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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화 평화?(4) (177/210)


177화 평화?(4)
2023.03.29.


소아레스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회색 천장과 차가운 철제 침대의 감촉이었다.

“고생 많았어, 소아레스. 잘 버텨주었구나.”

란키리오 교육원. 제국 남부 한적한 마을에 위치한, 연고 없는 고아들을 모아 보살피고 교육하는 장소.

그러나 교육원에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제국을 수호하는 충직한 검을 연단하기 위한 비밀스런 교습소.

몇 년에 한 번 주기로, 교육원장은 고아들 중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소수의 아이들을 선발했다. 선발된 아이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가혹한 훈련을 거친 뒤 황실로 보내졌다.

훈련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모든 훈련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언제든 목숨을 잃을 수 있을 만큼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중에서 훈련을 포기하거나 못 견디고 도망치는 이가 없었던 것은, 단순히 그들이 강인한 정신력을 가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훈련 대상으로 선발된 아이들은 한 가지 특수한 시술을 정기적으로 받는다. 몇 가지 극독과 마약, 약초를 정밀하게 배합한 극약을 혈관에 조금씩 흘려 넣어 감정을 둔하게 만든다.

때문에 훈련이 시작되고 몇 주 정도가 지나면 아이들은 대부분 똑같은 표정을 하게 되었다. 희노애락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가면 같은 무표정이다.

소아레스는 그 안에서도 여러모로 두각을 드러내는 아이였다.

먼저, 훈련 대상으로 선발된 시기가 이례적으로 빨랐다.

보통은 자질과 정신적 성숙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10살 이후의 아이가 선발되지만, 소아레스가 선발되었을 당시에는 고작 8살에 불과했다. 란키리오 교육원장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이 아이를 지금 당장 갈고닦지 않고 내팽개쳐놓는 건 재능에 대한 지독한 모독이야.”

두 번째로, 소아레스는 여러 독극물에 대한 비정상적으로 강한 내성을 타고났다.

이 역시 황실의 근위부로서 축복받은 재능이지만, 문제는 그 선천적인 내성이 ‘시술’에도 적용된다는 점이었다.

소아레스의 시술은 다른 아이들의 그것보다 훨씬 길고 고통스러웠다.

허용량의 몇 배나 더 많은 약을 주입하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소아레스는 뇌가 녹아내리고 정신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 같은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다.

란키리오 교육원장은 소아레스의 시술 과정에 반드시 참관했다.

그녀가 고통을 견디지 못해 단단히 고정된 팔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몸부림치면, 교육원장의 표정도 똑같이 고통으로 물들었다.

간신히 시술이 끝나고 녹초가 된 소아레스가 흐리멍덩하게 눈을 뜨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다가와 조용히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고는 하는 것이다. 고생 많았다고, 잘 버텨주었다고.

“엄마. 나는, 괜찮아요.”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교육원장이, 엄마가 보고 있다면 소아레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았다.

그 어떤 지옥 같은 고통도 괜찮았고, 전날에는 웃으며 장난을 쳤던 고아원 친구의 목덜미에 비수를 꽂아 넣어도 괜찮았다.

훈련에서 살아남은 다른 아이가 괴물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자기를 바라봐도 괜찮았다.

소아레스의 세계는 작았고, 엄마인 교육원장의 지시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소아레스는 어느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의심하지도 않았다.

“미안하구나. 소아레스.”

아주 가끔씩 흐린 눈을 한 교육원장이 그녀를 끌어안으며 사과해도,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미안, 하구나…… 소아레스.”

‘졸업’을 위해 교육원장과 싸우고 그 목에 제 손으로 비수를 꽂아 넣었을 때도, 왜 그녀가 자신에게 사과했는지 알지 못했다.

15살. 소아레스가 교육원장을 죽였을 때의 나이였다.

며칠 동안 교육원이 어수선했고, 그 뒤에 황실에서 다음 교육원장이 파견됐다.

소아레스를 위시해 훈련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아이들은 그와 교대하듯 황실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약물을 통해 감정을 거세시키고, 가혹한 훈련으로 어린아이를 전투 병기로 개조해 황실로 보내는 시설. 소아레스가 유년기를 지낸 교육원의 정체였다.

지독히도 비인도적인 시설이었다. 감정이 제거되고 철저하게 세뇌에 가까운 정신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시설의 방침을 전혀 의심하지 않게 된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조금…… 비효율적인 것 같은데.’

교육원의 실체를 알았을 때 소아레스가 품은 생각은 그것이었다.

전근대적이고, 비효율적인 방식이다. 물밑에서 제국을 떠받치는 첩보원을 육성하는 시설이니만큼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는 것까지는 당연한 일이지만, 인재를 육성하는 방식이 너무 무식했다.

‘황실의 뜻이 그렇다면, 따라야지.’

그러나 소아레스 역시 이미 한 자루 비수로 완벽하게 완성된 상태였다. 의문은 가졌으나, 의심은 품지 않았다.

란키리오 교육원뿐만 아니라 제국 곳곳에 비슷한 역할을 하는 시설이 여럿 있었다.

각각의 교육원에는 다른 이름이 있었고, 졸업생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성과를 낸 한 명만이 그 이름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황실에 도착한 뒤, 소아레스의 이름은 소아레스 란키리오가 되었다.

“소아레스 란키리오. 내일부터 제5 황자 전하의 근위를 맡는다. 소속은 근위부다. 이상.”

그리고 그날, 소아레스는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만남을 맞이했다.

* * *

“근위부는 황실에 존재하는 여러 첩보부 중에서도 가장 이름 높은 조직입니다. 첩보원들이 당당히 얼굴을 드러내며 양지에서 활동하는 것이 허락되는 유일한 조직이기도 하지요. 파격적인 인사였습니다.”

그 인사에는 당사자인 클라비수스 황제의 입김이 강하게 닿아 있었다.

“제가 발령 대기 중일 때 얼핏 제 모습을 봤다고 하시더군요. 한눈에 보고 마음에 드셨다고 후일 고백하셨습니다.”

“얼핏 본 것만으로 소아레스의 능력을 꿰뚫어 본 건가요? 역시 대단한 통찰력이네요.”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외모가 취향이라고 하시더군요.”

“…….”

자이안은 숙연하게 입을 다물었다. 당시 클라비수스는 치기 어린 10대 소년이었다.

“애석하게도 당시 저는 시술의 영향으로 감정이 크게 무뎌진 상태였습니다. 폐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당신을 기쁘게 할 수는 없었지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소아레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때를 떠올렸다. 10년이 훌쩍 넘게 지난 과거였지만 아직도 그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뭐?! 시술? 감정을 거세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야!

당시에는 왜 그가 그렇게 길길이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알았다. 그는 그런 식으로 소모품처럼 쓰이는 아이들을 안타깝게 여긴 것이다.

“알고 계시겠지만 그때는 나쟈가 황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광기에 취하고 누군가 내다 버린 도덕이 발길에 차이곤 했지요. 오직 한 분, 폐하께서만이 온전히 인간성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클라비수스는 클라본 차를 즐겨 마셨다.

그를 곁에서 보필하게 된 소아레스도 자연히 클라본 차를 마실 기회가 늘었다. 그것이 광기의 소굴 속에서 그들이 온전히 정신을 유지하는 데 적잖이 공헌했다 할 수 있으리라.

“폐하께선 무의미하게 희생자가 발생하는 첩보부 선발 방식을 뜯어고치고 싶어 하셨고, 저 역시 그 방식을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목적을 위해 합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요.”

소아레스는 적극적으로 실적을 쌓으며 두각을 드러냈다.

때때로 내부의 적을 향해 칼날을 들이미는 것도 거리끼지 않았다. 여기에 클라비수스의 황자로서의 발언권이 더해졌다.

소아레스는 이례적으로 이른 시기에 근위부장이라는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고, 클라비수스와 함께 비효율적인 첩보원 선발 방식을 개선했다.

“과거가 후회되진 않나요?”

기분 좋게 얘기를 마친 소아레스에게 자이안의 질문은 다소 뜻밖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고, 그가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전혀요. 어렸을 적의 경험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클라비수스의 곁에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보고, 클라본 허브의 해독작용, 거기에 선천적인 독물 내성까지 더해져 소아레스는 천천히 감정을 되찾았다.

어렸을 적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몇몇 것들이, 특히 교육원장의 행동이 감정적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과거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끔찍하다고 여길 과거였지만, 지금의 소아레스라는 인간의 근간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폐하의 비수로서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자이안 님. 그 과거가 없었더라면 저는 지금 이렇게 당신의 앞에서 기분 좋게 옛날을 떠올리며 얘기를 들려주고 있을 수는 없었겠지요. 제가 지금껏 걸어온 모든 족적을 저는 조금도 후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당당하게 얘기하는 소아레스를 보며, 자이안은 작은 감동에 젖었다. 존경스러운 삶의 자세였다.

“자이안 님과 마찬가지로요.”

“네? 저요?”

“자이안 님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지만, 원망도 후회도 하지 않고 있지요. 그저 자신의 일부로서 받아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생각지 못한 지적에 자이안은 잠시 말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하는 생각이 반, 자신 같은 게 소아레스와 비교되는 건 부끄럽다는 생각이 반이었다.

“이거 표정 보니까 또 이상한 생각 하고 있네.”

“이, 이상한 생각이라뇨.”

“자긴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닌데, 뭐 그런 생각 하는 표정인데? 내기할래?”

정곡을 찔린 자이안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유리아가 짓궂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우리 자이안, 자기 비하하는 버릇은 언제쯤 고쳐질까?”

“겸손도 미덕의 일종이지 않습니까.”

“얜 그게 너무 심해서 탈이고.”

“저희가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지탱해주면 그만이지요.”

두 쌍의 눈이 따스하게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자이안은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한 번 들어보니까 어때?”

이후 소아레스와 가벼운 얘기를 나누며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밖으로 나온 자이안에게 유리아가 물었다. 자이안은 잠시 멈칫했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괜히 캐묻는 거 아닌가, 기분 나빠하면 어쩌나 하는 근거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그러나 거리낌 없이 과거를 말해주며 보여준 소아레스의 깊은 신뢰가 자이안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유리아는 저한테 할 얘기 없어요?”

“엥? 나? 어어…….”

아까 한 방 먹었으니 이제 되돌려줄 차례였다. 유리아는 턱을 매만지며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남한테 말하기 부끄러운 과거라면 남았는데…… 꼬, 꼭 듣고 싶어?”

“아하하. 농담이에요. 하기 싫은 거면 억지로 할 필요 없어요.”

“어휴. 이게 이젠 누나를 놀릴 줄도 아네.”

유리아가 자이안보다 연상이기는 하지만 누나라는 말을 자주 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누나라는 단어를 꺼냈다는 건 자이안의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들였다는 표시였다.

“오늘도 사이좋아 보이네요.”

가볍게 장난을 주고받는 둘 사이에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크룩스가 사람 좋게 웃으며 복도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옛날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그가 벽에서 등을 떼고는 가볍게 몸을 풀며 말했다.

“어때요? 저희들 얘기 관심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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