의 구속구.’

크룩스가 발을 디딘 바닥이 쩍 갈라지며 돌무더기가 솟구쳤다. 쇠사슬처럼 연결된 돌무더기가 크룩스의 발목을 묶었다. 크룩스는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다.

움직임을 늦출 수 있었던 건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지만, 초당 수십 번의 공방이 오가는 싸움에서 그 찰나는 치명적인 빈틈이었다.

자이안의 워해머가 크룩스의 측면을 가차 없이 후려쳤다.

“흐으.”

크룩스의 몸이 공중을 쭉 날아 지면을 뒤엎으며 착지했다.

공격을 막은 팔뚝을 문지르며, 그는 신음인지 웃음인지 알기 어려운 짧은 숨소리를 냈다. 그사이 자이안은 스펙트럼을 다시 장검의 모습으로 변형시켰다.

“그렇지! 바로 그거다!”

싸움을 구경하던 프레이가 손뼉을 치며 쾌재를 불렀다.

자이안의 본질은 분명 검사이지만, 그렇다고 쓸 수 있는 다른 수단을 도외시하고 비효율적으로 검만 고집하는 성격은 결코 아니다.

크룩스의 약점을 깨달았으니, 적극적으로 제 능력을 발휘활 것이다.

‘판을 흔드는 건 성공했지만…….’

반면 자이안은 모처럼 반격에 성공하고 거리를 벌렸으면서도 썩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MP 소모가 감당이 안 되겠는데.’

안 그래도 지구력 면에서 뒤처지는데, 여기에 흑마법과 백마법까지 병행하면 더 빨리 지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마냥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조금 전 반격을 통해 본능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크룩스에게 크게 기울었던 승리의 무게추가 평형을 이루게 됐음을. 이제는 사소한 변수에 따라 어느 쪽으로도 기울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그러면 더 크게 흔들어야지. 무게추가 아예 이쪽으로 쓰러져 버리도록.’

자이안은 승리를 위해 필요한 요소를 하나하나 떠올렸다.

‘더 큰 변수. 속전속결. 뒤를 생각하지 말고 전력으로.’

자이안이 칼끝을 크룩스에게 겨눴다. 그 순간 크룩스의 모습이 지워지듯 사라졌다.

이번에도 눈으로 좇을 수 없는 빠른 속도였다. 그러나 사라지기 직전 시선의 방향과 근육의 움직임으로 그 궤적을 예측할 수는 있었다.

평소의 크룩스는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두 번 기만을 섞게 마련이지만, 지금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머리 위!’

인식과 동시에 MP를 끌어올렸다. 머리 위로 반투명한 빛의 십자가가 나타나 크룩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크룩스는 종잇장이라도 찢듯 마법을 깨부쉈지만, 그 짧은 순간에 자이안은 자리에서 벗어났다. 크룩스의 발길질이 애꿎은 지면만 박살 냈다. 커다란 빈틈이었다.

‘번개의 사슬.’

다시 한번 마법을 시전하며, 허리춤의 파우치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프리엔 제국에서 처음 만드는 데 성공하고 이후 꾸준히 개량을 거친 MP 제어 안정화 포션을 단숨에 쭉 들이켰다.

약에 의존하는 건 비겁하지 않냐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어차피 그 약도 자신의 능력으로 직접 만든 것이다.

‘십자가 형틀. 다시 번개의 사슬. 백염의 뱀.’

쉴 새 없이 마법이 몰아치며 크룩스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0.0x초에 불과한 여유였지만 포션까지 마신 지금은 그것만 해도 충분했다. 자이안은 스펙트럼을 쥔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전세를 단번에 뒤엎을 수 있는 강력한 일격.’

자이안이 자부하는 가장 강한 공격은 스펙트럼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한계 이상으로 끌어내 휘두르는 ‘성검'이었다.

그러나 성검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마물이나 마족이 아닌 상대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자이안의 주적은 마물과 마족이니만큼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결함은 결함이었다.

성검의 파괴력이 마물과 마족이 아닌 상대에게도 발휘된다면? 더 나아가, 성검이 공격하는 대상을 자이안이 임의로 선택할 수 있게 됐다면?

이 기술은 바로 그 사소한 발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스펙트럼의 칼날로부터 오로라의 띠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이윽고 오로라가 칼날을 완전히 감싸며 환한 백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자이안의 MP가 스펙트럼의 내부로 침입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실패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시험 삼아 사용해 본 적조차 없는 이론뿐인 기술이지만, 이론은 일단 완벽했다.

자이안이 수십 수백 번 틀린 점이 없나 검토해 봤다. 하지만 막상 시도해 본 적은 없었다. 혹시라도 이론이 틀리면 펜던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걸 아무 대비도 없이 실전에서 바로 사용하게 될 줄이야.’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자이안의 MP는 스펙트럼의 내부에 순조롭게 간섭했다.

성검을 구현하는 성질이 변질되며 칼날을 휘감은 백광이 불안정하게 이지러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빛이 검게 물들었다.

“윽……!”

손아귀가 찢어질 것만 같은 반동에 자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검게 빛난다는 모순된 현상을 견디지 못한 스펙트럼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비명을 지르며 주인을 보채는 것이다. 그러나 자이안은 두 손으로 더욱 세게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엄살 부리지 마.’

이론상으로 스펙트럼은 이 부하를 견딜 수 있다. 약 3초 정도는.

‘조금만 참아.’

성검의 구조에 간섭하느라 의식을 집중한 나머지 크룩스를 견제하는 마법이 느슨해졌다.

자유를 되찾은 크룩스가 성난 황소처럼 거칠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이안은 스펙트럼을 하단 대각선으로 젖혀 들었다.

이름조차 없는 이론뿐인 기술.

‘성검의 구조를 변질시켜 만들어진 검이니까…….’

검을 휘두르는 순간, 자이안의 머릿속에 절묘한 이름이 떠올랐다.

‘마검이라고 부르자.’

검은 파도가 크룩스를 휩쓸었다.

16802632259091.png

16802632259096.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