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평화?(1)
(174/210)
174화 평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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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평화?(1)
2023.03.26.
대륙 서쪽 끝. 한때 복마전이라고 불린 땅이 있었다.
작물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메마른 황야.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무시무시한 마물뿐.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접근을 거부하는 듯한, 현세에 강림한 지옥 그 자체였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그렇게 불리기도 했었다는 소리다.
“후우.”
자이안은 긴 숨을 뱉으며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일전에 여러 번 정찰을 했던 프레이의 말대로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넓은 땅이었지만, 그래도 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땅 전체를 샅샅이 뒤지는 데 걸린 시간은 약 한 달.
체감상 땅의 총넓이는 프리엔 제국과 비슷한 수준. 하늘을 날아서 훑어보기만 한다면 사실 그렇게까지 오래 걸릴 넓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황야라고 해서 정말 평평하게 넓은 땅만 쭉 펼쳐져 있는 것은 아니다. 언덕도 있고, 얕긴 하지만 계곡 비슷한 지형도 있었으며 움푹 파인 분지나 동굴도 있었다.
그냥 훑어보기만 해서는 못 보고 지나치기 쉬운 지형들을 꼼꼼히 살피며 숨어있는 마물이 없나 수색하다 보니 시간이 제법 걸렸다.
당장 처리하지 않으면 세상이 망할 정도로 급한 일은 아니다 보니 중간중간 적절히 휴식을 끼워 넣은 것도 영향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별다른 단서는 없었네.”
반가운 목소리에 자이안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보았다. 유리아가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단검을 묘기를 하듯 빙글빙글 돌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주된 목적은 마물의 잔당을 섬멸하는 것이었지만, 복마전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발견을 했다. 선주 인류의 문명으로 보이는 유적을 발견한 것이다.
“아마도 이 땅이 선주 인류가 여기를 떠날 때 사용했다는 차원 항행 함선의 발착장인 것 같네요.”
크룩스의 추론은 그럴듯했다. 그 말을 들은 일행은 거의 동시에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차원 장벽을 뚫고 여행하는 함선의 발착장이라. 어쩌면 차원을 넘는 수단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희망적인 관측으로 수색을 시작했지만, 애석하게도 복마전 전체를 샅샅이 뒤질 때까지 별다른 단서를 찾을 수는 없었다. 선주 문명의 희귀 금속을 마음껏 채취한 아르스 혼자만 희희낙락이었다.
“걱정하지 마. 어떻게든 될 거야.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얼마나 기분이 좋으면 아르스는 말끝을 늘이는 특유의 말투조차 안 쓰고 호언장담하며 가슴을 두드렸다.
마냥 근거 없는 허세는 아니었다.
실제로 아르스는 과거 나이아가 마계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해준 아티팩트인 펜던트의 핵심 개발자였으니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자금을 무한정 지원해주는 기업체와 정부도 없고, 같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할 학자들도 없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펜던트 자체가 본인 입으로 똑같은 공정을 반복해도 다시 만들 자신이 없다고 실토할 만큼 천문학적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기적의 산물이었다.
“정말 자신 있는 거 맞죠, 아르스 님?”
“아하하하. 한 번 해봤는데 두 번이라고 못 하겠니?”
솔직히 그다지 미덥지 못했지만 지금은 수가 없었다. 말은 가볍지만, 적어도 아티팩트에 대해서는 언제나 진심인 사람이니까. 그저 믿고 맡기는 수밖에.
“균열이라도 남은 게 있으면 연구를 좀 해보련만.”
자이안의 세계에 남아있는 균열은 지구의 게이트와는 크게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게이트와는 달리 쉽게 열리지 않으며, 그만큼 쉽게 닫히지도 않는다.
지구의 게이트는 특정 규모의 게이트에서는 특정 급수의 마물만 등장하는 등 정형화된 규칙이 존재하지만, 균열은 그런 규칙이 없다. 사실 공통점이라고는 일방통행이라는 것 하나 정도였다.
지구 측 각성자들 입장에서도 처음부터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세계수의 숲에서 머물 때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고, 복마전에는 남아있는 균열이 없었다. 아무래도 분노와 탐욕이 목숨을 잃으면서 균열도 같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이게 죽상을 할 일은 아니죠. 생각해보세요. 복마전의 균열이 모두 닫혔다는 건, 진짜 작고 자잘한 균열들 말고는 여기 세계의 균열이 전부 닫혔다는 뜻이잖아요?”
“그러고 보니…….”
크룩스의 말에 자이안은 헉 하고 깨달았다. 찬탈자를 죽이기 위해 마계로 넘어갈 방법에 대해서만 생각하다 보니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모든 균열이 닫혔다.
그 말은, 앞으로 대륙이 마물에 의해 고통 받을 일이 없어진다는 뜻이었다.
* * *
“그…… 그럼 이제 뭘 하죠?”
“하긴 뭘 해? 아르스가 결과 만들어 올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푹 쉬어. 그동안 고생 많이 했잖냐.”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푹…….”
자이안에게 어려운 숙제가 내려졌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푹 쉬기였다. 세계수의 숲에서 머물 때도 생각한 거지만 푹 쉬는 것도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아닌가? 나만 이상한 건가?’
저택 지붕에 늘어지게 누워 일광욕을 하고 있는 유리아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느새 자연스럽게 하인들 사이에 섞여 주방을 드나드는 소아레스의 모습은 자이안에게 기묘한 안심감을 가져다줬다.
역시 자신이 정상이었다. 쉬는 건 어려운 일이다.
“형님도 참…… 뭐랄까…… 하하.”
안뜰에서 검술에 매진하는 바란드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했더니 어색한 웃음이 돌아왔다.
“이상한 건 아닙니다. 전 형님의 그 자세를 존경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자기 능력 이상으로 무리를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뭐, 그렇지.”
마족이나 마물과의 싸움에 비하면 한가함을 주체 못 해 여기저기 머리를 들이미는 건 귀여운 행동이었다. 멋쩍게 대답하는 자이안을 보고, 바란드는 예비용으로 준비된 목검을 가져와 내밀었다.
“한가하시다면, 한 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얼마든지.”
자이안은 기분 좋게 웃으며 목검을 받아들고 바란드의 맞은편에 섰다. 바란드 역시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가 목검을 똑바로 쥐고 자이안을 겨눈 순간, 그 표정이 거짓말처럼 돌변했다.
‘……날카로운걸.’
눈빛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기세가 그랬다.
몇 달 전 바란드와 처음 대련을 치렀을 때도 그 실력은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완숙했지만, 다소 유약하고 머뭇거리는 듯한 기색이 남아있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익숙지 않고 자기 손으로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이다.
지금 바란드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누군가는 한 걸음 성장했다고 볼 것이고, 누군가는 단순한 성격이 변했다고 볼 것이다.
그리고 자이안은 이렇게 볼 것이다. 모든 변화는 성장을 수반한다고.
“선공을 양보받아도 괜찮을까요, 형님?”
“물론이지.”
“감사합니다.”
한 차례 깊이 심호흡한 바란드가 자세를 낮추고 쏜살처럼 쇄도했다. 예상 이상으로 날랜 움직임에 자이안은 가볍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경로가 다소 뻔하기는 하지만.’
어지간한 실력의 병사라면 이 일격으로 제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이안은 측면으로 거칠게 짓쳐 드는 목검을 튕겨내며 생각했다.
“하압!”
튕겨낸 힘을 이용해 몸을 반회전한 바란드가 회전력을 실어 다시 반대쪽 측면을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정면으로 튕겨내지 않고 칼을 비스듬히 세워 빗겨냈다. 바란드의 자세가 짧은 순간 무너졌으나, 곧바로 두 발을 어지럽게 움직이며 몸을 바로 세웠다.
‘이런 점은 아직 미숙하네. 조금 과하게 저돌적인데.’
“거칠게 몰아칠 때와 그래서는 안될 때를 철저히 관찰하고 구분해야지.”
“알고…… 있습니다!”
말과는 반대로 바란드는 또다시 저돌적으로 접근했다. 자이안은 비슷한 수단으로 자세를 무너뜨리려 했고, 칼을 맞댄 순간 살짝 눈을 치켜떴다.
더 빠르고, 간결해졌다.
목검이 일체의 군더더기 없이 최단 경로를 그리며 치고 빠졌다.
정교하게 적의 급소를 노리며, 공격이 빗겨나가도 자세가 무너지지 않는 검법. 거친 기세와 정교한 기교가 공존하고 있다. 자이안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나 이런 거 가르쳐준 적 없는데?’
백작의 가르침인가? 싶었으나 생각해보니 그것도 아닐 것 같았다.
알레프 백작은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는 타입이라 기교적인 면은 조금 약하다. 물론 그 약하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일류 무인 기준이지만.
‘……혼자서 깨우쳤다고?’
일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바란드는 천재다.
‘그렇다고 봐주지는 않겠지만. 교사로서 면목이 있지.’
거친 공방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자이안은 바란드의 재능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전율했지만, 곁에서 보면 여전히 둘 사이에는 까마득한 실력 차가 느껴졌다.
바란드의 검은 아직 미처 삭제 정제되지 않아 거친 기세가 남아 있었다.
반면 자이안은 바란드와 거의 비슷하게 검법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검이 움직였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빠르고 간결하게 움직였다.
땀방울을 흩뿌리며 그의 주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바란드와 대조적으로, 대련을 시작한 뒤로 조금도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허억…… 허억……!”
“괜찮아?”
“아직 더 할 수 있습니다……!”
바란드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그러나 한계까지 쥐어짜인 팔다리의 떨림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자이안은 우려 반, 아쉬움 반으로 검을 고쳐들었다.
‘슬슬 끝내야겠다. 바란드를 위해서도.’
아직 몸이 완전히 자라지 않은 유년기에 함부로 무리하면 이후 성장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크룩스의 가르침이었다.
“하아아아!”
바란드 역시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아챈 듯했다.
그의 기세가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칠어졌다. 검을 똑바로 세우고 달려오는 그 모습은 마치 맹수의 돌진을 마주한 듯했다.
따악!
목검이 거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절반으로 부러진 목검의 날 부분이 휙 날아가 안뜰 구석에 떨어지고, 자이안의 곁을 스쳐 지나친 바란드가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죄송…….”
바란드가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죄송, 합니다, 형님…….”
“바란드?”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지쳐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이안은 목검을 내던지고 급히 바란드에게 다가갔다.
“괜찮니? 혹시 어디 다쳤어?”
“아닙니다. 그게 아니에요…….”
고개를 든 바란드의 얼굴은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자이안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저택에 돌아오고 오랫동안 바란드와 함께했지만, 이렇게까지 절절하게 감정을 토해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바란드가 자이안의 팔을 와락 끌어안았다. 눈물을 감추려는듯 그의 팔뚝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머니께서는, 정말 그렇게 돌아가셔야만 했나요?”
“…….”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형님께서 어머니를 원망하셨던 것, 이해합니다. 형님께서 겪으신 고통은 제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컸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저 역시…… 형님을…… 흑, 죄송, 합니다.”
자이안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바란드의 머리를 이 손으로 쓰다듬는 게 너무나 죄스럽게 느껴졌다. 결국 손을 다시 거뒀다.
“죄송합니다, 형님. 못나고 이기적인 동생이라 죄송합니다.”
바란드가 자이안의 허리에 두 팔을 두르고 몸 전체를 와락 끌어안았다.
금세 앞섶이 축축하게 젖었다. 그것은 원망의 눈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죄의 눈물이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감정이 뒤섞인, 몹시도 무거운 눈물이었다.
“미안, 바란드.”
“사과하지 말아 주세요, 형님…….”
“미안해. 어쩌면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부족했어. 미안해.”
“흑, 흐극…… 엄마…… 흐으윽…….”
자이안은 다시 손을 들었다. 그리고 바란드의 등을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