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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화 망령(4) (166/210)


166화 망령(4)
2023.03.18.


한번 잠에서 깨고 나니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간신히 의식이 흐려져 갈 무렵,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기까지 했다.

눈을 질끈 감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미오네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한밤중에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람.”

눈살을 찌푸리며 불평을 뱉었다가, 심장 박동이 엄청나게 빠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병을 의심할 정도로 심상치 않은 속도였다. 미오네는 가슴을 억누르며 심장에 자리 잡은 보석의 존재를 의식했다.

‘말을 들어. 넌 그저 도구일 뿐이야.’

아까보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심장은 다시 잠잠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시 마음 편히 잠들 수가 없었다. 바깥에서 벌어지는 소란이 숙면을 방해하기도 했고, 지금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기묘한 예감이 가슴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미오네는 허락 없이 방 밖으로 나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유폐 중인 그녀에게 허락된 공간이 이 작은 방뿐이니까 당연한 일이기는 했지만, 사실 감시가 느슨해서 나가려면 얼마든 몰래 나갈 수도 있었다.

간간이 유혹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 번도 거기에 넘어간 적은 없었다.

죄를 인정하지 못하고 꼴사납게 발버둥을 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어느새 담담하게 자신의 죄를 받아들이게 됐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자이안에 대한 증오도 시간이 지나며 옅어졌다.

식사를 받을 때처럼 아주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중 대부분을 대화할 상대도 없이 홀로 지내는 상황.

끝도 없이 증오에 사로잡히기만 하는 건 스스로에 대한 학대일 뿐, 그 고독을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게 된 것은 아니다.

언젠가 자이안에게 했던, 그를 확실하게 죽이지 못한 과거의 자신을 후회한다는 말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후회해도 과거는 뒤집히지 않는다. 미오네는 자이안에게 패했다.

‘그냥 무시하고 싶지만…….’

지금 밖으로 나가봐야 한다는 예감. 이 감각에 심장에 자리 잡은 보석이 관여하고 있는 건 확실했다.

의지도 없는 물건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 같아 내키지 않지만, 석연치 않은 기분도 있었다.

보석은 원래 시모스 왕의 심장에 있던 것이다. 갑자기 보석이 이렇게 자기를 괴롭히는 것도 시모스 왕과 관련된 무언가 때문이 아닐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잠깐만 볼까.’

결국 미오네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옷장에서 단출한 외출복을 꺼내 스스로 갈아입고, 잠옷은 잘 정리해 개어둔 뒤 천천히 방을 나섰다.

“……아바마마?”

별관 앞에는 이상한 대치 구도가 펼쳐져 있었다.

자이안의 삼촌이라는 남자.

마물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거대한 검은색 괴물.

그 둘과 대치하고 있는 처음 보는 여자.

그러나 무엇보다 미오네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여자의 배후에 보이는 반투명한 형상이었다.

-왕가의 보물! 제 발로 찾아왔구나!

왕의 망령이 미친 듯이 웃었다. 프레이는 급히 마법을 펼치며 콜시픽스에게 말했다.

“미오네를 지켜! 망령의 목적이 바로 저 여자다!”

프레이가 두 손을 크게 휘저어 아리멜을 가로막는 견고한 결계를 펼쳤다.

그러나 왕이 가소롭다는 듯 노려보자 급격하게 구조가 뒤틀리더니 삽시간에 붕괴했다. 프레이는 작게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MP 제어력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제기랄. 마족의 힘을 이용하고 있는 건가.’

마족은 MP를 손발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종족. 아리멜을 지배한 망령이 그 힘을 강제로 쓰고 있다면 놈이 프레이의 마법을 이렇게 쉽게 파훼할 수 있는 게 납득이 됐다.

살상력이 없는 단순한 구속용 마법으로는 놈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비실체 존재에 직접 간섭하는 마법.’

다시 한번 고기압의 고리가 아리멜의 몸을 묶었다.

순식간에 파훼됐지만, 눈속임에 불과했다. 그 사이 마법을 완성한 프레이가 손가락을 내밀어 망령에게 향했다.

보이지 않는 선이 놈과 손가락 사이에 이어지고, 다음 순간 망령이 크게 몸을 떨었다.

-으으으아악……!

강렬한 고통을 주는 마법이다. 망령이 고통을 못 이겨 미친 듯이 몸을 비틀었고, 지배력이 약해진 것인지 아리멜의 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축 처졌다.

“아리멜!”

눈을 부릅뜬 콜시픽스가 아리멜에게 달려 나갔다.

“야 이 미친! 미오네를 지키라고!”

“웃기지 마! 내게 중요한 건 아리멜뿐이다!”

콜시픽스가 힘없이 비틀거리는 아리멜을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그 순간 망령이 눈을 번쩍 떴다.

-너도 지배해주마!

망령이 콜시픽스에게 손을 뻗었다.

마법이 파훼당한 것은 아니다.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보다 더 끔찍한 집념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프레이는 급히 반대 손을 뻗으며 한 가지 마법을 더 사용했다.

번개의 사슬이 콜시픽스를 후려쳐 멀리 날려버렸다. 그의 머리를 붙잡으려던 망령의 손아귀가 애꿎은 허공만 휘어잡았다.

-흐흐흐……! 이놈이고 저놈이고, 나의 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망령이 스산하게 웃으며 프레이를 노려보았다.

-그래, 좋다. 내게 지배당하지 않을 거라면, 이 자리에서 모두 죽여주마!

망령의 형체가 폭발적으로 부풀었다.

목을 콱 조르는 듯한 위압감에 프레이는 인상을 썼다.

놈은 아리멜의 힘을 거리낌 없이 쥐어짜고 있었다. 그 결과 프레이조차 위압감을 느낄 만큼 강력해졌지만, 반대로 아리멜은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설상가상으로 미오네의 존재까지 있었다.

인상을 쓰고 설명을 요구하는 그 태도에 프레이는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설명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시원하게 전부 때려 부수고 싶었다.

“보고도 모르겠냐? 이미 뒤진 놈이 망령이 돼서 네 심장에 들어가 있는 보석을 노리고 있는 거잖아.”

“아바마마가 대체 왜 그런 짓을?”

“염병하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신경질적으로 소리친 프레이가 전방에 결계를 펼쳤다. 기술이라고도 할 수 없는 단순무식한 MP의 분류가 결계를 후려치며 섬광과 굉음을 사방에 흩뿌렸다.

프레이는 마안으로 놈을 노려보며 타개책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반가운 기척을 느끼고 홱 고개를 들었다.

새카만 밤하늘 한가운데에서 환한 빛이 반짝였다. 별의 반짝임을 닮은 그것이 빠른 속도로 지상을 향해 가까워졌다. 프레이는 표정을 풀고는 얕은 한숨을 뱉었다.

“빨리도 온다. 태평한 자식.”

-뭐냐? 이 느낌은 대체…… 으오오오오?!

스펙트럼이 망령의 형체를 무자비하게 반으로 갈랐다. 쿠웅! 자이안의 몸이 아리멜의 등 뒤에 착지하며 둔한 땅울림을 일으켰다.

-아프다. 아아아앗……!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아프단 말이다!

“아흑! 끄으윽……!”

망령이 고통으로 온몸을 비틀며 사방으로 무식하게 MP를 발산했다. 그럴 때마다 아리멜도 식은땀을 흘리며 비명을 터뜨렸다.

“일단 공격하기는 했습니다만……. 삼촌,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프레이가 핵심만 간추려서 상황을 설명했다. 얘기를 모두 들은 자이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시모스 왕. 죽어서까지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했군요.”

-자이안! 내게 지배당하기에 합당한 존재! 어찌 나를 공격할 수가 있느냐!

“당신에게 지배당할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당장 아리멜의 몸에서 떠나십시오.”

-그럴 순 없다! 일리움은 나의 것이야! 왕가의 보물도! 오직 나만이 자격을 가지고 있다! 오직 나만이 모든 것을 지배할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논리라고는 없이 억지로 떼를 쓰는 어린애처럼 보였다.

직설적이고, 감정적이다. 그런 만큼 생전에는 노련하게 숨겨왔던 진의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아바마마…….”

복잡한 심경이 뒤섞인 미오네의 말은 망령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

자이안은 흘깃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프레이와 눈빛을 교환했다. 둘은 피해가 확산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망령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미오네는 서글픈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시선은 오직 아리멜의 배후에 보이는 왕의 망령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를 존경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가족으로서 정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일리움을 위하는 마음은 자신과 같다고 생각했다. 다소 편집증적인 경향이 있기도 했으나, 그 역시도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한 깊은 고민의 반동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지배한다니. 그런 유치한 생각을 하고 계셨던 건가요?’

실망감? 어쩌면 배신감일지도 몰랐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생각으로 그의 명을 따랐던 지난날의 자신마저 우습게 느껴졌다.

적어도 암군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암군도 이런 암군이 없었다. 그나마 능력이 있어서 나라가 그럭저럭 굴러갔던 것이다.

간간이 실책을 펼친 것도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능력은 있는데 마음가짐이 글러 먹어서 일어난 일이었다.

‘난 지금까지 뭘 위해 살아온 거지.’

좌절에 마음이 약해진 순간, 보석의 힘이 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박동이 강해지고 반대로 의식은 점차 흐려졌다. 미오네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망령이 추악하게 뒤틀린 얼굴로 웃었다.

-그래! 그거다! 미오네! 어서 내게 보석을 바쳐라!

한 걸음 내디딘 순간, 미오네는 피가 맺힐 정도로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흐리멍덩한 눈에 강한 빛이 돌아왔다.

“……아바마마.”

거친 숨을 고르며 미오네가 입을 열었다.

“당신처럼 추한 인간은 아무것도 지배하지 못할 거예요.”

가슴을 꾹 누르며 강하게 윽박질렀다.

주인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멍청하고 쓸모없는 보석. 강한 매도에 풀이 죽기라도 한 듯, 보석의 존재감이 급격하게 약해졌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미오네를 바라보던 망령의 표정이 다음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뒤틀렸다.

-미오네에에에엣!

직후, 스펙트럼이 망령의 목을 베었다.

* * *

“안 돼!”

프레이가 만들어준 틈을 파고들어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순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콜시픽스의 외침이었다. 자이안은 짧은 순간 의아함을 느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벌어진 일에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 으…… 아아아아아아악!”

아리멜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터뜨렸다.

그녀를 지배하던 망령은 형체를 잃고 흐릿해졌으나, 비명은 점점 더 커졌다.

제어를 잃고 아무렇게나 날뛰는 MP의 폭발이 자이안을 거칠게 튕겨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프레이의 곁에 착지한 자이안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망령을 소멸시키면 되는 것 아니었어요?”

“나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마법이면 모를까, 영혼에 관한 것은 힘의 마안을 가진 프레이로서도 금방 상황을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생소한 영역이었다.

급박한 전투 중에 알아낼 수 있었던 건 많지 않았다.

단순히 망령이 아리멜의 몸을 지배하고 멋대로 그 힘을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망령과 아리멜이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더 깊게 연결되어 있었던 거라면…….

“아리멜!”

콜시픽스가 급히 달려와 아리멜을 끌어안았다. 전투 중에 콜시픽스는 이상하리만치 소극적이었다. 단순히 자기 연인을 공격하기 꺼려져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망령과 아리멜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알고 있었던 거라면.

“콜록. 콜록. 케흑.”

MP의 폭주는 점차 잦아들었다. 그 대신 아리멜은 콜시픽스의 품에 안긴 채 힘없이 마른기침을 했다. 진흙처럼 새까맣고 질척거리는 피가 콜시픽스의 가슴을 더럽혔다.

“아리멜, 괜찮아. 아직, 아직…….”

금방이라도 꺼질 듯 연약한 호흡을 반복하는 아리멜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며, 콜시픽스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친 자이안은 숨을 삼켰다.

“협상은 파기다.”

증오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콜시픽스가 말했다.

“이건 우리 책임이 아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애초에 넌 우리한테 아리멜이 이렇게 될 거라고 알려주지도 않았잖아.”

프레이가 나직한 말투로 콜시픽스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 깃든 증오의 불길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내가 미리 말을 했다면?”

얼음장처럼 싸늘한 목소리였다.

“망령을 죽이면 아리멜도 위험해질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렸더라면? 그러면 망령을 공격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뒀을 건가?”

자이안도, 프레이도 말문이 막혔다.

물론 아리멜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고 망령을 죽일 방법을 찾아봤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런 방법이 없다면, 망령을 죽이기 위해 아리멜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면.

“그렇다고 해서, 당신들을 자유롭게 풀어줄 수는 없습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자이안은 둘의 앞을 가로막았다. 콜시픽스는 입매를 뒤틀며 웃었다. 싸늘한 비웃음이었다.

“본색을 드러내셨군.”

“미안합니다. 아리멜은 어떻게든 저희가 치유해드릴게요.”

“너희들의 능력으로는 아리멜을 못 고쳐.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협상은 파기다.”

서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이제 대화와 호의로 그 간격을 메우는 건 불가능하다.

자이안은 입술을 깨물며 스펙트럼을 겨눴다.

“다음에 만날 때는…….”

프레이는 언제든 마법을 펼쳐 둘을 죽일 준비를 했다.

“너희 모두를 죽일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다.”

다음 순간 둘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허?”

프레이가 멍청히 탄성을 뱉었다. 자이안도 얼빠진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이런 염병할!”

진실을 깨달은 프레이가 격하게 욕설을 뱉었다. 공간 이동은 아리멜만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동안 우릴 철저하게 속인 거군.”

머리를 쥐어뜯은 프레이가 허탈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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