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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화 황야의 전쟁(2) (171/210)


171화 황야의 전쟁(2)
2023.03.23.


‘효과는 문제없네. 지속 시간하고 MP 효율, 호환성을 좀 더 손봐야겠어.’

프레이의 마법이 수천 마리의 마물의 약점을 정확히 꿰뚫은 것을 보며 아르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제품은 그 역할을 다했다. 이제 개량을 거쳐 양산할 차례였다.

백팩이 크게 벌어지며 안쪽에서 복잡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는 쉴 새 없이 공중을 누비며 적들을 폭격했다. 화력 자체는 프레이에 미치지 못하지만, 적의 발을 묶기에는 충분했다.

-아티팩트 완성했어. 곧 모두에게 효과가 적용될 거야.

마침내 준비를 마친 그녀가 전장의 모두에게 통신을 전했다.

눈에 띄는 시각적 효과는 없었으나, 지상에서 직접 적들과 부딪치고 있던 각성자들은 곧장 그 효과를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껏 감으로 파악해야만 했던 마물의 약점이 빨간 점으로 선명하게 보였다.

“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백작이 눈을 번쩍 떴다.

번갯불이 그의 몸을 뒤덮고, 이어 폭발하듯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수백 갈래로 뻗어나간 번개가 정확하게 적들의 약점을 때렸다. 포위망이 무너지고, 간신히 한숨 돌릴 틈이 생겼다.

‘이것 참, 부끄럽군.’

다른 이들의 활약에 비하면 자신의 무력은 참으로 소박한 것이었다. 그러나 백작은 곧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적을 얼마나 많이 쓰러뜨리고 하는 게 뭐가 중요할까. 중요한 건 나라를, 백성을 지키고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다는 사실 그 자체일 것이다.

-고마워요 누나. 조금 전보다 훨씬 낫네요.

누구보다도 아티팩트의 도움을 크게 받은 건 크룩스였다.

그는 특성상 다른 이들에 비해 적을 감지하거나 약점을 간파하는 능력이 아무래도 뒤처진다. 두세 번을 때려야 하는 걸 한 번만 때려도 죽일 수 있게 되자 속도가 비약적으로 올랐다.

초반에는 다소 고전했으나, 생각보다 전황이 수월하게 흘렀다. 자이안은 반쯤 무아지경으로 마물의 숫자를 줄이면서도 조금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대로 끝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러진 아리멜을 붙들고 자신을 노려보던 증오에 찬 시선이 잊히지가 않았다.

-잠깐. 저기 뒤에…… 뭐가 있는데.

프레이의 말이 먼저 귀에 닿았다. 거의 동시에, 자이안도 퍼뜩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코끝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렬한 냄새가 닿았다.

* * *

“끄륵. 멍청한 피조물들 같으니. 쓸모가 없군.”

거체가 몸을 일으켰다. 말라비틀어진 가죽이 우수수 쏟아지고 그 아래로 새롭게 돋아난 가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새로 자라난 가죽도 곧장 쩍쩍 갈라지며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영혼의 융합은 분명 성공했다. 그러나 아무 부작용도 없지는 않았다. 몸이 제어를 듣지 않고 멋대로 변형했다. 번거롭지만, 사소한 부작용이다.

마물이라고도, 마족이라고도 할 수 없게 된 이형의 괴물이 고개를 들었다.

황야를 새까맣게 뒤덮은 마물의 대군, 그리고 그 너머에 느껴지는 불쾌한 기척. 그들이 쓰러뜨려야만 하는 적이 거기에 있었다.

‘왜 쓰러뜨려야 했더라?’

머리를 긁으며 의문을 떠올렸다.

그러나 기억 일부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별것 아니겠거니 하고 포기했다. 죽이고 싶은 게 있으면 죽이면 된다. 그게 인간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그들이 걸음을 내디뎠다.

땅울림이 퍼지고 후미의 마물들이 흠칫 놀라며 돌아보았다.

지금까지는 자기들 뒤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야 알아차린 듯이.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마물이 급하게 좌우로 갈라지며 몸을 피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멍청한 놈들은 두꺼운 발에 깔려 무참하게 죽었다.

제멋대로 꿈틀거리며 변형하던 신체가 신기하게도 잠잠해졌다. 그 대신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시끄럽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당장 저것들을 잡아 죽여!

그들은 본능을 거스르지 않았다. 점점 더 속도를 높이다가 어느 순간 미친 듯이 뜀박질을 하며 황야를 가로질렀다. 불쾌한 기척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마지막으로 발밑에 거치적거리는 마물들을 힘껏 박차고 훌쩍 뛰어올라, 최전선에 착지했다. 이빨이 불규칙하게 돋아 제대로 닫히지도 않는 입술 틈새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작고 보잘것없는 인간. 불쾌하고 역겨운 지성체들. 그들은 입술을 벌리고는 히죽, 혐오스럽게 웃었다.

“캬아아아아아아!”

지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으로, 괴물이 포효했다.

* * *

신장이 2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괴물이 갑자기 최전선 한복판에 뚝 떨어졌다.

지면이 사정없이 으깨지며 비명을 질렀다. 자이안은 마물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어버리고 얼이 빠진 얼굴로 그 괴물을 바라보았다.

-뭐지? 마물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놈인데.

프레이의 당혹스러운 혼잣말은 당연했다. 놈은 대략적인 형체만 있을 뿐 몸 전체가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변형하고 있었으니까.

발톱의 길이나 발가락의 수가 변하는 건 예사였고, 팔이 하나 더 자라났다가 순식간에 썩어 뚝 떨어지거나 머리가 둘로 쪼개졌다가 다시 붙기도 했다.

“……마족이에요.”

자이안이 신음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믿기지 않지만, 그의 후각은 내정하게 상대의 정체를 파헤치고 있었다.

“분노와 탐욕의 냄새가 동시에 느껴져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둘이 ‘하나’가 되어버린 것 같아요.”

-하나가 되었다. 기묘한 표현이구만.

“캬아아아아아!”

괴물이 혐오스럽게 포효하며 두 팔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한쪽 팔이 쭉 늘어나며 지면을 후려치고, 다른 팔들이 수백 갈래로 쪼개져 허공을 휩쓸었다. 일행들은 마물 섬멸을 멈추고 급히 자리를 벗어나 공격을 피했다.

“피하! 지! 마라!”

놀랍게도 괴물의 입에서 멀쩡한 말이 튀어나왔다. 목소리를 들은 소아레스가 인상을 썼다.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어설프게 뒤섞인 것만 같은 기묘한 목소리.

-자이안 님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두 마족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립니다.

괴물이 그 자리에서 난동을 부리며 눈에 띄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부쉈다.

주변의 마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피떡이 된 마물의 시체가 사방으로 날아가며 황야를 더럽혔다. 말이 통하는 지성체가 아니라, 본능만 남아 날뛰는 야생동물을 보는 것 같았다.

“어디야! 어디에 있냐! 인간들!”

자이안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때 연인을 위해 적의 손을 거리낌 없이 맞잡았던 두 마족의 모습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자이안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스펙트럼을 똑바로 들어 괴물에게로 겨눴다.

-그래. 그거면 됐다.

프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이안이 판단을 했으니, 이제 자신들이 그 등을 받쳐줄 차례였다.

프레이의 머리 위로 그려진 커다란 마법진이 눈부신 광채를 펼쳤다. 그 자리에서 미쳐 날뛰던 괴물이 우뚝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쳐들었다.

“거기 있구나! 인간!”

“그래. 만나서 반갑다. 이제 꺼져.”

프레이가 두 손을 가지런하게 모아 아래로 내리그었다.

마법진으로부터 뻗어 나온 거대한 백염의 검이 그 궤도를 따라 아래로 휘둘러지며 공간을 불태웠다. 폐부를 통째로 불태우는 가공할 열기에 공기가 플라즈마로 화해 하얗게 명멸했다.

“키에에에엑!”

괴물이 두 팔을 들어올렸다. 두 개였던 팔이 삽시간에 다섯 개로 쪼개져 백염의 검을 붙잡았다. 프레이는 흠칫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이전에 탐욕과 싸웠을 때 마법의 술식을 통째로 빼앗긴 경험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그때와는 달랐다. 저 혐오스러운 괴물은 무식하게도 힘만으로 프레이의 마법을 붙잡아 멈춰 세운 것이다.

“맛있…… 겠다!”

더 놀라운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팔이 통째로 불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염의 검을 끌어당긴 괴물이 마법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내장 하나가 통째로 뽑혀 나가는 것만 같은 느낌에 프레이는 공중에서 크게 비틀거렸다. 마법이 강제로 파훼, 아니,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잡아먹힌 것이다.

“제기랄. 상성이 더 안좋아졌네.”

그래도 공략법이 아주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 마법을 잡아먹으려면 실제로 음식을 삼키는 것처럼 직접 입가에 가져다 대야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입 근처를 직접 공격하지 않고, 붙잡을 수도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마법을 퍼부으면 그만이다.

“맛있다! 더 줘!”

괴물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프레이에게 팔을 뻗었다.

프레이는 붙잡히지 않기 위해 고도를 높였으나 괴물의 팔 역시 고무처럼 쭉 늘어나 집요하게 프레이를 쫓았다. 결국 크게 선회하며 번개의 채찍을 휘둘러 놈의 팔을 불태울 수밖에 없었다.

-프레이! 내가 해볼게!

프레이를 대신해 케이가 나섰다.

고열의 숨결이 괴물을 향해 쏟아졌다. 놈은 귀찮은 듯 팔을 떨치며 몸을 움츠렸다. 마법이 아닌 순수한 용의 숨결은 잡아먹지 못하는 듯했다.

-케이, 네가 적을 귀찮게 하는 동안 내가 큰 걸 준비해서 먹여주는 걸로 하자.

-알았어!

공중에서 둘이 괴물의 주의를 끄는 동안 지상이라고 맘 편히 놀고 있지는 않았다.

대지에 뿌리처럼 박힌 괴물의 다리는 마치 상반신과는 별개의 생물인 양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다리 일부가 찢어지며 채찍처럼 주변을 휩쓸고, 표면에서 발톱이나 짐승의 아가리 같은 온갖 형상이 튀어나와 무차별적으로 주변을 공격했다.

“여기가 약점이야! 어, 어? 아닌가? 그럼 여기? 여기도 아니잖아?!”

마안을 열고 괴물의 다리 주변을 누비며 유리아는 연신 당혹스러운 탄성을 터뜨렸다.

약점이 아예 보이지 않거나, 약점을 정확히 찔렀는데도 아무 일 없거나, 멀쩡히 있던 약점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전혀 다른 위치에서 보이는 등 완전히 제멋대로였다.

정해진 형체 없이 멋대로 변형하는 놈의 모습을 그대로 본뜬 것 같았다.

“하하. 이거 애 좀 먹겠는데요.”

다리 일부가 찢어져 날아든 채찍을 정권으로 분쇄하며 크룩스가 가볍게 말했다. 그러나 그 표정이 어딘가 굳어있는 것처럼 보인 건 기분 탓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이안 역시 끊임없이 적의 공격을 막고, 틈을 파고들어 다리를 베면서도 전혀 손맛을 느끼지 못했다. 마물을 상대할 때와 비교하면, 그저 피부 표면을 얇게 찢은 것에 불과한 느낌.

게다가 상대할 건 이 괴물만이 아니었다.

괴물이 피아를 가리지 않고 난동을 부리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운 좋게 이를 피해 살아남은 마물들은 꾸역꾸역 저지선을 넘어가기 위해 몰려들고 있었다.

잠시 거리를 벌린 자이안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해는 동쪽 하늘에 걸려있다.

자이안은 본능적인 예감을 느꼈다. 아마도 이 전쟁의 끝이 찾아오는 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가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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