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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화 평화?(5) (178/210)


178화 평화?(5)
2023.03.30.


크룩스가 둘을 이끌고 향한 곳은 아르스의 연구실이었다.

정확히는, 원래 저택에 준비된 객실 중 하나를 아르스가 멋대로 개조한 방이었다.

언제부턴가 아르스는 자기 방을 연구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호칭이 전염되었다.

아르스와 함께 옛날얘기를 해주려는 모양이다, 하고 자이안은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크룩스는 연구 시간을 빼앗겨 못마땅한 기색인 아르스와 대면하고도 넉살 좋게 웃었다.

“누나, 그거 있죠? 전에 프레이 형이 만들어 달라고 했던 거요.”

“약속도 없이 갑자기 쳐들어와서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니? 내가 걔한테 만들어준 아티팩트가 한둘이어야지.”

“안전하게 대련할 때 필요한 드론이요.”

“모의 훈련실? 지금 안 가지고 있는데에.”

“금방 만들 수 있잖아요?”

제작 특화 각성자인 아르스는 한 번 제작에 성공한 아티팩트라면 언제든 MP 소모만으로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다.

지금까지 그녀가 직접 만들어 낸 아티팩트 중 이 규칙이 통하지 않는 예외는 단둘, 백팩과 펜던트뿐이었다.

예전에 프레이와 신스의 모의전을 위해 이쪽 세계 전용으로 새로 만든 모의 훈련실 역시 언제든 재구현할 수 있었다.

“MP도 아깝고 시간도 아까운데 내가 왜 그런 짓을…….”

“자이안한테 필요해서요.”

“…당연히 해줘야지!”

아르스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연구실 한쪽에 놓여있던 백팩이 복잡한 구동음을 내며 전개되었다.

이윽고 내부에서 스파크가 번뜩이고, 기계장치가 맞물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리고, 자이안으로서는 도저히 감을 잡기 힘든 복잡한 MP의 흐름이 이어진 뒤 백팩의 일부가 열리며 따끈따끈하게 완성된 아티팩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 그런데 이게 지금 왜 자이안한테 필요해?”

크룩스에게 드론을 건네주기 직전 아르스가 위화감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크룩스는 재빨리 드론을 낚아채 쏜살같이 밖으로 향했다.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잘 쓸게요! 자이안, 유리아도 얼른 나와요!”

“네, 네?”

크룩스의 사소한 장난을 눈치 챈 유리아가 짓궂게 웃으며 자이안을 끌고 재빨리 밖으로 나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아르스는 허탈하게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잠깐만요, 크룩스 형. 설마 아르스 님을 속인 겁니까?”

“하하, 그렇게 말하면 제가 너무 나쁜 놈이 된 것 같은데요. 속였다기보단 가볍게 장난을 친 거죠. 실제로 이 드론은 지금 자이안한테 필요한 게 맞아요.”

긴가민가하는 자이안 옆에서 유리아는 응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장난에 손을 빌려줘 아르스를 골탕 먹이기는 했지만, 유리아 역시 크룩스가 거짓말을 해서 자기만 득을 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껏 뛰어다녀도 괜찮은 넓은 공터가 있으면 좋겠는데. 안뜰 정도면 괜찮을까요?”

크룩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앞서 나아갔다. 그 뒤를 따르며, 자이안은 그가 왜 모의 훈련실이 필요하다고 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차, 그 전에…….”

크룩스가 걸음을 멈추고 자이안의 가슴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자기 몸을 내려다본 자이안은 곧 그 의미를 깨달았다.

“전 먼저 안뜰에 가 있을게요. 형한테 가서 펜던트 돌려받고 나오세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이안은 잠시 크룩스와 떨어져 프레이의 방으로 향했다.

“펜던트가 필요하다고?”

프레이의 방은 바로 조금 전에 들른 아르스의 방에 비교하면 더없이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내부에는 발을 디디는 것조차 힘겹게 느껴질 만큼 고농도의 MP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절반은 프레이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나머지 반은 요 며칠간 그가 자이안에게서 빌린 펜던트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어디 싸우러 가냐? 이제 와서 네가 직접 나서야 할 만큼 위험한 게 튀어나올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지, 잠깐만. 흐음…….”

프레이는 말을 흐리며 잠시 눈을 감았다.

방안에 충만한 MP의 힘을 빌려 프레이의 감각이 일순간 강화되었다.

저택을 중심으로 주변 일정 영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안뜰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는 크루스와 그가 들고 있는 아티팩트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오호.”

눈을 뜬 프레이가 자이안을 똑바로 보며 히죽 웃었다.

“벌써 이럴 때가 됐군.”

“삼촌, 뭔가 알고 계십니까?”

“가져가라. 봐주지 말고, 사리지도 말고, 제대로 한 방 먹여주는 거다. 녀석도 그걸 바라고 있으니까.”

자이안의 말에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프레이는 펜던트를 건네주며 그의 어깨를 힘있게 두드렸다. 자이안은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펜던트를 받아들었다.

“아, 왔네. 가볍게 몸 좀 풀고 있어요. 전 그동안 드론을 설치할 테니.”

자이안이 다시 안뜰로 향하자, 유리아와 가벼운 얘기를 나누고 있던 크룩스가 기분 좋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어렴풋한 예감이 들어맞았음을 확신하고, 자이안은 그의 말대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볍게 상태를 점검했다.

그 사이 크룩스는 모의 훈련실을 기동하고 설정을 조작하며 안뜰을 적당히 돌아다녔다.

“괜찮네요. 발밑도 고르고, 장애물도 없고. 적당히 넓고.”

크룩스가 안뜰 중앙에 섰다. 자이안 역시 그의 맞은편으로 다가가 섰다. 유리아가 말없이 물러나 모의 훈련실 영역 밖으로 물러났다.

“왜 안뜰로 오라고 했는지 알고 있나요?”

자이안은 대답 대신 펜던트를 쥐었다. 스펙트럼이 장검으로 변해 그의 손에 쥐어졌다.

“하하. 말할 필요도 없었네.”

크룩스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평소의 사람 좋은 미소와는 전혀 달랐다. 그 표정은 무방비한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포식을 기대하며 엄니를 드러내는 맹수를 연상케 했다.

“저하고 같이 훈련을 한 지 제법 오래됐죠? 거의 1년 전인가?”

크룩스가 겉옷 안주머니에서 밋밋한 검은색 장갑 한 짝을 꺼내 꼈다. 그리고 그대로 겉옷을 모의 훈련실 바깥으로 휙 내던졌다.

그가 주먹을 쥔 두 손을 가볍게 맞부딪히자, 장갑이 그의 피부를 타고 자라나 민소매 아래로 드러난 두 팔을 완전히 뒤덮었다.

다시 두 주먹을 부딪치자, 맞부딪힌 부위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났다.

“제가 왜 1년 전 이후로 자이안과 따로 훈련을 안 한 건지 알아요?”

“그동안 저희가 많이 바쁘긴 했죠.”

“아뇨. 그런 사소한 이유가 아니에요. 시간이 모자라면 휴식 시간을 깎아서 만들어 내면 그만이죠. 제가 그 이후로 훈련을 봐주지 않은 건, 더 이상 자이안을 가르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단계가 아니었던 거죠.”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언제든 검을 휘두를 수 있도록 자세를 잡으며 꿀꺽 침을 삼켰다.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극찬이었으나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목을 조르는 것만 같은 위압감에 금방이라도 호흡이 흐트러질 것만 같았다. 눈앞에 선 장신의 남자가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태산처럼 느껴졌다.

“제가 자이안을 인정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입니다.”

크룩스가 무릎을 살짝 굽혔다.

“걱정 마세요. 죽지는 않을 겁니다.”

다음 순간 그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

복잡한 생각보다도 먼저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언제 위압감에 짓눌렸었냐는 듯, 자이안의 몸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몸을 비틀며 후방으로 검을 휘두르자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손아귀가 찌르르 울렸다. 해일과 맞부딪힌 듯한 거력에 자이안의 몸이 안뜰 바닥에 긴 족적을 남기며 주르륵 물러났다.

꽈르릉! 뒤늦게 폭음이 울리며 크룩스가 움직인 궤적을 따라 안뜰 바닥이 거세게 폭발했다. 음속을 찢어발긴 그의 몸이 열기로 흰 김을 피워올렸다.

“훌륭해요.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요.”

크룩스는 자이안을 추격하는 대신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히죽 웃을 뿐이었다. 자세를 바로잡은 그의 전신에서 점점 더 많은 김이 피어올랐다.

이미 두 팔을 전부 뒤덮은 장갑이 점차 그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이윽고 크룩스의 몸은 머리 일부를 제외하고 모조리 검은색으로 뒤덮였다.

마침내 크룩스의 얼굴마저 검게 물들었다. 이어 그의 몸이 점점 거대해졌다.

온몸을 덮은 검은 슈트 아래로 근육이 선명하게 융기하며 핏줄이 툭툭 도드라지고, 이목구비가 완전히 가려진 안면 위에 검붉은 안광 두 줄기가 피어올랐다.

자이안은 숨을 삼키며 한 가지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악마.

“좀 더 저를 즐겁게 해주세요.”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다음 순간 크룩스가 지면을 깨부수며 날아올랐다.

‘피해야……! 아니, 피하면 안 돼!’

찰나의 순간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적을 쓰러뜨린다’는 목적만 생각하면 피하는 게 효율적이다. 그러나 자이안은 갑작스럽게 시작된 이 모의전의 목적이 그와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크룩스 형이 뭐라고 했지? 그래. 날 인정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

자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굳게 선 채 스펙트럼을 자기 키를 훌쩍 뛰어넘는 거대한 워해머로 변형시켰다.

“하아아아!”

온 힘을 다해 휘두른 순간 저도 모르게 거센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체내의 내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맹렬하게 순환하며 자이안의 전신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공중에서 떨어져 내린 크룩스의 두 주먹이 자이안의 워해머를 내리찍었다.

“흐엑!”

훈련실 바깥에서 지켜보던 유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자세를 낮췄다. 충돌의 여파가 얼마나 거센지, 반응이 늦었으면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그러나 유리아가 하나 오해하는 것이 있었다. 본래 모의 훈련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결코 바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과장이 아니라, 안에서 핵무기에 맞먹는 폭발이 일어나도 훈련실 내부만 쑥대밭이 될 뿐이다.

바꿔 말하면, 조금 전의 충돌이 그보다도 강력하다는 뜻이다.

“끄으으윽……!”

태산을 짊어진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무게에 금방이라도 팔다리가 꺾일 것만 같았다. 튕겨내기는커녕 짓눌리지 않도록 버티는 것조차 버거웠다.

한술 더 떠서, 워해머 위에 두 주먹을 맞대고 있던 크룩스가 한쪽 주먹을 높이 들어 올렸다. 자이안이 흠칫 놀라며 눈을 부릅뜬 그 순간, 콰아아앙!

깔끔하게 정리되었던 안뜰 바닥은 이미 인정사정없이 으깨져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 위로 다시 한번 거대한 힘이 내리꽂혔다. 간신히 버티고 선 자이안을 중심으로 지면이 쩌적 갈라지며 비명을 질렀다.

‘어휴. 큰일 났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리아는 작게 한숨을 터뜨리고 말았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안뜰이 엉망이 돼버렸으니…….’

그러나 유리아의 한숨은 자이안과 크룩스, 둘 중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니었다.

‘백작님이 알면 거품 물고 쓰러지겠네.’

유리아는 홀로 조용히 집주인의 정신건강에 심심한 애도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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