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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화 황야의 전쟁(1) (170/210)


170화 황야의 전쟁(1)
2023.03.22.


반파된 제1 저지선 너머. 자이안은 깊게 심호흡을 하며 펜던트를 쥐었다.

작게 이름을 부르자, 그의 주변에서 차례차례 빛의 기둥이 네 차례 솟아올랐다. 이어 펜던트가 오로라에 휘감겨 명멸하며 장검의 모습으로 변했다.

“자. 잠깐 주목.”

프레이가 짝, 하고 손뼉을 쳤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작전을 점검해보자.”

크룩스와 알레프 백작이 최전방에서 적의 진군을 막으며 주의를 끈다.

프레이와 케이가 제공권을 확보하고 화력을 광역으로 쏟아부어 약한 마물 위주로 숫자를 줄이며 기세를 꺾는다.

아르스는 둘을 보조하며 전황을 분석하고 모두에게 전달.

소아레스와 유라아는 적진 안쪽까지 침투해 차근차근 마물의 숫자를 줄이며 동시에 진형을 어지럽히는 데 주력하고, 유민은 가장 안전한 후방에서 모두를 강화한다.

그리고 자이안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유동적으로 모두를 돕는다.

“예전에 산맥에서 싸울 때와 비슷하니까 어렵지는 않을 거다. 가장 중요한 건 한 마리도 뒤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틀어막는 거다. 한 마리 놓칠 때마다 민간인 수백 명이 희생된다고 생각해라.”

모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도 마주 고개를 끄덕이고, 공중으로 높이 날아올랐다.

뒤이어 케이가 용으로 변해 따라 올라가고, 마지막으로 아르스가 백팩을 전개하며 모두에게 태평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할 때마다 긴장된다. 자이안은 어때?”

“저도 똑같아요.”

생글생글 웃는 유리아에게 웃음으로 마주 답하며, 자이안은 스펙트럼을 쥔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그때 어깨에 묵직한 손길이 느껴졌다. 크룩스인가 싶었는데, 알레프 백작이었다.

“아버지?”

조언이나 충고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덤덤한 눈으로 자이안을 말없이 바라볼 뿐. 아버지는 목숨을 건 전투를 앞두고 이런 표정을 짓는구나. 자이안은 새롭게 깨달았다.

“그럴 줄 알고 차를 준비했습니다. 긴장을 푸는 데 다소나마 도움이 될 겁니다.”

소아레스의 준비성은 대단하다 못해 경이로울 정도였다.

매고 있던 작은 바구니에서 재빠르게 주전자와 잔을 꺼내 모두에게 차를 나눴다. 잔이 작기는 했지만 향을 음미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는 부족함 없는 양이었다.

“직접 타신 거요?”

“예, 알레프 변경백 각하.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아니, 한때 제국의 중진이셨던 분을 막 대할 수는 없지.”

그러면서 백작은 흘깃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부러워하는 듯한 눈빛에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자리는…… 정리할 필요는 없겠지요.”

어차피 곧 엉망이 될 테니. 소아레스는 뒷말을 삼키며 서쪽을 바라보았다.

먼 곳에서 뿌연 흙먼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흙먼지에 가려진 검은 파도가 꾸물거리며 밀려왔다. 몇만에 달하는 마물의 군세는 황야를 가득 메우는 듯했다.

“많긴 많네요. 1년 전이 생각나는데요. 하하.”

크룩스가 가볍게 말하며 웃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그의 태도는 무엇보다도 믿음직했다.

“슬슬 모두에게 축복을 걸어줄게요.”

지그시 눈을 감은 유민이 가슴 앞에 손을 모으며 빠르고 정확한 발음으로 축언을 읊었다.

온몸에 힘이 충만하게 차오르며 뭐든 이뤄낼 수 있을 것 같은 전능감이 흘러넘쳤다. 유민의 축복을 처음 받아보는 백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모두 준비됐습니까?”

자이안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일행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큰 거 한 방 먼저 먹어라!”

프레이가 두 손을 머리 위로 높이 뻗었다. 안 그래도 흐리던 하늘이 삽시간에 두꺼운 먹구름으로 뒤덮여 어두워졌다. 먹구름 사이사이로 창백한 번갯불이 번쩍이며 몸을 뒤틀었다.

꽈르르릉-!

귀를 먹게 할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굉음이 황야를 뒤흔들었다.

그것은 낙뢰라기보다는 거대한 빛의 기둥, 혹은 신의 심판을 연상케 했다. 마물의 군단 절반가량이 순식간에 전광에 삼켜졌다.

-나도 질 수 없지!

남은 절반의 머리 위로 부식성 숨결이 쏟아졌다. 금속을 녹슬게 하고 생물을 산채로 부패시키는 극독에 휩싸여, 마물들이 발을 멈추고 고통에 겨워 몸을 뒤틀었다.

-어, 어라?

잠시 적들의 상태를 살핀 케이의 입에서 당혹스런 탄성이 흘러나왔다.

온몸이 썩어 자리에 쓰러졌던 마물들이 마치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썩은 살이 떨어져 나가고 매끈한 새 살이 돋아난다. 경이적인 재생력으로 부식성 숨결을 극복한 것이다.

“……좀 이상한데.”

프레이 역시 신벌이 잦아들고 드러난 광경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새까맣게 그을린 지면과는 대조적으로, 마물들의 피해는 경미했다. 프레이의 경험상 살아남은 마물이 1할도 되지 않아야 정상인데, 얼핏 세어봐도 절반이 넘었다.

-아르스. 이놈들 강화된 것 같다.

잠깐 마안을 열고 에너지의 흐름을 살핀 프레이가 아르스에게 통신을 걸었다.

힘의 마안은 수용 정보량이 많아질수록 MP 소모 역시 급격히 많아진다. 수만에 달하는 마물들의 에너지 흐름을 모두 보고 분석하는 건 부담이 너무 컸다.

짧은 개안으로 알 수 있었던 건 마물이 모종의 수단으로 강화되었다는 사실 뿐, 그 이유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나머지는 아르스의 몫이다.

-알았어. 분석하는 동안 잠깐 화력이 약해질 텐데 괜찮아?

-하.

가볍게 코웃음을 친 프레이가 다시 손을 뻗었다. 뇌운이 꿈틀거리고, 조금 전보다 더욱 강렬한 빛이 쏟아졌다.

-지금 그 말은 조금 자존심 상하는데?

-괜찮은 것 같네. 알았어. 믿고 맡길게.

퉁신이 끊어졌다. 프레이는 발아래를 내려다보며 아무도 눈치챌 수 없도록 작게 혀를 찼다.

허세를 부렸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 전에는 자존심 때문에 다소 무리를 했다.

현역 시절이었더라면 이 정도 마법은 10발을 연속으로 쏟아내도 숨 한번 흐트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프레이가 세월이 흘러 약해진 건가? 그것도 아니다. 각성자의 특성, 그리고 펜던트에 의해 소환된 아바타라는 제한 때문이었다.

각성자가 그 어떤 현대 병기보다도 마물 토벌에 특화된 이유. 가성비 때문이기도 하고, 각성자가 사용하는 MP가 마물 특유의 질긴 생명력을 무용지물로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론적으로 영구동력에 가까운 전투 유지력이다.

각성자는 마물을 쓰러뜨리고, 죽은 마물에게서 실시간으로 MP를 흡수한다.

A라는 마물을 쓰러뜨릴 때 소모한 MP가 그 마물에게서 흡수하는 양보다 적다면, 마물 A를 상대로는 이론상 무한히 싸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프레이는 본신이 아니라 아바타인 상태. 그가 마물을 죽여 발생한 MP는 그에게 직접 흡수되지 않고 펜던트에 저장되어 자이안에게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에너지 손실이 일어나며, 애초에 이런 식으로 펜던트에 흡수되는 MP의 비율 자체가 각성자가 마물을 쓰러뜨리고 흡수하는 비율보다 적다.

이러니 MP 소모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이안에게 과한 부담이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 강제로 소환이 해제될지도 모른다.

‘평범한 마물을 상대한다면 애초에 그런 일이 없겠지만.’

수도 많고, 프레이의 마법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질긴 데다가 재생력까지 강하다. 아르스가 어서 분석을 마쳐 원인을 찾을 때까는 발을 묶으며 버티는 수밖에.

‘젠장. 뻔히 힘이 있는 데도 쓰질 못하니 감질나는군.’

이것만은 자이안이 아무리 성장해도 펜던트의 소환 메커니즘 상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프레이는 쓴맛을 삼키며 MP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데 집중했다.

한편, 지상 역시 마물들이 비정상적으로 강력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크룩스의 정권에 몸의 절반이 날아간 마물이 꾸역꾸역 살아 움직이며, 날아간 신체가 실시간으로 재생될 정도였다.

“이거, 정확히 약점을 찾아서 일격에 파괴하지 못하면 애먹겠는데요.”

몇 차례 비슷한 경험 끝에 손맛의 차이를 구분해낸 크룩스가 말했다.

마물의 생명력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강화되어 있었지만, 반면 몸 어딘가에 그 생명력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약점이 생겼다. 극단적인 강화의 부작용이었다.

크룩스가 광역 도발로 적들의 주의를 끌며 공중 팀에게 그 사실을 전하는 동안, 자이안을 비롯한 남은 이들은 착실하게 적의 수를 하나씩 줄여나가는 데 집중했다.

특히 마안으로 적의 약점을 가차 없이 꿰뚫어 볼 수 있는 유리아의 활약은 독보적이었다.

그녀가 전장을 누비며 마물들 사이를 스쳐 지날 때마다 약점을 찔린 마물들이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져 급격하게 말라비틀어졌다.

소아레스와 자이안의 활약 역시 만만치 않았다.

정확히 약점을 파괴하지 않으면 결코 일격에 쓰러지지 않는 마물들을 상대하며 자이안은 보석탑 지하의 미궁을 내려가던 때를 떠올렸다.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지만, 마물들 역시 그때와 비교도 되지 않게 강력했다.

‘아직도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야.’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작은 미소를 그렸다.

사방에서 짓쳐 드는 공격을 더 빠르게, 더 작게, 더 정교하게 피하며 마찬가지로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는 동작으로 검을 휘두른다.

의식을 집중하며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자연스럽게 다음에는 어느 경로로 검을 휘둘러야 할지, 어떻게 움직여야 최소한의 동작으로 공격을 피할 수 있을지가 눈에 보였다.

소아레스는 유리아조차 한 수 접고 들어가는 빠른 속도를 활용해, 아예 포위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유리아처럼 문답무용으로 적의 약점을 간파하는 눈은 없었지만, 그 대신 1초에 단검을 수십 번은 휘두를 수 있는 속도가 있었다.

적의 근육과 심장이 움직이는 소리, 사소한 움직임과 무의식적인 반응을 바탕으로 적의 취약점을 찾아내는 통찰력도 있었다.

일격에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남이 일격을 가할 시간에 여러 번 공격해 그중 한 번만 약점을 찌르면 되는 것이다.

-프레이. 분석 다 됐어.

-형. 마물의 약점을 알아냈습니다.

두 가지 통신이 프레이에게 동시에 전해졌다. 게다가 어느 쪽이든 반색할 만한 희소식이었다.

-약점이라고? 알았어. 약점을 표시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먼저 만들게.

프레이가 크룩스에게서 들은 정보를 아르스에게 전하고, 아르스는 이를 기반으로 즉시 아티팩트 제작에 착수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아르스가 시범형으로 만든 아티팩트가 효과를 발휘했다.

-프레이, 네 시야에 덮어씌우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아티팩트야. 마물의 몸에 빨간 점 보여? 그게 약점이야.

-잘 보이는구만. 고맙다.

-그럼 난 원인 자체를 찾아 없앨 아티팩트를 마저 만들게.

이질적인 힘이 눈에 간섭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한 번 눈을 감았다 뜨자, 아르스의 말대로 발아래에 무수한 빨간 점이 모습을 보였다.

미물의 몸 전체에 비하면 바늘구멍처럼 작게 보이는 약점. 게다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그런 건 사소한 장애물에 불과했다.

“덕분에 애 좀 먹었다. 망할 놈들아.”

프레이가 양손을 넓게 펼쳤다. 그의 머리 위로 거대한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날 애먹인 선물이다!”

마법진이 불을 뿜었다. 수백 갈래의 열선이 일시에 지상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열선으로 약점을 정확히 꿰뚫린 마물들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 픽 쓰러져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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