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망령(2)
(164/210)
164화 망령(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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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화 망령(2)
2023.03.16.
바란드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붕대를 벗기고, 상처를 확인하고 소독하고 약을 바른 뒤 다시 붕대를 감는 단순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바라보는 병사의 얼굴은 감격으로 울먹거리기 직전이었다.
그 혼자만 감정이 과잉된 건 아니었다.
알레프에 충성을 바치는 입장에서, 솔선수범해 나서며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는 그 모습을 보면 누구나 감격에 겨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처가 많이 나았네요. 식사 거르지 말고 꼬박꼬박하시고, 며칠만 더 쉬시면 걸어 다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별말씀을요. 이런 것밖에 해드리지 못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웃으며 인사를 나눈 바란드가 다시 옆의 병상으로 향했다.
영도에서 말을 타고 2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
이곳은 지금 피난민과 부상병들의 임시 거주지로 쓰이고 있었다. 원래 주민들 중에 불만을 드러내는 이도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알레프는 특히 일반 백성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는 이름이었다. 직접적으로 그 이름 아래 보호를 받는 영민들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과장 좀 보태서 숭배의 대상이었다.
바로 그 아들이 부하를 시키는 것도 아니고 어린 몸으로 손수 나서서 부상병과 피난민들을 돕고 있는 것이다.
바란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는 병사들의 충성심을 강하게 다지고 백성들이 더욱 단결하도록 유도하는 결과를 낳았다.
‘상상 이상이네.’
그 모습을 자이안은 눈에 띄지 않도록 기척을 죽이며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기껏해야 식량 배급을 돕는 등 가벼운 일을 생각한 자이안은 한 방 먹은 심정이었다. 단순한 일이기는 하지만, 환자의 수발을 든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란드를 얕본 게 아니다. 아이니까 체력 문제도 있고, 호위로 따라온 기사들이라고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방해하지 않는 게 좋겠어. 이따가 쉴 때 말을 걸어야겠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바란드는 도무지 쉴 줄을 몰랐다. 부상병들 수발이 끝나니 점심시간이었고, 곧장 식량 배급을 도왔다.
수십 명의 피난민에게 음식을 나눠준 다음에는 그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불편한 점이 없는지 등을 물었다.
대답하는 피난민들도 거리낌이 없는 걸 보면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렇게 피난민들의 의견을 듣고 요청을 들어주다 보면 이미 늦은 오후.
그러면 바란드는 다시 한번 부상병들이 모인 의료용 천막을 찾아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는지, 돌발 환자는 없는지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
보고 있는 자이안이 혀를 내두를 만큼 빡빡한 일정이었다.
“바란드.”
결국 자이안이 바란드에게 말을 건 것은 저녁 식사가 얼마 남지 않은 짧은 휴식 시간 중이었다.
“엇? 혀, 형님?”
아무것도 없는 공터 한가운데에 앉아 물을 마시며 땀을 닦고 있던 바란드가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뒤늦게 자이안의 접근을 깨달은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으려다가 얼굴을 확인하고 엉거주춤하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버지한테 네가 여기서 피난민들을 돕고 있다고 들었거든. 도와줄 일이 없을까 해서 왔지.”
그리 말하고 자이안은 하하, 가볍게 웃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바란드 혼자서 이렇게 잘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대단한데?”
직설적인 칭찬에 오히려 바란드의 표정은 흐려졌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자이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니? 힘들어?”
“아뇨, 형님. 그런 게 아닙니다. 그저…….”
바란드는 두 손으로 물통을 감싸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제가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희생 위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 기분입니다.”
백작은 영민들의 상황이 많이 안정되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류상으로는 그 말이 맞았다. 그러나 현실은 서류 위에 있지 않다. 아직 피난민들의 생활은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식량은 하루 한 끼. 영양이 풍부한 식사와는 거리가 먼, 간소한 보존식이다.
잘 곳이 없어 임시로 세운 허름한 천막이 마을 곳곳에 즐비했다. 씻거나 옷을 갈아입는 등 위생적인 행위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부상병들의 환경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전에 자이안과 유민이 활약한 덕분에 중상자들은 모두 치료됐지만, 아직도 병상에서 일어서지 못한 채 부족한 약과 의원들 때문에 실의에 빠져 있는 이들이 많았다.
“제가 이분들께 해줄 수 있는 건 정말 작고 보잘것없는 도움에 불과해요. 겨우 그 정도로 대단하다는 소리를 듣다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리 말하고는 볼을 긁으며 힘없이 웃는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변명이 아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표정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자이안은 복잡한 심경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겉치장이 없는 바란드의 진심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란드. 혹시…….”
그러나 턱 끝까지 치밀어 오른 질문을 자이안은 결국 꺼내지 않고 다시 삼켰다.
구체적으로 명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지금 바란드에게 알레프를 떠나 자유롭게 살아볼 생각이 없냐고 묻는 건 어쩐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
“아니. 아무것도 아냐.”
손을 조금 들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이안은 조금 전 바란드가 그랬던 것처럼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바란드는 피난민의 모습을 보며 어두운 표정을 했지만, 자이안의 눈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분명 열악한 환경이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까지 어둡지는 않았다. 막막한 미래를 앞두고 좌절해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발버둥 치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의 표정을 한 번 자세히 보렴.”
사람들이 그런 얼굴을 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분명 지난 며칠간 헌신한 바란드의 존재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힘든 환경 속에서 어려운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는 건 분명해. 하지만, 바란드. 저 사람들이 지금 상황에 힘들어하고 좌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그 말에 바란드는 다시 한번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천천히, 하나하나 각자의 표정을 모두 확실히 눈에 담으며.
자이안은 그 눈동자에 서서히 어떤 종류의 불씨가 자라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열정이기도 했고, 의욕이기도 했다. 또 어찌 보면 강한 자기반성과 새로운 결의이기도 했다.
“제가 참으로 어리석었네요.”
바란드가 다시 말했다. 스스로를 탓하는 말인 건 똑같았지만, 조금 전과는 전혀 표정이 달랐다. 피난민들의 표정이 투영된 듯, 바란드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았다.
“바란드.”
자이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그러니까 만약의 이야기인데. 지금처럼 귀족의 의무나 후계자라는 자리에 얽매인 삶이 아니라, 알레프를 떠나 일리움을 떠나, 책임과 의무를 내려놓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아?”
“예?”
다소 맥락 없는 질문에 처음에는 의아한 기색이던 바란드가, 조금 뒤 뭔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지고,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자유라. 분명 멋진 삶이겠네요. 하지만, 형님.”
바란드가 나직하게 말했다. 무거운 목소리에 담긴 엄한 질책에 자이안은 흠칫 놀랐다.
“저는 저분들을 저버릴 수 없어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귀족의 의무라서, 제가 알레프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그래요. 책임을 저버리고 싶지 않다. 그게 옳은 표현일 거예요. 형님께서 언젠가 제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저 스스로 그게 가장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그게 제 마음이 바라는 길이니까.”
바란드의 시선이 자이안에게서 벗어나 마을로 향했다. 백성들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따뜻했다.
“힘없고 죄 없는 많은 이들을 위해, 저는 가장 낮은 곳에서 기꺼이 모든 책임을 짊어지겠습니다.”
그것은 군주의 자질이었다. 시모스 왕에게서도, 알레프 백작에게서도 느끼지 못한 진정한 군주의 자질.
자이안은 감탄한 나머지 한숨을 뱉을 뻔했다. 그러나 바란드의 옆모습이 너무나 경건한 나머지 급히 소리를 삼켰다.
“형님의 인생에도, 형님께서 걷고 계시는 그 길에도 분명 큰 의미가 있을 거예요. 형님께서 자유롭게 여행하시며 많은 이들을 구했듯, 저는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많은 이들을 구할 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형님.”
“……미안. 바란드.”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형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알고 있어요.”
바란드는 미소를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한 번 크게 기지개를 폈다.
“슬슬 다시 피난민들을 도와줘야겠어요. 형님께선 어쩌시겠어요?”
“나도 도울게. 애초에 그러려고 왔던 거니까.”
“형님께서 도와주시면 지금보다 더 많은 분들을 도울 수 있겠네요.”
‘더 편해지겠다’가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을 도울 수 있겠다’라고 말하는 걸 보고 자이안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바란드는 그 모습을 눈치채지 못하고 먼저 걷기 시작했다.
‘정말 과분한 아이야. 이 나라에, 이 작은 땅에 있기에는 아까운 아이이지만…….’
문득, 한 가지 상상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성인이 된 바란드가 왕좌에 앉아 알레프뿐만 아니라 일리움 전체를 다스리는, 다소 허황된 상상.
‘앞으로 일리움에는 바란드가 필요하게 될 거야.’
당당하게 앞서나가는 바란드의 등을 보며, 자이안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 * *
미오네는 맥락도 없이 잠에서 깨어났다. 사위가 깜깜했다. 눈을 깜빡거리며 창문을 바라보니, 밤의 장막이 짙게 드리운 늦은 시간이었다.
‘뭐지?’
주섬주섬 침대에서 일어난 미오네가 가슴을 감싸 쥐었다.
‘심장이…….’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빨랐다. 혈류가 전신의 혈관을 흐르는 감각이 기묘하리만치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격하게 흥분한 상태와 비슷했다. 눈살을 찌푸리며 스스로를 다스리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아니, 이건 심장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홀로 끙끙거린 끝에, 간신히 위화감을 깨달았다. 심장이 이상해진 게 아니다. 심장 속에 자리 잡은 무언가가 심장을 이상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건…… 그래. 그때 아바마마 몸에서 빠져나온 이상한 보석.’
자이안과 함께 왕도에 머물고 있을 때 프레이가 시간을 내 찾아와 가볍게 검사를 했지만, 아무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다.
프레이의 추측은 둘 중 하나였다. 완벽하게 안전하거나, 짐작할 수도 없이 위험하거나.
자이안이 미오네의 곁에서 유심히 상태를 살폈으나, 지금까지는 위험한 징후가 드러난 적이 없었다.
‘마치 날 어딘가로 끌고 가려는 느낌.’
며칠에 걸친 관찰 끝에 자이안은 일단 안전한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어쩌면 그 판단은 틀린 것일지도 몰랐다.
“흥.”
미오네는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심장에 자리 잡은 보석의 존재를 의식하고 다시 심호흡을 하자, 신기할 정도로 쉽게 박동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로 돌아왔다. 미오네는 한껏 비웃음을 머금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의지도 없는 보석 따위가 나를 갖고 놀겠다고? 어림도 없지.’
길을 가다 무심결에 발견한 불결한 벌레를 밟아 죽인 것 같은 뒤틀린 통쾌감을 느끼며 미오네는 다시 눈을 감았다.
조금 떨어진 오두막에서 무슨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