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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화 결전 준비(1) (167/210)


167화 결전 준비(1)
2023.03.19.


찝찝한 결말이기는 했으나, 어쨌든 소동 자체는 크게 번지지 않고 사태가 마무리됐다.

시모스 왕의 망령은 완전히 소멸했다. 동시에 아리멜과 콜시픽스, 아니, 분노와 탐욕 두 마족이 다시 적으로 돌아섰다.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은 셈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중요해요. 결국 원점으로 돌아갔을 뿐이잖아요?」

크룩스의 말은 위로라기에는 애매했다. 그저 담담하게 사실을 확인하는 것에 가까웠다. 사실 시모스 왕이라는 폭탄 하나를 완전히 처리했으니, 처음보다는 나아진 셈이기는 했다.

“제가 섣불리 공격하지 말고 좀 더 신중하게 행동했더라면…….”

“마음은 알지만, 그래도 별 의미는 없었을 거다.”

우울한 목소리로 자책하는 자이안을 프레이는 냉정하게 제지했다.

“콜시픽스의 말대로였어. 아리멜이 다치지 않고 망령만 쓰러뜨리는 방법은 없었다.”

마안으로 본 것을 뛰어난 기억력으로 기억해두고 있다가, 사태가 종식된 뒤 천천히 분석한 결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영혼에 간섭하는 건 우리로서는 까마득한 꿈의 영역이니까 말이지이.」

프레이의 마법, 아르스의 아티팩트, 유민의 치유. 그 어느 것도 소용없었으리란 게 최종적인 결론이었다.

“아리멜은 괜찮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적을 걱정하는 거냐?”

“저 때문에 다친 건 사실이잖아요.”

“그 두 마족 때문에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죽고 다쳤는지 떠올려봐라.”

애초에 동정하거나 죄책감을 가지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라는 뜻이었다. 자이안은 불편한 표정으로 침묵했으나, 이내 지그시 눈을 감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죽어야 정상인 상태였지만…… 아마 살아있겠지. 콜시픽스가 억지로 살려두고 있을 거야.’

어제 콜시픽스는 아리멜의 능력이라고 생각한 공간 이동을 사용해 감쪽같이 도망쳤다.

처음에는 단순히 콜시픽스 역시 비슷한 능력을 가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안으로 본 모든 것을 하룻밤 내내 분석하는 과정에서, 실제로는 조금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슷한 능력을 콜시픽스도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순간 일시적으로 아리멜의 능력을 빌려 쓴 거야.’

일전에 그는 자기들을 ‘상호의존적 관계’라고 표현했다.

그건 비유나 과장이 아니었다. 둘의 영혼은 망령과 아리멜의 연결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깊게 연결되어 있었다.

때문에 일시적으로 능력을 빌리거나 교환할 수도 있고, 죽어야 정상인 상대에게 억지로 자기 생명력을 불어넣어 연명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어떻게든 살려두고 사람이든 마물이든 잡아먹으면서 힘을 회복시키겠지. 힘이 완전히 회복되면 이를 갈면서 우릴 공격할 거고. 그때까지가 유예기간이다.’

이전의 침공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큰 규모의 침공이 시작될 것이다. 후회보다 먼저 이에 대비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백작에게 알려야 되는데. 잠깐. 이 인간은 어제 저택 부지에서 그런 소란이 벌어졌는데 코빼기도 안 보였네?”

그제야 다른 일행도 백작에게 신경이 미쳤다. 프레이의 말마따나 이상한 일이었다.

「가서 물어보면 알겠죠.」

어차피 보고를 하긴 해야 했으니, 자이안 일행은 이대로 곧장 백작에게 향하기로 했다.

“어제 말이냐? 괜히 너희들 싸움에 끼어들었다가 등 터질까 무서워서 병사들을 통제하고 있었다만.”

‘무서워서 숨어있었다’라고 들릴 수도 있는 말을 백작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당당하게 했다. 자이안은 허탈한 표정이었고, 프레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적어도 상황을 확인하기는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여기 집 주인 너잖아?”

“얌전히 기다리면 어련히 보고하러 와주겠거니 생각했소만, 형님. 그래서 말 안 해주실 겁니까?”

“이거 봐라. 점점 뻔뻔해지네.”

“형님이나 자이안 앞에서 되지도 않는 점잔 떨어봐야 뭐 하겠소?”

다시 한번 피식 웃은 프레이가 간밤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백작은 언제 뻔뻔하게 굴었냐는 듯 진중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전쟁을 준비해야겠군.”

“병력이 모자라지 않냐?”

“그렇다고 마물이 백성들을 학살하는 걸 뒷짐 지고 지켜만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는 못하더라도, 백성들이 안전히 도망칠 수 있도록 뒤를 지키기는 해야지.”

절망적인 상황을 앞두고 백작은 담담하게 제 할 일을 헤아릴 뿐이었다. 프레이는 미안함이 섞인 시선을 발치에 향했다.

“놈들을 막는 건 우리가 하마. 오해 때문이기는 해도, 우리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자이안 너도 형님과 같은 생각이냐?”

자이안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잘못된 판단으로 일어난 일이니, 제가 끝까지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러면 전선은 믿고 맡기마.”

회의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짧은 대화를 마치고, 뒤이어 자이안이 향한 곳은 별관이었다.

어제 싸움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냈던 미오네가 마음에 걸렸다. 괜히 허튼 생각을 하려는 건 아닌지 한번 확인해두고 싶었다.

“당신도 참 질리지도 않고 잘도 찾아오네요.”

여느 때와 같은 독설이 자이안을 맞이했다. 평소와 태도가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사실 절 좋아하기라도 하나 보죠?”

“예? 아니, 예?”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자이안은 아연히 눈을 끔뻑이며 반문했다. 그의 멍청한 표정을 감상한 미오네가 까르르 웃었다.

“농담이에요.”

“……제 평생 들은 것 중 가장 끔찍한 농담이었습니다.”

“후후. 그거 잘됐네요.”

평소와 비슷한 태도라고 생각한 건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제…… 그러니까. 으음. 시모스 왕의 망령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아하. 제가 걱정되기라도 했나 보죠?”

“아뇨. 걱정한 건 아닙니다만.”

그러나 생각해보니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우발적인 행동을 벌일까 우려했던 건 사실이니까.

“전 괜찮아요. 오히려 한 꺼풀 벗어던진 듯 홀가분한 기분인걸요.”

“홀가분?”

“왕실의 그림자. 왕족의 의무. 선왕의 명령. 그런 것들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됐잖아요. 지금이야 아직 알레프 부인이라는 허울뿐인 이름이 남아있지만, 그것도 조만간 떨어져 나가겠죠. 그러면 전 그저 아무것도 아닌 미오네가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미오네.”

그 말을 따라 하며, 자이안은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미오네가 뭔가 허튼짓을 할 것 같은, 그러나 조금 자이안이 상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일 것 같은. 그런 예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념으로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기념? 부탁?”

종잡을 수 없는 화법이었다.

대체 무슨 기념으로 뭘 부탁하겠다고? 애초에 그녀가 자이안에게 뭘 부탁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스스로도 그걸 아니까 억지로 강경하고 날카로운 모습을 보였던 게 아닌가?

“당신 호구잖아요. 어려운 걸 부탁하려는 것도 아닌데, 당연히 들어주겠죠?”

“……무슨 부탁인지 들어만 보겠습니다.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자이안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오네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바란드를 보고 싶어요.”

* * *

「……꼭 죽을 준비를 하고 주변을 정리하려는 것 같은데.」

바란드가 머물고 있는 피난민 마을까지의 거리는 말을 타고 1~2시간 정도.

자이안이 발로 뛰면 몇 분 만에 주파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미오네는 이왕이면 말을 타고 느긋하게 가고 싶다고 부탁했다.

들어줄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안 들어줄 이유도 없는 정말 사소한 부탁.

‘삼촌.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농담하는 거 아니다. 저러다가 갑자기 콱 혀 깨물고 죽을지도 몰라. 조심해라, 자이안.」

뜻밖에도 진지한 목소리에 자이안은 작게 신음을 삼켰다. 정말 그런 거라면 막아야 한다. 그건 죗값을 치르는 게 아니라 죽음으로써 도망치는 것에 불과하니까.

“지금쯤 왕도는 어떻게 됐을까요?”

“소아레스와 유리아가 잘 정리하고 있을 거예요. 특히 소아레스는 제국 황실의 중진이었으니, 믿고 맡겨도 됩니다.”

자이안과 미오네가 저택으로 돌아와 생긴 빈자리를 지금은 소아레스와 유리아가 임시로 맡고 있었다.

관료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미오네가 자기 이름을 걸고 신분을 보장했고 자이안 역시 자기 검을 걸고 능력을 보장했다.

지금은 이미 능력을 인정받아, 오히려 관료들이 둘에게 매달리는 실정이었다.

“다행이네요. 왕가는 이미 무너져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만.”

왕태자를 포함해 대부분의 왕족은 시모스 왕이 쓴 마법의 대가로 목숨을 잃었고, 운 좋게 살아남은 소수는 마족의 습격으로 공포에 빠져 도망쳤다.

뒤늦게 나타나 왕족의 권리를 되찾으려 했을 때는 이미 미오네가 관료들을 장악한 뒤. 지금은 사실상 왕성에 반쯤 유폐된 상태다.

“이대로 일리움이 무너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백성들이야 굳이 왕실이 없어도 잘 살아남을 테고.”

“그건 너무 극단적인 생각 같은데요.”

“어머. 그런가요?”

두서없는 대화를 나누며 속보로 달리기를 2시간. 멀리 피난민 마을의 모습이 보였다. 자이안은 좀 더 속도를 높이며 미오네를 인도했다.

피난민 마을은 어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분위기였다. 어제 반나절 정도 바란드와 함께 피난민들을 도우며 부대낀 자이안에겐 익숙한 분위기였다.

미오네는 그렇지 않았다. 굳은 표정으로 마을을 둘러본 미오네가 작게 탄식하며 말했다.

“상상 이상으로 열악하네요.”

뜻밖이라는 심정에 자이안은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봐요?”

“지저분하다느니 악취가 진동을 한다느니 그런 소리가 나올 줄 알았는데요.”

눈을 동그랗게 뜬 미오네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대로 씻지도 못했을 피난민들이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거야 당연한 일이죠. 이들이 조금이나마 풍족하고 쾌적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다스리는 게 우리 역할이고요.”

“…….”

자이안은 뭐라 할 말이 없어 침묵했다. 왕도에서도 마주한 모습이지만, 솔직히 미오네의 이런 태도는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바란드는 어디에 있죠?”

“바란드는…….”

마침 부상병 천막 안에서 바란드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이안은 크게 손을 들어 그를 부르려 했으나, 그 순간 미오네가 말없이 팔을 뻗어 그를 가로막았다.

“알릴 필요 없어요. 그냥 멀리서 지켜보고 싶을 뿐이에요.”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미오네는 조용히 바란드의 모습을 시선으로 쫓기 시작했다.

한 아이가 어두운 표정으로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지저분한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으며 다음 천막에 들어가려던 바란드가 그 아이를 발견했다. 기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바란드는 홀로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거죠? 당신이라면 들리잖아요?”

미오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이안은 두 아이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미오네에게 그 내용을 전했다.

“엄마가…… 흐끅. 엄마가 돌아오질 않아. 열 밤만 자면 돌아온다고 했는데…….”

“금방 오실 거야. 아버지는 어디 계시니?”

“아빠는, 저기에…… 훌쩍.”

아이가 가리킨 곳은 부상병 천막 중 하나였다. 바란드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됐다.”

“뭐가……?”

“너희 아버지 말이야. 금방 나으실 거야. 내가 조금 전에 보고 왔거든.”

“저, 정말? 아빠랑 이제 만날 수 있는 거야?”

“물론이지. 음…… 다섯 밤. 다섯 밤만 더 기다릴래? 그러면 분명 너희 아버지께서 널 찾아올 거야. 어머니는…… 어머니도 걱정하지 마. 다섯 밤만 자면 분명 아버지와 함께 돌아올 거야.”

“진짜로……? 하지만 어른들이, 우리 엄마는 이미 늦었다고…… 흐윽…….”

“아니야. 분명 꼭 돌아오실 거야. 그러니까 울지 말고 기다리자. 부모님께서 돌아오셨는데 네가 울고만 있으면 분명 슬퍼하시겠지?”

“……응. 엄마가 나는 웃는 얼굴이 제일 예쁘댔어.”

“정말? 한번 웃어볼래?”

“응…… 헤헤.”

“진짜네. 정말 예쁘다.”

웃음을 되찾은 아이와 잠시 더 대화를 나누고, 기사들에게 돌아간 바란드가 그들에게 아이의 어머니를 찾을 수 없겠냐고 물었다.

기사들은 난색을 표했다. 하기 싫은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럴 만한 인력이 없었다.

짧은 순간 바란드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강인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기사들에게 꾸벅 인사하며 감사를 표한 뒤, 바란드는 다시 부상병 천막으로 향했다.

백성들을 위해 헌신하는 그 모습을, 미오네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오래도록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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