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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화 황야의 전쟁(3) (172/210)


172화 황야의 전쟁(3)
2023.03.24.


“끄륵, 끄르, 끄르르륵.”

지금 상황이 괴물에게는 아주 재미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지고 가래 끓는 소리를 연상케 하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원한 같은 게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빠르게 퇴색되어 갔다. 아니, 본능에 잡아먹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날파리처럼 보잘것없는 인간들을 압도적인 힘으로 가지고 노는 상황이 몹시 즐거웠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인간의 강력한 마법도 맛있는 식사 거리에 불과했다. 용이 내뿜는 숨결은 먹을 수는 없었지만 애초에 크게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발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괴물은 지금 인간들을 죽이려 드는 것이 아니다. 놀아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언제든 손가락으로 눌러 죽일 수 있는 개미를 일부러 죽이지 않고 가지고 노는 것처럼. 그런 잔혹한 호기심이다.

‘멋지군.’

괴물이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정작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이성이 멀쩡하게 남은 것은 아니다. 두 영혼의 융합을 시도하며 그들은 성공을 확신했다. 어디까지나 ‘생존’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성공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둘은 찬탈자에 의해 모든 마물과 마족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본능’을 얕보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이 둘이었던 시절 본능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의 본능을 둘이서 나눠 부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영혼은 하나가 되었고, 이제는 혼자서 하나를 짊어져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지나치게 빠르게 본능에 매몰된 덕분에 스스로의 의식이 본능에 잡아먹혀 서서히 사라지는 감각을 느끼지는 않았다. 어쩌면, 다행이 아니라 불행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자리에 분노와 탐욕이라는 이름의 마족은 없다. 콜시픽스와 아리멜티에나라는 이름의 선주 인류도 없다.

이제 막 태어나, 본능에 사로잡혀 미쳐 날뛰는 이름도 없는 마족이 하나 있을 뿐이다.

* * *

미오네는 깊은숨을 뱉으며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나타난 물건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왕홀.”

왕권의 상징. 자이안의 말에 따르면 시모스 왕이 강력한 정신 지배 마법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신기.

그러나 왕홀은 마족의 습격으로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미오네 역시 왕의 시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부서진 왕홀의 파편을 확인했고.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했는데…….’

왕홀은 어디까지나 단말에 불과하다.

그 힘의 진짜 근원은 지금 미오네의 심장에 자리 잡은 보석.

그렇다면 보석의 힘을 이용해 새로운 왕홀을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주먹구구식으로 시도해보았고, 정말로 성공해버렸다.

미오네는 ‘근거 없는 추측’이라고 생각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

미오네가 보석의 힘을 마치 손발을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된 것과 마찬가지다. 보석의 힘으로 새로운 왕홀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다.

이를 논리적으로 명확히 설명할 수가 없어 근거 없는 추측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일 뿐.

‘이제 와서 왕홀 따위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면 상징적인 역할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미오네는 망설임 없이 왕홀을 붙잡았다.

왕홀을 쥔 손을 기점으로 부드러운 파장 같은 느낌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미오네는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원래부터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던 마법들을 지금보다 더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됐음을. 지금까지는 사용할 수 없었던 특수한 마법도.

‘결국 각하께서는 나를 끝까지 믿지 못하셨나.’

야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똑같은 입장이었다면 자신 역시 그랬을 테니까. 아니, 지금까지 처형하지 않고 얌전히 놔두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자비였다. 우유부단함일지도 모르지만.

방문을 열고 당당히 밖으로 나섰다. 지금까지 그녀가 얌전히 방에 갇혀 있었던 건 망설임 때문이었다. 길이 보이지 않아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더 이상 스스로를 좁은 새장에 가둘 필요는 없었다.

별관 앞에 서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 뒤, 그녀는 가볍게 날아올랐다.

서쪽으로 향하는 길에 피난민 마을의 모습이 보였다.

바란드의 모습도 거기에 있었다. 출정하기 전 백작은 바란드에게 저택으로 돌아올 것을 명했으나, 바란드는 난민들이랑 같이 지내는 게 더 마음이 놓인다며 당당하게 명을 거부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했다.

1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소년 여러 명이 바란드를 둘러싸고, 바란드를 호위해야 할 기사들은 검을 뽑은 채 일단의 장정들과 대치 중이었다. 중심에 선 바란드는 서글픈 표정이었다.

‘싸움? 어느 쪽이 잘못한 걸까.’

높은 하늘 위에서는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가까이 내려가 볼까 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고쳤다. 미오네는 가볍게 손을 휘저으며 한 가지 마법을 펼쳤다.

“……? ……!”

바란드를 둘러싼 소년들의 몸이 마치 풍선처럼 둥실 떠올랐다.

당혹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본 그들이 곧 공중에 뜬 채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바란드도, 기사들과 장정들도 마찬가지였다. 부드럽게 공중에 떠오른 그들은 서로 간에 멀찍이 거리를 둔 채 다시 지면에 천천히 착지했다.

겁에 질린 얼굴로 사방을 돌아본 소년들이 먼저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장정들 역시 곤혹스럽게 서로를 마주 보고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곧 용기를 낸 한 명이 바란드에게 다가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고, 남은 장정들도 이를 뒤따랐다. 바란드는 부드러운 미소로 그들을 하나하나 일으켜주었다.

불현듯 무언가를 눈치 챈 바란드가 급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미오네는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나 빠른 속도로 서쪽으로 날아간 뒤였다.

‘이렇게까지 침착한 기분이었던 게 얼마 만이지. 신기하네.’

얼마 전의 그녀였다면 바란드를 제외한 이들을 홧김에 죽여버렸을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정신적으로 몰려 있었고, 본인 역시 이를 자각하고 있었다.

무언가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계기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이성적인 판단력으로 그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행할 수 있게 됐음이 중요했다.

마을이 드문드문 보이다가, 이윽고 사람의 흔적이 뚝 끊겼다. 복마전 근처에는 민간인이 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그 대신, 서쪽 멀리에 양옆으로 솟은 절벽을 가로막듯 늘어선 저지선의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목적지가 가까워졌음을 확인하고, 미오네는 체내에 흐르는 힘을 천천히 가다듬기 시작했다.

아직 전장에 도착하기까지는 거리가 제법 남아있지만, 준비는 빠르고 신중할수록 좋았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고,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되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을, 내 스스로의 손으로.’

지금껏 저지른 많은 잘못을 청산할 기회가 머지않았다.

* * *

공방은 반나절이 넘게 이어졌다.

그 긴 시간 동안 한시도 긴장을 놓지 않고 싸움을 이어나간다는 건 고된 일이었다. 이미 여러 번 겪어봤지만, 도무지 익숙해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삼촌들은 아직 멀쩡한 것 같네.’

저도 모르게 하늘을 보며 군생각을 했다가, 사각에서 휘둘러진 채찍에 그대로 얻어맞을 뻔했다.

급하게 방어한 자이안이 자세를 무너뜨리며 쭉 밀려나고, 크룩스와 백작이 그 빈 자리를 곧바로 채웠다.

‘이런, 방심했어.’

적의 공격은 위협적이기는 하지만 치명적일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는 악랄한 생명력이 문제였다.

그런 사실이 저도 모르게 긴장에 느슨한 틈을 만들어낸 것이리라. 자이안은 정신을 다잡고 다시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느껴진 위화감에 우뚝 멈췄다.

‘마력의 냄새?’

일행 중 마력을 사용하는 이는 알레프 백작 한 명뿐이고, 그는 지금 자이안의 눈앞에 있다. 그러나 마력의 냄새가 느껴진 방향은 뒤쪽이었다. 그것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짙은 냄새.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부릅떴다.

“미오네?!”

무너진 요새 터 위에 미오네가 있었다. 자이안이 뭔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공중에 떠 있기까지 했다.

미오네가 손에 든 물건을 앞으로 내밀었다. 왕홀이었다. 그녀가 눈을 감았고, 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풀거리며 위로 치솟았다. 마력의 냄새가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짙어졌다.

-이런 젠장. 이건 또 뭐야?

프레이가 두 번째로 미오네의 등장을 알아차렸다.

“미오네?! 어떻게 여기까지!”

프레이의 통신이 모두에게 전해졌다.

백작이 기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가 적의 공격에 맞아 크게 나가떨어졌다.

정작 미오네는 그 목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마력이 점점 더 강해졌다. 등 뒤로 복잡한 마법진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미친!

마법진을 본 프레이가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새, 로운 인, 간이, 네?”

마침내 괴물이 미오네의 존재를 눈치챘다. 놈의 주의가 지금껏 상대한 자이안 일행에게서 벗어나 미오네에게 향했다.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던 놈이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제기랄! 막아!

프레이의 손끝에서 뻗어나간 번개의 사슬 수십 갈래가 놈의 두 다리를 묶었다. 발을 멈출 수 있었던 건 수 초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었다.

-절대 놈이 미오네한테 다가가게 두지 마! 어떻게든 막아!

프레이의 말에 자이안은 짧은 순간 망설였다. ‘성검’을 쓴다면 확실하게 놈의 전진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뿐, 죽일 수 있을 거라는 확신까지는 없었다.

가장 위력적인 공격 수단을 지금까지 사용하지 못하고 아껴두고 있었던 이유였다. 그걸 지금 써야만 할까? 아까운 기회를 허비하는 짓이 되지 않을까?

-자이안, 성검을 써라! 괜찮아! 날 믿어!

고민은 금세 눈 녹듯 사라졌다. 프레이가 괜찮다고, 믿으라고 했다. 그렇다면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혹시 잘못돼도 제 책임 아닙니다!

장난삼아 한 마디 던지고, 자이안은 스펙트럼을 어깨 너머로 크게 젖혀 들었다.

오로라가 칼날을 감싸고 이윽고 스펙트럼 전체가 흰빛에 휩싸였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손잡이를 꽉 붙잡으며 자이안이 일순 숨을 멈췄다.

빛의 파도가 황야를 가르며 뻗어나갔다.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괴물의 두 다리를 넝마로 찢어놓은 뒤 자리에서 벗어났다.

마지막까지 놈을 마주 상대하고 있던 크룩스가 그 자리에서 뛰어올라 놈의 가슴팍을 정권으로 후려치고, 반동을 이용해 그대로 멀리 날아갔다.

괴물의 자세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훤히 드러난 몸체를 빛의 파도가 후려쳤다.

“아아아아! 아프다! 아파! 아프다고!”

지금까지 무슨 공격을 당해도 별 반응이 괴물이 처음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괴물의 걸음이 그 자리에서 완전히 멈췄다. 그뿐 아니라 뒤로 몇 걸음 물러나기까지 했다. 예상대로 놈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자이안은 이 결과에 만족하기로 했다.

미오네는 눈을 감은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분명히 시각이 차단된 상태인데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앞으로 11초.’

괴물이 다가오는 속도를 고려해보건대, 자이안의 마지막 공격이 없었더라면 제때를 맞추지 못했을 것이다.

‘고마워요, 자이안. 당신 덕분이에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오네는 순수한 마음으로 자이안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에 펼쳐진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마법진이 핏빛으로 일렁였다.

미오네의 몸에서도 핏빛 기운이 빠져나가 마법진으로 흡수되었다.

두 팔로 몸을 감싼 채 비틀거리던 괴물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짐승처럼 네 다리로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는 안 되지!

프레이가 머리 위에 그려진 마법진으로부터 백염의 검을 뽑아 휘둘렀다.

제아무리 뛰어난 생명력을 자랑하는 괴물이라도 무방비하게 맞아서는 위험한 공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놈이 속도를 늦추며 두 팔로 공격을 막았다.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였음을 알아차릴 이성이 괴물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미오네가 눈을 번쩍 떴다.

왕홀의 끝을 괴물에게 겨눴다. 마법진이 더욱 밝게 빛나고, 그 빛이 이윽고 미오네의 모습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그 모습은 흡사 마법진이 미오네를 잡아먹는 듯 보였다.

왕홀로부터 쏘아진 빛의 궤적이 괴물의 몸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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