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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화 평화?(3) (176/210)


176화 평화?(3)
2023.03.28.


“으윽. 눈알 빠지겠네.”

퀴나스는 눈가를 문지르며 허리를 쭉 폈다. 몇 시간 동안 똑같은 자세로 있었더니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퀴나스.”

맞은편 책상에서 퀴나스가 검토해야 할 보고서를 종류별로 분류하던 성녀가 고개를 들었다. 엄한 눈빛이 말없이 퀴나스를 나무랐다. 퀴나스는 찔끔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누, 눈이 너무 피로하네.”

바르고 고운 말은 성녀에게 있어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그렇다고 귀족적인 미사여구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 성녀는 더 나무라지 않고 그 정도에서 넘어가기로 했다.

“고생 많았어요. 30분만 쉬죠.”

“와! 성녀님이 최고야!”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생각인가요? 지금 성녀는 제가 아니라 당신이랍니다, 퀴나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제가 성녀라는 자각은 별로 없는걸요. 아마 죽을 때까지 적응 못 할걸요?”

잘못한 기색도 없이 당당한 그 말에 성녀는 속으로만 한숨을 삼켰다. 철이 덜 든 여동생을 보살피는 기분이다. 그런 관계가 나쁜 건 아니지만, 가끔씩 불안했다.

‘내가 없으면 안 되겠네.’

관계를 바꾸려 노력한 적도 있었지만, 1년이 넘도록 고쳐지지 않으면 평생 고쳐지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둘이 나이 차가 크지 않다는 사실이 작은 위안이었다. 차기 성녀가 선정되고 퀴나스가 은퇴할 때까지도 문제없이 그녀를 보좌할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퀴나스가 이런 식으로 격식 없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개인적으로 친한 극히 일부에게만 한정되었다.

성녀와 자아가 싹튼 성유물, 그리고 몇 달 전 성국을 방문한 자이안 일행 정도였다. 그 외의 상대에게는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했다.

“오늘도 정시 퇴근은 글렀네.”

차를 우려온 퀴나스가 다시 책상 앞에 앉으며 힘없이 푸념을 뱉었다. 몇 시간 동안 매달리며 서류를 확인하고 직인을 찌어댔지만, 남은 서류가 처리한 양보다 훨씬 많았다.

평소에도 일이 많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트레저 헌터를 우대하는 정책이 과도기를 거쳐 자리를 잡으며 슬슬 여유가 생기던 차였는데, 최근 몇 주 동안 폭발적으로 일이 늘어났다.

원인은 마물이었다. 그동안 성국 전역에 들끓던 마물의 움지임이 갑자기 잠잠해진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좋은 일이다. 마물이 잠잠해지면 그만큼 백성들이 덜 고통받게 되니까.

그러나 성국의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게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성국 내에서 트레저 헌터와 마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트레저 헌터들이 성국에서 우대를 받는 건 유사시에 목숨을 걸고 마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는 자경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물이 잠잠해지면? 그들의 입장이 붕 떠버린다.

게다가 마물의 시체는 여러 분야에 다용도로 쓸 수 있는 가공 소재이기도 했다. 마물의 수가 적어져 소재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면 이에 의존하고 있는 내수 경제가 불안해진다.

섣불리 판단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단기적으로도 문제가 불거질 조짐이 보였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장기적으로도 나라를 휘청이게 만드는 장애물이 될 것이다.

지금 둘의 앞에 잔뜩 쌓여 있는 서류는 바로 그런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할 요소가 아주 많았다.

우선 마물의 움직임이 잠잠해진 게 일시적인 건지 아니면 영구적인 건지 파악해야 했다.

그다음에는 갑자기 마물들이 잠잠해진 원인을 알아야 했고.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에 따라 이후의 대응이 달라진다.

만약 영구적인 거라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기 전에 한발 앞서 정책을 뜯어고쳐야 한다.

“자, 이제 다시 일을 해보죠.”

“벌써요?! 아직 10분밖에 안 지난 것 같은데.”

“아뇨. 정확히 30분 지났어요. 설마 제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죠, 퀴나스?”

“그럴 리가요!”

두 여성이 다시 책상 앞에 달라붙었다. 마물의 위협이 잠잠해진 건 분명 환영할 일이건만, 국정 운영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성녀의 집무실은 그날도 밤새도록 불이 꺼질 줄을 몰랐다.

* * *

성국과는 달리 잠잠해진 마물의 위협을 순수하게 반가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도 있었다.

‘덕분에 병력에 여유가 생겼어.’

한때 열강으로 이름 높았던 프리엔 제국. 그러나 마족에 의한 수탈이 남긴 깊은 상처는 그 저력으로도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가장 큰 걸림돌은 부족해진 행정력이었다.

프리엔 제국은 대륙 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다. 반면 그 체제는 지극히 중앙집권적이다.

중앙 대로를 중심으로 영토 전역에 혈관처럼 퍼진 도로.

이를 기반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보고 체계.

충분한 인력. 그리고 물리적인 거리를 획기적으로 줄여 주는, 보석탑에서 들여온 통신 마도구.

이런 요소들이 절묘하게 엮이며 제국의 체제를 견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음욕의 폭정이 바로 그 체제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제국 말단은 고사하고 중앙에서 가까운 곳조차도 제대로 된 관리가 미치지 않았다.

한술 더 떠서 음욕이 죽은 뒤에도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남은 마물들이 2차 피해를 만들어냈다.

즉위한 뒤로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클라비수스 황제는 부족한 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해 조금이라도 더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 노력이 후대에 어찌 평가될지 지금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황제는 현상에 만족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마물의 위협이 조금만 더 심해졌더라면. 아니, 더 심해질 필요도 없이 기존과 같은 수준이 한두 달만 더 유지됐더라면. 제국은 제 덩치를 지탱할 힘을 잃고 천천히 말라비틀어졌으리라.

하늘이 도왔다고밖에 할 수가 없는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신이 제국을 보살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이안.’

그러나 황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마물의 위협이 잠잠해진 것은 제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다소 손실이 있기는 했지만, 한때 소아레스를 중심으로 제국의 첩보를 책임졌던 근위부는 아직 건실했다.

서대륙 전역에 흩어진 그들의 결과는 한결같았다. 어느 특정한 시기를 기점으로 서대륙 전체에서 마물의 위협이 급감했다.

‘이것이 네가 이룬 결과냐?’

아무런 근거도 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묘한 확신에 사로잡혔다.

그의 친우가, 기꺼이 믿고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전우가 마침내 오랜 여정의 끝에 다다른 것이라고.

* * *

느긋하게 시간이 흘렀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균열에 대한 연구는 지지부진했다. 자이안 일행 모두가 동시에 달라붙어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사실, 지구에서도 게이트에 대해서 뭘 제대로 알고 있었던 건 아니니까아.”

불이 붙는 정확한 화학적 원리를 몰라도 인간은 불을 피울 수 있다.

지구에서 나이아가 마계로 건너갈 수 있었던 것도 비슷했다. 인류는 차원과 균열, 게이트 등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연구해도 알아낼 수 있는 건 겉핥기에 불과했다.

‘이대로 아무 성과도 없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연구를 도우면서도, 프레이는 마음 한편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연구를 게을리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 역시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제대로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균열이 다시 열릴 가능성은 극히 적어. 아니, 사실상 0이나 다름없지.’

만약 다시 열린다 치더라도, 가까운 시기는 아닐 것이다. 빨라야 수백 년 뒤, 늦으면 수천 년 뒤. 프레이가 나름대로 마안을 통해 파악한 정보였다.

자이안의 세계는 이미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고 평화는 자이안이 수명이 다해 죽은 뒤에도 오래도록 유지될 것이다.

‘그럼 거기서 만족하면 되잖아?’

마계로 건너가 찬탈자를 죽이고 원흉을 완전히 뿌리 뽑는다. 의도는 좋았다.

그러나 솔직히 과한 오지랖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자이안의 오지랖에 휘둘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이미 많이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위험한 일 없이 평온하게 살기를 바랐다.

‘이미 충분히 고생했어. 이제 보상을 받을 때가 된 거지.’

프레이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일까.

처음에는 하루빨리 마계로 건너가야 한다며 초조해하던 자이안도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았다.

마계로 건너가는 걸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강박적으로 그에 매달리지는 않게 되었다.

그 대신 자이안은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유리아와 소아레스, 케이. 여행을 거치며 함께하게 된 동료들. 그리고 프레이와 아르스, 크룩스와 유민. 나이아라는 이름의 인연에 엮여 함께하게 된 훌륭한 스승이자 제2의 가족들.

파란만장한 여정을 함께하며 그들과 말 한마디 없이 눈빛만으로 의사를 나눌 수 있을 만큼 끈끈하게 이어졌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 반면,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유리아, 케이 정도만 어느 정도 과거를 알고 있었다. 소아레스, 그리고 네 각성자의 과거는 아는 것이 없다시피 했다.

‘내가 그동안 동료들에게 너무 무심했던 게 아닐까?’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당장 급한 일이 없어지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나니 자이안 특유의 오지랖이 이상한 방향으로 발휘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동료들의 인생을 캐물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과거는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흉터다. 그런 이들은 고통스러운 과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또다시 상처를 입고 만다.

자이안의 과거가 좋은 예다. 물론 자이안 본인은 과거의 아픔을 모두 정리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저 옛 기억이 되었을 뿐이지만, 모두가 그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듣고 싶은데.’

자이안은 호기심과 배려 사이에서 혼자 고민하다가 결국 답이 없음을 깨달았다.

허심탄회하게 의논할 상대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프레이를 떠올렸으나, 곧 더 적절한 상대를 찾을 수 있었다. 이미 서로 어지간한 건 다 알고 있는 유리아였다.

“글쎄. 그냥 가서 대뜸 물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너무 무례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적절한 의논 상대라고 생각한 건 자신만의 착각이 아니었을까. 자이안은 태평한 유리아의 대답을 들으며 조금 불안해졌다.

“자이안. 우리가 너랑 얼마나 오래 지냈다고 생각해?”

“1년 반 정도?”

“그래. 1년 반. 그동안 네 옆에 딱 붙어서 네 옛날얘기도 다 들었고, 네가 어떤 성격인지도 다 알고 있다구. 이제 와서 네가 대뜸 찾아가 옛날얘기 좀 들려달라고 해서 기분 나빠할 사람이 있을까?”

자이안은 대답을 아꼈다.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갑자기 찾아가서 캐묻듯 물어보면 기분 나빠지지 않을까?

“어휴.”

혼자 고민하는 자이안을 보다 못한 유리아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내가 같이 가 줄게.”

“예?”

“우선 소아레스한테 가자! 소아레스는 네가 뭘 물어봐도 기뻐하면서 다 대답해 줄 거야, 분명.”

어어, 하는 사이 자이안은 유리아와 함께 소아레스의 앞에 서게 됐다. 점심도 지난 한가한 시간인지라 그녀는 저택 하인들의 일을 도우며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제 과거가 궁금하시다고요?”

소아레스는 뜻밖이라는 듯 말했다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자이안 님께서 바라신다면, 얼마든지.”

기분 좋게 대답하며, 소아레스는 빛바랜 기억들을 천천히 들춰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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