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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화 무덤 앞의 결의 (173/210)


173화 무덤 앞의 결의
2023.03.25.


괴물의 몸을 꿰뚫은 빛의 궤적이 위아래로 크게 갈라졌다.

그러나 괴물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몇 걸음을 더 움직였다. 미오네는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괴물을 의연하게 노려보았다.

마침내 놈이 미오네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그 자리에서 손을 내려찍기만 해도 미오네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괴물은 위로 들어 올린 두 손을 끝내 내리치지 못했다.

괴물의 몸이 좌우로 찢어졌다.

“하…….”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뱉었다. 반나절 넘게 일행들을 고생시킨 것치고는 허망한 마무리였다.

한편으로는 온갖 의문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조금 전 미오네가 사용한 마법은 대체 뭐지? 아니, 애초에 그녀 혼자서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단 말인가.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던 의문은 다음 순간 쥐 죽은 듯이 모습을 감췄다. 미오네의 몸이 그 자리에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미오네!”

자이안이 저도 모르게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손바닥에 닿은 피부가 흠칫 놀랄 만큼 차가웠다. 단순히 체온이 낮다든가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체온이 이렇게까지 낮아지면 사람은 살 수 없다.

“바란…… 드……?”

“예? 바란드라뇨.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정신 차려요, 미오네.”

“후후……. 바란드. 많이 컸구나.”

미오네와 눈이 마주친 자이안은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꺼져 가는 촛불처럼 흐리멍덩했다.

“잠깐만. 내가 한번 볼게.”

유민이 자이안을 대신해 미오네를 부축했다. 그리고 마법으로 미오네의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프레이의 통신이 들려왔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이것들 처리나 좀 도와줘.

-삼촌?

-늦었어. 그 여자는 못 살린다.

일견 무책임하게 들리는 그 말에 유민은 와락 인상을 쓰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스캔 마법을 여러 번 반복해봐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아직 싸움 안 끝났다.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하냐? 여기서 한 놈 놓칠 때마다 민간인 수백 명이 죽는다.

유민의 어깨를 짚고 한 차례 눈을 맞춘 뒤 자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민도 한 박자 늦게 그를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결연한 표정으로 서쪽, 아직 남아있는 마물의 잔당들을 노려보았다.

남은 마물의 수는 약 2만. 그러나 제어를 잃은 듯 우왕좌왕하는 데다가, 일행들을 애먹인 비정상적인 생명력도 평범하게 돌아가 있었다.

마물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토벌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력에 비하면 MP는 고품질 고효율 에너지지. 그리고 그보다 훨씬 뛰어난 에너지가 바로 생물의 생명력이다.”

얼어붙은 것처럼 창백한 미오네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프레이는 담담히 설명했다. 자이안은 작게 침음을 뱉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시모스 왕이 왕도에서 사용하려고 했던 마법이 국민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는 거였죠?”

크룩스의 통찰력은 이번에도 변함없이 날카로웠다. 그 말에 자이안의 머릿속에서도 한 가지 퍼즐이 짜 맞춰졌다.

“미오네 역시 비슷한 마법을 사용한 거군요.”

“그래. 다만, 미오네의 마법이 시모스 왕의 것과 비교도 되지 않게 완성도가 높았지. 그래서 수백 명의 목숨을 바치고도 마족 하나 제대로 못 죽인 왕과는 달리 자기 목숨 하나만으로 저 괴물을 깔끔하게 죽여버릴 수 있었고.”

미오네에게 잠재된 놀라운 마법의 재능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걸까요.”

“글쎄다. 이미 죽어 나자빠진 인간을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죽기 직전, 미오네는 저를 보며 바란드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대견한 듯 웃더군요.”

“죽을 때가 되니 아들이 그리워졌나?”

프레이의 말투는 아무래도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했다. 일견 무례한 태도였으나, 자이안은 그게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죽은 사람에게 괜한 정과 관심을 주는 건 스스로를 괴롭히는 족쇄를 채우는 것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일부러 퉁명스럽게 거리를 두는 것이다.

“저택을 떠나기 전, 미오네가 나를 찾아왔었다.”

백작이 그동안 숨겨둔 진실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자기를 전장으로 데려가 달라더구나.”

“미오네가요?”

“그래. 자기 죄를 갚고 싶다고. 그리고 바란드가 보기에 부끄러운 어미로 있고 싶지는 않다고.”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금 뒤, 프레이가 인상을 쓰며 작게 혀를 찼다.

“멍청한 여자 같으니. 할 거면 진작부터 그럴 것이지.”

뭐라 대꾸하지 않고, 자이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전장으로 향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시체들이 널브러진 가운데에서도 괴물의 시체는 한눈에 보였다.

그러나 자이안이 다가가 툭 건드리자, 거대한 시체는 재가 되어 바스러지며 사방으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괴물의 시체가 사라진 자리에 작은 시체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니, 자이안은 그걸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체는 두 남녀가 서로를 끌어안은 채 딱 달라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당신들을 구원해주지 못해서.’

하반신마저 바스러져 사라지고 상반신만 남은 두 시체를 조심스럽게 들고 자이안은 다시 일행에게 돌아갔다. 자이안이 들고 있는 시체의 모습을 보며 유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족의 시체네? 그걸 어떻게 하려고?”

“무덤 정도는 만들어줘도 괜찮지 않을까요.”

이어 자이안은 미오네의 시체 역시 한 손으로 요령 좋게 등에 업었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으나, 아무도 그 모습을 비웃지 못했다.

“어쨌든, 이거로 한시름 놨네요.”

일행을 돌아보며 자이안이 애써 가볍게 말했다.

“자. 이제 집으로 돌아갑시다.”

* * *

전쟁 준비다 뭐다 해서 한동안 축 가라앉아 있던 알레프 저택이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았다.

그렇다고 긍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큰 전쟁이 막 끝났으니 뒤처리할 일이 많았다. 곳곳에서 가인들이 서류 더미에 파묻혀 앓는 소리를 했다. 알레프 백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민 님께 괜히 축복을 걸어 달라고 했군.’

철야 3일째. 짧은 가수면조차 취하지 않고, 말 그대로 눈 한 번 감은 적 없이 70시간 넘게 서류를 붙잡고 있었다.

전장에서 축복의 위력을 실감한 뒤, 어쩌면 이걸 이용해서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서류 처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떠올리고 만 대가였다.

몸도 머리도 쌩쌩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고통스러웠다. 역시 자신은 책상머리 앞에 앉는 게 어울리지 않다는 사실만 새삼 확인했다.

고민거리는 또 있었다. 미오네의 죽음, 그리고 붕괴된 왕도였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붕괴한 것은 왕도가 아니라 왕조다. 대다수의 백성들은 일전에 미오네의 발 빠른 대처로 무사할 수 있었으니까.

‘몇몇 왕족들이 무사하다고는 하지만…….’

과연 관료와 지방 귀족들이 그들 중 하나를 순순히 군주로 떠받들까?

그들은 저 자신의 무능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말았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모를까, 왕도가 마족에게 공격당하고 복마전의 저지선이 무너진 국가적 비상사태다.

아무 능력도 입증하지 못한 왕족에게 충성을 맹세할 만큼 관료도, 귀족도 멍청하지 않다. 당장 백작 자신만 해도 더 이상 일리움에 충성할 생각은 없었다.

‘이대로 백국으로 독립이나 할까.’

극단적인 생각이지만 아주 말도 안 되는 발상도 아니었다.

아마 소식이 빠른 지방 귀족들은 지금쯤 다들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아니면 대담하게, 왕조를 먹어 치운다는 발상을 떠올린 이들도 있을 것이고.

백작은 거기까지 권력이 탐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얼마 전에 자이안에게 들은 말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바란드에게는 군주의 자질이 있습니다. 아버지에게서도, 시모스 왕에게서도 보지 못한 자질이요.”

자이안은 거기까지만 말했을 뿐, 바라드를 왕으로 옹립하라느니 하는 말은 전혀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바란드에게 계승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미오네는 왕의 직계 자손이었으니까.

‘말을 좀 확실하게 해주면 안 되나? 끝까지 아비를 골탕 먹이기나 하고. 어휴.’

백작은 한숨을 뱉으며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그가 책상에서 벗어나 다시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건 아직 머나먼 미래의 일이리라.

* * *

저택 부지 안쪽, 허름한 오두막 뒤.

며칠 전 거기에 무덤이 두 개 새로 생겼다.

작고 조촐하고, 관리하는 하인도 한 명뿐인 무덤이었다. 그리고 자이안은 처음 무덤이 만들어진 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두 무덤을 방문했다.

그것은 애도나 미안함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었다. 안타까움, 그리고 아쉬움에 가까웠다.

‘미오네. 비록 당신의 죄는 무거웠지만, 적어도 당신의 희생은 숭고한 것이었습니다. 그 희생의 의미와 결과를 저는 잊지 않을 겁니다.’

작은 무덤 앞에 서서 꾸벅 묵례.

‘콜시픽스, 그리고 아리멜. 비록 당신들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찬탈자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이 손으로 처단하겠습니다.’

그보다는 조금 더 큰 무덤 앞에 서서 다시 한번 묵례.

어쩌면, 조금 더 일찍부터 진솔하게 대화를 나눴더라면.

더 적극적으로 마음을 열고 설득을 시도했더라면.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그러면 미래가 지금과는 달랐을까?’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자이안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두 무덤을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고, 자이안은 단호하게 등을 돌렸다.

* * *

검은 땅. 핏빛 하늘. 맹독을 머금은 공기. 냉기를 뿌리는 태양. 작열하며 이글거리는 밤.

그 어떤 생물도 살아갈 수 없는 끔찍한 땅, 마계.

그 중심, 밑바닥이 존재하지 않는 공동에 오직 유일하며 위대한 세계의 주인이 도사리고 있다.

정해진 이름은 없다. 그러나 그 존재를 아는 이들은 경외와 경멸을 동시에 담아 그 존재를 이렇게 칭했다.

찬탈자.

-…….

부글거리는 거대한 진흙 덩어리. 거품이 부풀어 오르고 터질 때마다 그 안에서 마물이 빚어져 바깥으로 걸어 나온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헤아릴 수 없는 마물들이 마계를 가득 채우고, 일부는 아직 남아있는 불안정한 균열을 통해 다른 차원을 침략한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에는 딱히 원대한 야망이나 의지가 담겨있지는 않다.

찬탈자에게 있어 일련의 현상은 말하자면 본능이며, 자연스러운 현상에 불과하다. 생물이 때가 되면 음식을 먹어 에너지를 보충하고, 정기적으로 잠을 자며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크…….

문득, 진흙의 표면이 지금과는 다른 파장을 일으키며 흔들렸다.

-크……흐……흐흐…….

낮게 울리는 그 소리는 흡사 음산한 웃음소리를 연상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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