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망령(3)
(165/210)
165화 망령(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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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망령(3)
2023.03.17.
“아리멜!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홀린 것처럼 오두막 밖으로 나가려는 아리멜을 콜시픽스가 급히 붙잡았다. 그러나 아리멜은 거친 힘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콜시픽스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리멜의 근력은 동족들 중에서는 굉장히 약한 편이다.
그러나 조금 전 그녀가 보여준 우악스러운 힘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아리멜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가야…… 해. 보물을…… 되찾아…….”
“아리멜! 정신 차려!”
콜시픽스가 다시 한번 아리멜을 붙잡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가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팔이 멋대로 튕겨나갔다.
“칫……!”
낭패한 듯 혀를 차고 찢어진 손아귀를 털며, 콜시픽스는 최후의 수단을 결심했다.
그의 온몸이 검은색으로 물들며 부풀어오르듯 변형했다. 시커먼 거구가 좁은 오두막을 꽉 채우듯 모습을 드러냈다.
“아리멜! 내 목소리를 들어! 현혹되지 마!”
콜시픽스는 두꺼운 두 팔을 늘여 아리멜을 거의 구속하듯 그 자리에 붙잡았다. 거친 반동이 느껴졌으나 이번에는 콜시픽스가 힘에서 앞섰다.
더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아리멜이 그를 휙 돌아보았다. 완전히 뒤집혀 흰자위가 드러난, 섬뜩하게 충혈된 눈이 그에게 향했다.
“방해…… 하지…… 마!”
또다시, 아리멜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괴력으로 콜시픽스의 구속을 벗어났다. 온몸이 뒤틀리며 뼈가 탈구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아리멜이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콜시픽스는 어쩔 수 없이 구속을 풀었다.
아리멜은 고통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으로 뒤틀린 관절을 뚝뚝 맞추고는 다시 밖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제기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무언가가 아리멜을 조종하고 있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대체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프레이를 위시한 자이안 일행이었다. 일시적으로 협력하고 있지만 결국 적대적인 관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우릴 마음대로 조종하는 게 가능했다면 처음부터 했겠지.’
콜시픽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들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아리멜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거다.’
아리멜이 기어코 오두막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콜시픽스는 우선 그녀가 경계하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그 뒤를 쫓았다. 그러나 아리멜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췄다.
“재밌는 일이 일어나는 모양이구만.”
그 앞에 전신을 아티팩트로 무장한 프레이가 서 있었다.
“프레이. 아리멜의 상태가 이상하다.”
“그런 건 보기만 해도 알아. 왜 이상한 건지는 아직 분석 중이다만.”
금색으로 이글거리는 두 눈동자가 아리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때 잠시 멈춰 섰던 아리멜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딜 멋대로 가려고?”
프레이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아리멜의 발아래가 꾸물거리며 움직이더니, 흙더미가 불쑥 솟아 그녀의 두 발을 묶으며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던 아리멜은 앞으로 꼬꾸라질 뻔한 몸을 겨우 가누고는 무표정하게 자기 발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분석 중이니까, 다 끝날 때까지만 얌전히…….”
꽈앙! 요란한 굉음에 프레이가 입을 다물었다. 가녀린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쳐 단단한 흙을 산산이 부숴버린 아리멜이 한 차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갗이 찢어져 피가 뚝뚝 떨어지는 주먹은 신경 쓰지도 않고, 이내 그녀의 눈동자가 프레이에게 향했다.
“방해. 하지. 마.”
“허어.”
프레이는 놀란 듯 가볍게 탄성을 뱉었다.
아리멜이 보인 괴력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등 뒤에 안개처럼 흐릿하게 보이는, 난생처음 보는 새로운 에너지 덩어리 때문이었다.
정황상 그 에너지가 아리멜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프레이의 마안이 갑자기 고장이라도 난 게 아니라면, 그 에너지는…….
“……유령?”
흐릿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야. 해. 보물을. 되찾아.”
마치 남의 입을 빌려 억지로 말하는 것처럼 이상한 데에서 뚝뚝 끊어지고 억양도 제멋대로인 목소리였다. 프레이는 다시 한번 마법으로 그녀를 구속하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보물이라니? 뭘 되찾겠다는 거지?”
“왕가의. 보물.”
“왕가의……? 설마 왕홀의 핵을 말하는 거냐?”
“보물을. 되찾아.”
대화가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말을 듣지 않는다기보다는, 애초에 할 줄 아는 말이 그것뿐인 듯했다. 정황상 정체불명의 유령이 아리멜을 지배하고 있으니, 그 유령에게 남은 목적이 ‘왕가의 보물’을 되찾는 것이겠지.
‘왕가의 보물에 집착하는 유령이라?’
프레이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이봐. 콜시픽스. 얼마 전에 우리가 왕도에서 싸웠을 때 말이다. 그때 왕은 이미 죽어 나자빠져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정확히 어떻게 죽은 거냐?”
“뭐? 뜬금없이 그런 걸 왜 물어봐?”
“아리멜을 제정신으로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프레이의 말에 콜시픽스는 즉시 대답했다.
“놈의 마법을 빼앗고, 마법의 대가로 영혼이 갈가리 찢어지기 전에 아리멜이 그 영혼을 먹었다. 약해진 힘을 회복할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하.”
예상대로의 대답에 프레이는 저도 모르게 짧게 웃었다.
“지금 아리멜은 그때 흡수한 왕의 영혼에 지배당하고 있다.”
“뭐?”
콜시픽스가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는 표정을 했다.
“이봐. 네가 인간이라서 뭘 잘 모르는 모양인데, 그런 건 불가능해.”
“불가능한지 아닌지는 나나 네가 정하는 게 아니다. 지금 확실한 건 네 애인이 왕의 집념에 잡아먹혀 왕가의 보물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만 반복하는 꼭두각시가 됐다는 거야.”
현실을 들이미는 날카로운 말에 콜시픽스는 뭐라 반론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러는 사이 아리멜은 오두막에서 한참이나 멀어져 있었다.
그녀가 향하는 방향에 있는 건 미오네가 유폐된 별관. 그녀가, 정확히 그녀를 지배하고 있는 왕의 유령이 미오네의 심장과 융합한 아티팩트의 핵을 원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국민은 물론 제 목숨까지 거리낌 없이 마법의 제물로 바친 미친놈이다. 보석을 되찾은 다음 하려는 일 역시 멀쩡할 리가 없지.’
“놈을 막아야겠군. 콜시픽스, 협력해라.”
마음 같아서는 거부하고 싶었지만, 아리멜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라 수가 없었다. 콜시픽스는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묘한 동맹 관계를 이룬 둘은 아리멜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 * *
-느껴진다. 보물의 존재가. 보물. 응당 내가 가져야 하는 것이지. 오직 나만이 보물을 가질 자격이 있다.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아리멜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의 말이 무조건 옳다. 그의 말이 무조건적인 진리다. 의문 따위는 품지 않았다. 이상함도 느끼지 않았다.
아리멜은 그 강렬한 사념에 완전히 지배당한 상태였다.
콜시픽스가 말했듯,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다.
시모스 왕의 영혼은 이미 오래전에 완전히 소화됐다.
아무런 의지가 없는 단순한 에너지가 되어 아리멜과 동화되었다는 뜻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 아리멜을 조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단 하나, 동화되지 않고 남은 것이 있었다.
먹고 남은 찌꺼기 같은 것.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져버려야 정상인 것. 뒤틀린 신념으로부터 비롯된 강한 집념이었다.
-나는 불멸이다. 일리움을 위해 불멸이어야 한다. 오직 나만이 일리움을 통치할 수 있다. 내가 바로 완전하며 절대적인 일리움의 군주다.
그것을 ‘영혼’이라고 표현하는 건 사실 잘못됐다.
잔류한 사념, 시모스 왕의 영혼이 존재했던 흔적 같은 것이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무언가를 찾아 헤매며 영원히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망령’이다.
“왕은. 불멸.”
-그래. 나는 불멸이다.
그러나 그 망령이 평범한 인간이 아닌 마족의 몸을 점령하면서 일이 틀어졌다.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영혼이 사라진 뒤에도 남을 정도로 강한 집념은 자기주장이나 감정 기복이 적은 아리멜에게 있어 천적이었다.
찬탈자와 연결되어 있는 마족의 고등한 영혼은 찌꺼기에 불과한 왕의 사념이 어설프게나마 자의식을 되찾게 만들어줬다.
망령의 힘이 점차 강해졌고, 수면 아래 조용히 숨어 있던 그의 의식이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 마침내 아리멜의 의식을 역으로 지배했다.
-네가 어떤 존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강한 존재라면 누구든 내 지배를 받을 자격이 있지. 어서 나의 바람을 이뤄다오.
“왕께. 충성을.”
가까운 거리에 별관의 모습이 보였다.
보석은 가장 위층 구석진 방에 있었다. 아리멜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나 별관에 들어서기 전, 하늘에서 떨어진 시커먼 거구가 그녀의 앞에 내리꽂히며 앞을 막아섰다.
“아리멜. 미안하다.”
콜시픽스가 주먹을 내질렀다.
가슴팍을 얻어맞은 아리멜의 몸이 붕 떠올라 뒤로 날아갔다.
동족에 비해 신체 능력이 약하다고는 해도 그녀 역시 마족.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알고는 있지만, 연인에게 손찌검을 하고 말았다는 사실 자체가 착잡한 심정이었다.
“감상에 잠기는 건 다 끝나고 난 뒤에 해도 안 늦는다.”
프레이가 뒤이어 날아왔다. 번개의 사슬 대신 고기압의 고리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는 아리멜의 사지를 묶었다.
익숙하지도 않은 속성의 마법으로 위력조절까지 하는 건 귀찮은 일이었지만, 프레이 역시 아리멜이 크게 다치는 건 바라지 않았다. 마계로 향하려면 그녀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구속은 금방 풀릴 거다. 저 망령을 떼어낼 방법을 알아봐야겠으니, 잠깐 시간을 좀 끌어…….”
-무엄하다! 감히 왕의 앞길을 막아서느냐!
강렬한 호통이 둘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마안을 연 프레이의 눈에도 흐릿하게만 보이던 형체가 급격히 뚜렷해졌다.
아리멜의 배후로 마침내 반투명한 형태가 완전한 모습을 갖췄다. 한손에 왕홀을 쥔 피투성이의 남자. 시모스 왕이었다.
“이런 젠장. 우리가 괜한 짓을 했나?”
바로 전까지만 해도 왕의 망령은 이렇게까지 강하지 않았다. 눈앞에 장애물이 나타나자 자의식이 더욱 또렷해지며 급격히 강해진 것이다.
-무엄한 것들! 썩 꺼져라!
망령이 거칠게 왕홀을 휘두르자 아리멜을 구속하는 마법이 파열음을 내며 부서졌다.
MP의 흐름에 자유롭게 간섭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 능력에 프레이는 작게 신음을 뱉었다.
‘자이안을 불러와야겠군.’
제압할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프레이가 거리낌 없이 힘을 발휘하면 필연적으로 커다란 파괴를 불러온다.
안전하게 제압하려면 보조를 해줄 전력이 필요한데, 콜시픽스는 솔직히 그다지 미덥지 않았다. 자이안이나 크룩스라면 완벽하게 프레이를 보조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일단 여길 벗어나야 하나. 마음껏 힘을 써도 거리낄 거 없는 황무지 같은 데로…….’
그 순간 갑자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차, 하는 낭패스러운 감정이 뒤늦게 찾아왔다. 건물 앞에서 이런 소란을 벌이고 있는데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아바마마?”
미오네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