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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화 결전 준비(2) (168/210)


168화 결전 준비(2)
2023.03.20.


-케에…… 끼르르르륵…….

힘없는 단말마를 뱉은 마물이 뒤로 쓰러졌다. 체고 10미터에 달하는 육중한 몸이 지면을 때리며 지진을 연상케 하는 무거운 울림을 발했다.

“젠장. 애먹이는군.”

탐욕은 마물의 회색 피로 흠뻑 젖은 팔을 털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의 주변에는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마물의 시체가 난잡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마족은 마물을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 그러나 마물은 마족을 공격하지 못한다.

이는 생존의 본능을 뛰어넘는, 흡사 물리법칙과 같은 절대적인 법칙이다. 그러나 탐욕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마물을 상대해야만 했다.

마족과 마물에 대한 법칙은 모두 그 창조주인 찬탈자로부터 비롯됐다. 그리고 탐욕은 그 법칙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찬탈자의 지배력이 약해지고 있다.’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겠지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불안감이 앞섰다.

자신들에 대한 지배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놈이 눈치 채지 못했을까? 그럴 리가 없다. ‘마나 오염’이라는 제약이 있기는 하나 찬탈자의 힘은 범 차원적 영역을 아우른다.

그렇다면 놈은 지배력이 약해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머리를 굴려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육신이라는 한계에 갇힌 필멸자가 그 의사를 헤아리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 놈은 삶이니 죽음이니 하는 개념으로부터 벗어난 존재니까.

‘깊게 생각하지 말자. 안다고 해서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당장 중요한 일은 따로 있다.

탐욕은 두꺼운 팔을 길게 늘이고 수백 갈래로 쪼개, 주변에 널브러진 마물의 시체들을 한꺼번에 붙잡아 묶었다. 그리고 메마른 황야를 가로질러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리멜. 나 왔어. 몸은 좀 어때?”

-조, 금, 덜, 아, 픈, 것, 같, 아.

그것은 마물의 시체들이 뒤엉켜 세워진 탑이었다.

탑 한 가운데에 분노의 몸이 반쯤 파묻혀 있었다. 그나마 머리는 바깥으로 멀쩡히 드러나 있었지만,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쇠를 긁는 것처럼 탁하고 발음도 부정확했다.

“그거 다행이군. 진척도는 어느 정도?”

그러나 목소리를 들은 탐욕은 조금 전과는 딴판으로 환한 표정이었다. 다소 모습이 변하기는 했지만, 그의 앞에 있는 건 여전히 그의 연인이었다.

-거, 의, 다, 된, 것, 같, 아, 느, 낌, 상, 9, 할, 정, 도.

“얼마 안 남았군.”

일주일 전.

자이안 일행에게서 도망친 뒤에도 분노의 상태는 시시각각 심각해졌다.

시모스 왕은 망령이기는 했으나 그녀의 영혼과 깊이 이어져, 사실상 영혼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그걸 억지로 잘라냈으니 영혼이 크게 다치는 건 당연했다.

육신의 상처라면 모를까, 영혼의 상처는 탐욕으로서는 손 쓸 도리가 없었다. 동족 중에 전직 영혼 공학자가 한 명 있었다는 기억을 간신히 떠올렸지만, 이미 죽은 사람이다.

“괜찮아. 콜스. 내가 어떻게 되더라도…… 네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족해.”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라. 네가 죽으면 나도 그 자리에서 널 따라 죽을 거다. 반대로, 내가 먼저 죽으면 아리멜 너는 혼자서 살 수 있겠냐?”

“아니.”

“그럼 같이 살아날 방법을 찾아보자고.”

평범한 수단으로는 그녀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다.

생명력을 나눠 어떻게든 죽음을 미루고는 있지만, 그녀가 고통받는 시간을 더 늘릴 뿐이다.

아예 영혼 자체를 찢어서 나눠준다면 모를까…… 영혼을?

누가 연인 아니랄까봐, 둘은 거의 동시에 한 가지 해결책을 떠올렸다. 그러나 탐욕은 확신을 가지지 못해 망설였다. 분노가 먼저 그에게 제안을 했다.

“우리 영혼을, 하나로 합치는 거야.”

보통은 말도 안 되는 방법이다. 둘 모두 영혼 공학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할 뿐더러, 서로 다른 두 존재의 영혼을 융합하는 건 설령 전문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둘의 영혼은 다른 평범한 존재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찬탈자가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마족으로 재탄생한 순간부터 둘의 영혼은 직접적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상태로 헤아릴 수도 없는 까마득한 시간을 함께 보내며 둘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갔다.

“하지만 그걸…… 그렇게 탄생한 걸 우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탐욕이 망설인 이유였다.

영혼의 융합이 어렵지 않게 성공하리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영혼을 융합해 만든 새로운 영혼에, 콜시픽스와 아리멜이라는 존재의 흔적이 과연 남아 있기는 할까. 기억은, 감정은, 서로의 의식은?

“괜찮을 거야. 잘 될 거라는 예감이 들어.”

고통에 시달려 창백한 안색이면서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만약 잘 안 풀려도, 그건 그것대로 괜찮지 않을까? 어찌 보면 나와 콜스 사이의 아이라고도 할 수 있잖아.”

“아이라. 하하,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군.”

무책임할 만큼 낙관적이다. 그러나 그 말은 망설임을 지우고 흔들리는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탐욕은 결단을 내리고, 움직이지 못하는 분노 대신 준비를 시작했다. 필요한 건 대량의 마나. 다행히 둘이 도망친 서쪽 땅끝에는 마나 덩어리, 즉 마물이 아주 많았다.

탐욕은 마물을 눈에 띄는 대로 잡아 죽였다.

처음에는 얌전히 당하기만 하던 놈들이 시간이 지나자 거세게 저항하는 뜻밖의 사태도 있었으나, 그래도 큰 차질 없이 준비가 진행되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거의 모든 준비가 끝났다.

결과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할 수 있는 건, 분노가 그랬듯 낙관적인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뿐.

* * *

메마른 황야. 얼핏 보면 살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날카로운 직관을 가진 이라면 그 땅에 무시무시한 악이 도사리고 있음을, 그리고 그 악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올 듯 꿈틀거리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 숫자만 계속 늘어나고 있을 뿐이지.”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프레이가 무덤덤하게 상황을 보고했다.

파괴된 제1 저지선 너머, 끝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드넓게 펼쳐진 황야. 그곳에 마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일단 폭격으로 수는 줄여 놓기는 했는데, 별로 의미는 없는 것 같더라고. 죽이면 죽인 만큼 여기저기서 몰려들어서 금방 원래대로다.”

현재 확인된 수는 약 3만 5천. 터무니없이 많은 숫자이지만, 사실 자이안 일행에게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세계수의 숲에 머물면서 그들이 상대한 마물의 수는 적어도 그 수십 배에 달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달리 마물이 마족의 통제를 받는다는 차이가 있었다. 놈들이 일전과 마찬가지로 집요하게 진군해 혼전을 일으킨다면 힘든 싸움을 벌여야 할 것이다.

“한 가지 재밌는 건, 마물들이 지금 저들끼리 으르렁거리고 있다는 거다. 곳곳에서 내분이 일어난 흔적도 좀 보이더군.”

“그 말은…….”

“통제가 완벽하지 않다는 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생각보다 결전이 수월해질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불확실한 미래를 낙관해 대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지만.

“탐욕과 분노는 어때요?”

“아무 데도 안 보이더군. 상상 이상으로 땅이 넓기도 하고, 나조차 감지할 수 없을 만큼 꼭꼭 숨은 모양이야.”

가장 강력한 마법사이며 깊은 지식을 가진 프레이였지만, 마족의 MP 제어 능력은 문자 그대로 다른 차원에 걸쳐 있었다.

단순한 화력 비교라면 가볍게 압도할 수 있지만 순수하게 기술, 기교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지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일단 제가 생각해본 작전은 이렇소.”

백작이 꺼낸 작전은 아예 전면전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대신 저지선과 저지선 사이에 함정을 깔아 마물들의 발을 최대한 묶어 놓는다. 그 사이 병력은 주민들을 피난시키며 내륙으로 후퇴하고, 직접적인 상대는 자이안 일행이 맡는다.

자이안 일행에게 큰 부담을 지우는 작전이건만 정작 그들은 그게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백작은 부끄러움과 자책으로 눈도 못 마주칠 지경이었지만, 애써 담담히 설명을 마쳤다.

“나쁘지 않군. 어차피 일반 병력은 도움이 안 돼.”

“대신 저는 참전할 작정이오.”

“뭐? 네가 없으면 병사들 지휘는 누가 하고?”

“전반적인 지휘는 부관에게 맡기면 됩니다. 이래 뵈도 일리움을 대륙 열강에 올려놓은 최정예 병력이오. 고작 나 하나 자리에서 빠져나온다고 아무 것도 못 할 만큼 무능하지는 않소.”

프레이는 대답을 아끼며 잠시 자이안에게 시선을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자이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프레이는 뒤통수를 긁으며 백작에게 말했다.

“그래. 무리는 하지 마라. 죽으면 죽도 밥도 없다.”

“전쟁을 앞둔 무인에게 할 말로는 적절치 않은 것 같소만, 형님.”

“뭐, 죽더라도 훌륭한 무훈을 세우라느니 그런 소릴 듣고 싶냐? 네가 죽으면 가문은, 아직 10살도 안 된 바란드는 어쩔 건데? 객기 부리며 나댈 바에는 몸 사리며 살아 돌아가는 게 훨씬 낫다.”

생각지 못한 말에 백작은 깊이 침음했다. 그는 무인이지만, 동시에 가장이며 아버지이기도 하다. 과거 그는 책임을 저버리고 자식을 사지로 내모는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다.

“……형님 말이 맞소. 명심하겠습니다.”

“알면 됐다.”

간소한 회의를 마치고, 일행들은 각자 맡은 일을 위해 흩어졌다. 결전을 위해 준비할 일은 아직도 많았다.

* * *

미오네는 가슴팍, 정확히 심장 위에 두 손을 얹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의식을 집중하자 심장에 박힌 보석이 요란하게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힘이 혈관을 타고 퍼지며 전신을 뜨겁게 만든다. 기분 좋은 고양감을 느끼며 그녀는 작게 숨을 내뱉었다.

번쩍, 눈을 뜬 순간 눈앞의 공기가 일그러지며 거센 돌풍을 일으켰다.

칼바람이 방안에 휘몰아치며 곳곳에 제 흔적을 남겼으나 정작 미오네의 몸에는 자그마한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당연하다. 모든 마법은 기본적으로 술자의 안전을 보장해야 하니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미오네가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마법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리라.

미오네가 보석에 깃든 힘을 다룰 수 있게 된 건 얼마 전 별관 앞에서 난동이 벌어지고 난 직후였다.

밤잠을 설친 미오네는 오전 느지막이 일어났고, 아주 자연스럽게 마법으로 물을 만들어 몸을 씻었다. 물에 젖은 몸을 열풍으로 깔끔하게 말린 뒤에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았다.

그만큼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보석이 끊임없이 힘을 공급했고, 날이 갈수록 복잡한 마법도 손발을 움직이는 것처럼 가볍게 쓸 수 있게 되었다.

‘아바마마가 망령이 되어서까지 손에 넣고 싶어 할 만해. 이런 신기가 일리움 왕가에 계승되고 있었다니.’

미오네는 순전히 보석의 힘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 마법적 재능은 그녀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보석은 그 자질을 자극해 일깨우고, 증폭시켜준 것에 불과했다. 시모스 왕의 마법이 정신 지배에 특화되었던 것과 달리 미오네는 자연현상 제어가 특기라는 게 소소한 차이였다.

‘이 힘이 있다면.’

미오네는 날뛰는 힘을 가라앉히고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은 그녀의 키보다 한참 높은 위치에 나 있어서 원래는 의자를 밟고 올라서야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공중에 떠오른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에 보이는 안뜰, 그리고 그 너머 저택 본관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여기서 도망칠 수도 있을까?’

자이안이나 백작과 정면으로 싸울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우연히 강한 힘을 손에 넣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본질이 칼자루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무력한 여성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도망치는 것뿐이라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전쟁 준비다 뭐다 해서 영지 전체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유리아와 소아레스는 아직 왕도에 있다. 그녀가 이대로 몰래 사라져도 얼마간은 아무도 알아차리지도 못할 것이다.

나쁘지 않다. 권위도 재물도 모두 잃게 되지만, 그래도 강력한 마법의 힘이 남는다.

그녀는 자신의 마법을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응용할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일리움의 영향력이 전혀 미치지 않는 머나먼 타국으로 떠나, 이 힘으로 혼자서 새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마물이 일리움을 습격하건, 그래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죽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제 자신은 왕족도 뭣도 아닌데. 일전에 왕도에서 저지른 일은 그저 충동에 불과했다.

그녀가 이 좁은 방에 유폐되며 모든 권위를 잃은 순간,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책임 역시 사라졌다.

‘……바란드.’

그 순간 떠오른 건 아들의 얼굴이었다.

얼마 전 피난민 마을에서 본 그 모습을 미오네는 지금도 바로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공중에서 내려와 침대에 걸터앉아, 미오네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수 시간 뒤, 미오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리낌 없이 방을 나서는 그 얼굴은 망설임도, 자포자기도 아닌 결연한 의지로 넘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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