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결전 준비(3)
(169/210)
169화 결전 준비(3)
(169/210)
169화 결전 준비(3)
2023.03.21.
황야 한가운데에 세워진 검은 탑.
멀리서 보면 얼핏 돌이나 금속처럼 보이는 그것은,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그보다 훨씬 끔찍한 재료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마물의 시체를 엮어 세운 탑.
-쿠르르릉…….
어느 순간, 탑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껍질이 벗겨지듯 마물의 시체들이 바깥에서부터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이윽고 걷잡을 수 없는 붕괴가 시작된다. 시체들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지면에 쏟아지고, 흙먼지가 높게 피어올라 그 현장을 가렸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 거대한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우우…….
장막을 걷어내듯, 그 형상이 흙먼지를 뚫고 걸어 나왔다.
5미터에 달하는, 인간을 닮은 거대한 괴물. 까만 피부는 곳곳이 갈라져 내부의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고, 손발 끄트머리는 불안정하게 갈라졌다가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눈동자의 개수와 색 역시 변했다.
-이상한 기분이군.
괴물이 말했다.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를 반쯤 섞어놓은 듯 기묘한 목소리였다.
-그래. 나쁜 기분은, 아니야.
무언가에 대답하듯 혼잣말을 하고, 괴물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동쪽 하늘. 그곳에 청산해야 할 빚이 남아있다.
괴물이 손을 들어 머리를 긁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이제 와서 원망의 감정은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고맙기도 했다. 그들 덕분에 불확실한 수단을 시도했고, 그게 성공해 연인과 진정한 의미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지금 떠오르는 생각은 그저 하나였다.
인간을 죽이고 싶다.
하나라도 더 많이 죽여서, 이 시끄러운 본능의 충동을 잠재우고 싶다.
괴물은 동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 * *
자이안은 불현듯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창밖, 서쪽 황야로 향했다.
냄새가 움직이고 있다. 온갖 마물의 냄새가 뒤섞인,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직 거리는 까마득하게 멀다. 그러나 조금씩, 착실하게 동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물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펜던트 너머, 각자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던 각성자들이 담담하게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티팩트의 상태를 점검하고, MP의 흐름을 가다듬으며 언제든 부름에 응할 수 있도록 태세를 갖췄다.
“아버지에게도 사실을 전해야겠어요.”
자이안은 급히 방을 나섰다. 백작은 이곳 제3 저지선 요새의 가장 호화로운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빠르게 노크를 하고, 대답이 들리자마자 바로 안으로 들어섰다.
“자이안, 무슨 일…….”
용건을 물으려던 백작은 자이안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긴장으로 굳은 안색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적습이냐?”
“아직 거리가 멀어서,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어요.”
적들이 이 속도를 유지한다면 늦어도 1일 이내에 제1 저지선까지 도달할 것이다.
“1일. 최후의 준비 기간이로군.”
고작 1일 만에 할 수 있는 건 많이 없었다. 작전과 지휘체계를 확인하고 저지선 사이에 깔린 함정의 상태를 간단하게 점검하는 것 정도.
“알았다. 미리 알려줘서 고맙다, 자이안.”
간단히 의견을 나눈 뒤, 자이안은 마지막으로 백작에게 꾸벅 인사하고 다시 방을 나왔다. 프레이가 팔짱을 끼며 퉁명스럽게 투덜거렸다.
「이쪽에서 먼저 치고 나가서 시원하게 쓸어버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 답답하구만.」
그의 말대로, 당초에는 아예 자이안 일행 쪽에서 적들을 기습하는 작전도 고려했다. 그러나 몇 가지 불안 요소 때문에 끝내 채택되지는 않았다.
탐욕과 분노의 위치를 찾지 못해, 일행이 마물들을 상대하는 사이 둘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다는 게 첫째.
복마전 곳곳에 남아있는 균열로부터 끊임없이 마물이 튀어나오는 터라, 단순히 숫자만 줄여서는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다는 게 둘째.
마지막으로 땅이 너무 넓어서, 자칫 완전히 전멸시키지 못하고 몇 마리가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게 셋째.
차라리 저지선에 진을 치고 몰려오는 적들을 요격하는 게 나았다.
두 마족 역시 틀림없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저지선 자체가 양쪽이 절벽으로 막힌 지형이라 적들이 우회해 빠져나갈 여지가 없으니까.
“유리아와 소아레스도 부르는 게 좋을까요?”
「소아레스는 몰라도, 유리아는 이런 상황에 안 부르면 나중에 엄청 삐질걸요.」
유민의 말에 자이안은 얌전히 왕도 쪽으로 통신을 걸었다. 유리아가 곧장 대답했다.
-안녕, 자이안! 무슨 일이야?
-곧 적습이 있을 것 같아요. 왕도는 어때요?
유리아의 말에 따르면 왕도는 많이 안정된 상태였다. 지금으로서는 관료들이 제대로 일을 하는지 감시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을 정도. 마침 잘된 일이었다.
-우리 힘이 필요한 거구나?
-두 분께서 도와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죠.
-알았어! 여기 정리하고 소아레스랑 같이 금방 갈게.
얼마간 대화를 더 나누고 통신을 끊었다. 걱정 따위는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 밝은 목소리를 들으니 자이안도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비록 큰 싸움을 앞두고 있지만, 마냥 무거운 기분에 사로잡혀 있을 수만은 없다.
지금까지도 여러 번 비슷한 규모의 싸움이 있었고, 쉽지는 않았지만 모두 극복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믿어야 했다.
* * *
‘결국 끝까지 말하지 못했군.’
문을 나서는 자이안의 뒷모습을 보며 백작은 끝까지 망설였다. 그러나 결국 그가 입을 여는 일은 없었다. 혼자 남게 되자 뒤늦게 후회와 망설임이 찾아왔다.
‘미오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며칠 전. 그들이 작전을 위해 저지선으로 거점을 옮기기 전, 저택에 머물고 있을 때 미오네가 백작을 찾아왔다.
백작은 두 가지 의미로 놀랐다.
지금까지 얌전히 유폐되어 있던 미오네가 제 발로 당당히 방을 나왔다는 점이 하나.
며칠 만에 본 미오네의 얼굴이 이전과는 딴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달라 보인다는 점이 다른 하나.
그녀가 왕도의 혼란을 주도해 수습했다는 이야기를 자이안에게서 들었을 때도, 백작은 사실 긴가민가했다.
백작이 아는 미오네는 표독스럽고 악랄하며 제 목적을 위해 주위의 모든 것을 도구로 여기는 여자였다.
‘내가 어쩌면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건가. 아니, 그녀를 이해할 생각조차 없었던 게 아닐까.’
백작은 지난날을 돌이켜보았다. 정략결혼을 맺은 뒤 10년이 조금 못 되는 세월, 그녀와 개인적으로 얘기를 나눈 적이 얼마나 됐는지. 두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독선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미오네의 성정을 멋대로 단정하고 있었던 건가?’
며칠 전 백작을 찾아온 미오네는 놀라울 정도로 올곧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눈은 흡사 자이안이나 바란드를 연상케 했다.
“제 죄를 갚고 싶어요.”
그 눈으로 백작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가 처음 꺼낸 말이 그것이었다.
“……뭐라고?”
“곧 큰 전쟁이 시작될 거라고 들어 알고 있어요. 각하, 저를 전장으로 데려가 주세요.”
상상도 못 한 말에 백작은 말문이 막혔다.
의심 섞인 시선으로 지그시 미오네를 노려보았다. 미오네는 의연한 표정이었다. 옳은 일을, 적어도 그 스스로 옳다고 믿는 일을 하려는 이의 표정이었다.
“왜 하필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요?”
“각하께서 이 가문의 주인이시니까요.”
“지난 10년간 바로 그 가문의 주인을 능멸하고 기만하며, 가문을 멋대로 주물러댄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이라고 생각하시오, 부인?”
“죄송합니다.”
미오네가 허리를 깊게 숙이며 사과했다. 백작은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미오네가? 사과를? 내게?
“보잘것없는 이 한 마디 사과로 제 죄를 갚을 수는 없겠죠. 그러니 각하, 부디 제가 전장에 출정하는 걸 허락해주세요.”
백작의 눈동자의 의심이 더욱 깊어졌다. 어쩌면 지금 이 모든 행동이 기만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목적이 뭘까? 전장에 나가서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군.”
“묻고 싶으신 게 있다면 대답해드릴게요. 각하의 의심이 걷힐 때까지, 전부.”
“그렇다면, 부인. 대체 자이안에게는 왜 그랬소?”
그것은 백작이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둔 말이었다.
미오네가 백작 부인이 되기도 전부터 자이안은 이미 쇠약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애초에 후계를 이을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어떻게든 자이안이 병을 극복하기를 바랐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백작도 현실을 알고 있었다.
자이안이 끝내 병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후계는 동생인 바란드에게 이어질 것임을.
미오네의 학대는 너무 과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알아서 쓰러질 수밖에 없는 아이를 계속해서 밀치고 발을 걸어댔다. 끝내 죽이려고까지 했다.
언젠가 자이안이 다시 건강해져서, 바란드를 밀어내고 다시 후계를 꿰찰까 봐? 지나친 비약이다.
바란드의 후계는 왕가에 의해 정해진 것. 아무리 백작이라도 대놓고 왕가를 거스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
“자기보다 재능이 뛰어난 이를 만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질투를 느껴요.”
“……뭐?”
미오네의 대답은 백작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게 무슨 말이오? 자이안의 재능이 그렇다고? 질투를 해서 죽이려 했다, 그런 소리요?”
“아뇨, 각하. 자이안의 재능은 질투 따위를 허용하는 어설픈 게 아니에요.”
미오네는 조용히 고개를 젓고는 말을 이었다.
“재능이 일정한 선을 넘어서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압도적인 재능을 마주하면, 사람은 자포자기해요. 그저 두려워하고, 경외하며, 숭배하게 되죠.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천재? 신이 내린 재능?”
미오네의 생각은 달랐다. 그것은 악성이다.
자이안이 가진 악성, 그에 대한 미오네의 두려움. 얘기를 모두 들은 백작은 황망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말은 백작이 상상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엉망진창인 비약이었다.
“그저…… 그저 어처구니가 없군. 그건 망상에 불과하오, 미오네.”
“이해해요, 각하. 귀족가의 많은 비극이 그런 망상에서 시작되죠.”
“그래서? 지금은 그 망상으로 그릇된 짓을 한 걸 후회하고 있다고?”
“아뇨. 후회하고 있지는 않아요. 아마 저는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은 행동을 하겠죠.”
담담한 말투, 담담한 표정. 도저히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다.
“차라리 거짓말로라도 후회하고 있다고, 반성하고 있다고 하지 그랬소.”
“말씀드렸잖아요? 각하의 의심이 걷힐 때까지 전부 다 대답해드리겠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죠.”
“그렇다면, 전장에 나가겠다는 이유는?”
“죄를 갚고 싶어서요.”
“후회를 하지는 않지만 죄를 저지른 건 알고 있다? 그래서 값을 치르겠다?”
“맞아요.”
백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대화를 나눌수록 머리가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굳이 한 마디를 더 붙인다면.”
미오네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바란드에게 있어 부끄럽지 않은 어머니로 있고 싶어서.”
미오네의 입가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무의식적인 미소였다.
“알고 계셨나요, 각하? 그 아이, 피난민 마을에서 난민과 부상병들을 돕고 있더라고요. 제 손발이 까지고 옷이 더럽혀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
“어린 아들이 그러고 있는데, 제가 뒤에 숨어만 있는 건 너무 볼썽사납잖아요?”
백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만약 지금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허락을 내려도 괜찮으리라.
“……좀 생각해봐야겠소.”
그러나 고작 말 몇 마디에 믿음을 주기에는 서로 간의 골이 너무나 깊었다.
“우선 방에서 기다리고 계시오. 좀 생각을 해보고, 판단을 내린 뒤 언질을 줄 테니.”
“알았어요, 각하. 기쁜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미오네는 작게 웃으며 미련 없이 물러났다. 그러나 백작은 끝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결국 미오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저택을 떠났다.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한들.’
그런 말을 할 거면, 예전부터 꾸준히 그런 모습을 보여줬어야 할 게 아닌가.
백작은 이마를 짚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전쟁이 코앞이다. 이 이상 고민거리를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백작은 불필요한 고민을 모두 미뤄놓고 바쁜 하루를 보냈다. 시간은 야속하리만치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예정된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