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평화?(2)
(175/210)
175화 평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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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화 평화?(2)
2023.03.27.
바란드에게 그의 형 자이안 알레프는 조금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5년 전. 미오네를 ‘어머님’이 아닌 ‘엄마’라고 불렀던 아주 어린 시절.
“결국 백작님께선 도련님을 아주 내치시기로 작정하신 건가?”
“그깟 병이 뭐라고…… 에휴, 도련님만 불쌍하게 됐어.”
“마님께서 그리 허망하게 떠나셨던 걸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
자이안은 주위 사람들에게 동정받는 존재였다. 동시에 꺼려지는 존재이기도 했다. 하인들은 자이안에 대해 얘기할 때면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췄다.
바란드가 그의 형을 처음 만난 건 어느 새벽, 기사단 연병장에서였다. 우연, 그리고 작은 호기심이 겹쳐 일어난 일이었다.
앳된 티가 도드라지는 소년이 체격에 비해 길고 무거워 보이는 연습용 철검을 들고 있었다.
연병장에 서 있었지만 기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신기하게도 새벽녘 일찍 잠이 깨 혼자서 저택을 탐험하고 있던 바란드는 호기심에 몰래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년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당시 바란드는 아직 검술을 배우기 전이었다.
그래서 소년의 검술이 어느 정도의 경지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바란드의 어린 눈에도 군더더기 없는 그 동작이 퍽 멋지게 보였다.
갑자기 소년이 검을 놓치고 고꾸라지기 전까지는.
“커흑!”
소년의 움직임이 급격하게 흐트러졌다.
조금 전까지의 깔끔한 검술이 거짓말이었던 것 같았다.
소년은 볼썽사납게 발이 꼬여 자리에 쓰러졌다가, 이내 입술을 깨물며 일어났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팔로 철검을 들어 올리다가, 재차 놓치고는 결국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아깝다.’
멋진 검술을 더 보고 싶었지만, 소년은 슬픈 얼굴로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지금껏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배다른 형이라는 걸 바란드는 그로부터 얼마 뒤에 알았다.
그 뒤로 바란드는 며칠에 한 번꼴로 새벽 일찍 일어나 연병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자이안은 바란드가 연병장을 찾을 때마다 항상 있었다. 하는 행동도 똑같았다. 멋지게 검을 휘두르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어린 바란드가 보기에도 그 모습은 굉장히 이상했다. 바란드의 마음속에서 그의 형은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세월이 지나 바란드도 예법과 교양, 학문과 검술 등을 공부할 때가 되었다.
3년 전, 바란드가 5살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미오네를 ‘엄마’가 아니라 ‘어머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바란드의 자이안 관찰은 그때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몰래 지켜보는 걸 넘어 짧게나마 그와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바란드와 얘기를 나눌 때면 자이안은 때때로 우는 것도, 웃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했다. 바란드에게 있어 자이안은 여전히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 인식이 바뀌게 된 건 바란드의 교육이 시작되고 두어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날 새벽, 바란드는 기분이 크게 가라앉아 있었다. 전날 있었던 교육에서 교사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바란드의 잘못은 아니었다. 교사의 질문은 당시의 바란드가 대답하기엔 어려운 내용이었다. 바란드가 어린아이답지 않게 수업을 잘 따라오자 저도 모르게 신이 나고 만 것이다.
바란드의 얼굴이 초조와 불안으로 일그러지자 교사는 금세 자기 잘못을 깨닫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곁에서 수업을 지켜본 미오네도 그를 나무라기는커녕 상냥하게 칭찬했다. 그러나 바란드는 자신의 능력이 벽에 부딪혔다는 사실 자체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형님께서는…….”
“응?”
어린 마음에, 바란드는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 가슴에 자리 잡은 울분을 아무런 잘못 없는 자이안에게 해소하려 한 것이다.
“형님께서는 왜 그렇게 집요하게 검을 잡으시는 건가요? 그런다고 병을 극복하지는 못할 텐데.”
자이안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나 바란드의 표정을 보고, 그는 곧 작은 한숨을 내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거센 폭언이었으나, 정작 바란드의 얼굴에서는 그에 대한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과 슬픔이면 모를까.
“무슨 일 있었니? 괜찮으면 한 번 얘기해줄래?”
바란드는 망설였고, 자이안은 그를 부드럽게 설득했다. 상냥한 말이 마음속에 얹힌 응어리를 녹였다. 바란드는 전날 있었던 일을 띄엄띄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당시 자이안의 처지를 생각하면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자이안이 바라마지않는 그 자리에 바란드가 앉아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자이안은 조금도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바란드. 실패는 끝이 아니란다.”
그저 조심스럽게, 처음으로 실패를 겪고 불안해진 동생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 주었다.
“내가 왜 계속해서 검을 잡고 있냐고 물었지? 언젠가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 거라고 믿기 때문이야.”
“기회?”
“그래. 병을 극복하고, 능력을 선보이고, 다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 실패라는 건 말이지, 바란드. 그때를 위해 조금씩 바닥을 다지는 과정이란다. 예를 들면, 그래. 어제 대답하지 못했던 질문 말인데, 지금은 어떠니?”
“지금은 대답할 수 있어요. 어제 제가 대답하지 못하자 어머님과 선생님께서 알려주셨어요.”
“바로 그거야. 그렇게 실패를 통해서 배우며, 차근차근 바닥을 다지는 거야.”
“하지만 형님. 그 기회가 언제 올지는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아무도 알 수 없어. 바로 내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한참 먼 미래가 될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그 순간에 후회하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실패를 쌓아 올려야겠지?”
길지 않은 그 문답은 바란드에게 작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리고 자이안은 바란드에게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존경스러운 형님이 되었다.
바란드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의욕적으로 교육에 임했다.
많은 실패를 쌓으며 하나둘 배울 때마다, 그의 형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알게 되었다.
병으로 인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이안의 무술이나 학술적 식견 등은 바란드와 비교할 수도 없는 높은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그러나 깊어지는 존경심과는 반대로 그를 직접 볼 수 있는 날은 점점 줄어들었다.
바란드의 일과가 새벽 일찍 일어나 느긋하게 연병장에서 시간을 보낼 수가 없을 정도로 빡빡해졌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바란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이안을 자주 보지 못해 아쉽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자이안이 병이 악화되어 멀리 요양을 떠났다는 사실을 바란드는 한발 늦게 알게 되고 말았다.
“더 이상 저택에서 생활할 수 없을 정도로 병이 악화되었단 말씀이신가요?”
자이안을 태운 마차는 바란드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조용하게 떠났다. 그것이 미오네가 의도한 일이었음을 바란드는 알지 못했다.
“그렇단다, 바란드. 안타깝게도.”
미오네의 목소리는 일견 슬픔에 잠겨 있었다.
아직 어린 바란드는 그 이면에 가려진 진의를 눈치채지 못했다.
바란드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자이안이 보여준 능력과 성품을 조금이라도 닮으려 노력하며 더욱 성실히 스스로를 갈고닦았다.
* * *
바란드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건 자이안이 2년 만에 저택으로 돌아온 뒤였다.
‘그렇게나 상냥하신 어머니께서 그럴 리가 없는데?’
가장 처음 바란드가 떠올린 생각은 부정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바란드는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냉철한 이성으로 진실을 가릴 수 있을 만큼 총명했다.
‘어머니께서 그런 짓을 하신 건 나 때문이야!’
자이안이 죽으면 가문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게 누구일까? 후계가 확정되는 바란드다. 미오네는 아들의 앞길을 위해 지난 10년 가까이 자이안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형님께서는 대체 어떤 기분으로…….’
죄책감 때문에 바란드는 자이안 앞에 서 있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현실을 받아들이고 슬픔을 채 가라앉히기도 전에, 여러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수백 년간 뚫린 적 없는 제1 저지선이 무너지고, 왕도에서 찾아온 귀족이 백작을 모함해 실각시키려 했다.
곁에 자이안이 없었더라면, 그가 과거와 다를 바 없는 태도로 바란드를 대해 주지 않았더라면 진작 포기하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어. 나라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돼.’
바란드는 슬픔을 딛고 일어서서 제 나름대로 할 일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난민들을 도우며 몸은 힘들지만 보람을 느꼈다.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또 다른 비극을 가져왔다.
“어머님? 어, 어머님…… 왜, 왜 이러고 계세요…….”
미오네가 죽었다. 목숨을 바쳐 마족을 쓰러뜨리고 평화를 가져왔다.
뒤의 사실은 바란드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견딜 수 없는 비극에 갈기갈기 찢어져 버린 마음은 말을 듣지 않았다.
‘형님께서! 형님께서 함께 계셨으면서!’
원망이 걷잡을 수 없이 들끓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바란드는 등골이 차게 식는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무서운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이대로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라, 언젠가 자신을 모조리 집어삼키고 정체불명의 괴물이 될 것만 같았다.
바란드는 방에 틀어박혔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어. 형님도. 나도. 아버님도. ……어머님도.’
미오네는 스스로의 발로 전장으로 나가, 스스로의 의지로 목숨을 바쳤다. 그리고 훌륭하게 평화를 가져왔다. 거기에 잘잘못을 따져서는 안 된다.
맑은 물에 떨어진 먹물 한 방울이 천천히 퍼지는 것처럼, 바란드는 천천히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상냥한 손길. 부드러운 목소리. 때때로 엄하게 꾸짖는 표정. 그러고는 금세 바란드를 안고는 말이 심했다며,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그 모습.
추억들이, 바란드도 잊고 있었던 수많은 기억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넘쳤다.
한 달가량의 시간 동안 바란드는 사진첩을 정리하듯 기억들을 천천히 차곡차곡 정리했다.
기억 하나를 정리할 때마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신기하게도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방을 나선 바란드가 홀린 듯이 안뜰로 향해 목검을 쥔 날. 복마전 수색을 마친 자이안이 한가함을 주체하지 못해 바란드를 찾아왔다.
“하하.”
스스로가 뱉은 마른 웃음에 바란드는 흠칫 놀랐다. 그릇된 감정은 모두 정리해 잠잠해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한가하시다면, 한 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까요?”
바란드는 자기 감정을 제어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가슴 속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을 토해내고 싶었다. 어디에든 좋으니 후련하게 맞부딪치고 싶었다. 그래서 쏟아낼 만큼 모두 쏟아낸 다음 편해지고 싶었다.
“엄마…… 엄마아……! 흐아아앙……!”
그날, 바란드는 한 달간 눌러 참은 눈물을 마침내 쏟아냈다.
그 이후.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그래요.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복도에서 마주친 바란드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하인은 고개를 든 순간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말투도 표정도 이전과 다르지 않은 바란드의 모습이지만, 단 하나가 달랐다. 호수처럼 맑고, 깊게 가라앉은 눈빛이었다.
‘아직 열 살도 안 되시는 분께서, 어찌 저런 눈을.’
하인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가, 바란드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나 한 번 마주친 뇌리에 깊게 각인된 그 눈빛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변한 것은 눈빛만이 아니었다.
“선생님. 지금 말씀하신 예시를 이 문제에 대입하는 건 비효율적인 것 같습니다.”
“예, 예?”
“어제 제 나름대로 예습을 하며 말씀하신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습니다. 먼저 문제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살피면…….”
본래 바란드는 상대가 누구든 정중하고 배려를 잊지 않는 성격이었다.
바꿔 말하면, 자기주장을 그다지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상대가 명백하게 틀린 논리를 가져오지 않는 한 바란드는 어디까지나 상대의 말을 존중하고, 그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조금 더 거침없어지고, 제 의사를 직설적으로 드러내게 되었다.
어린아이는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크게 자란다.
바란드 역시 허물을 벗고 성장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