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망령(1)
(163/210)
163화 망령(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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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화 망령(1)
2023.03.15.
어둠 속에서,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나는…….
천천히, 자신의 목소리를 확인하듯 조심스럽게 소리를 냈다.
-나는, 불멸이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내가 불멸인 한, 일리움 또한 불멸이리라.
* * *
“……?”
아리멜은 불현듯 눈을 떴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침이라 말하기엔 너무 이른 새벽녘. 오두막의 낡은 창문 새로 보이는 하늘은 곧 다가올 일출을 예고하는 검푸른 빛이다.
둘이 쓰기엔 다소 좁은 침대. 아리멜과 콜시픽스는 그 위에 딱 달라붙듯 서로를 끌어안은 채 누워 있었다.
콜시픽스의 목소리였을까? 싶었지만, 그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꿈……?’
신기한 일이었다.
찬탈자에게 잡아먹힌 뒤로는 단 한 번도 꿈을 꾼 적이 없었다.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는 건, 그만큼 찬탈자의 영향력이 약해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아리멜……?”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콜시픽스가 흐리멍덩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멜의 작은 움직임에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응. 아무것도 아냐.”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아리멜이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잠시 가만히 있자, 다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리멜도 다시 눈을 감았다. 찬탈자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는 막연한 예감과 함께,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미오네가 다시 알레프에 돌아온 건 일주일만이었다.
“왕도의 혼란을 수습하는데 큰 활약을 했다고 들었소.”
그녀를 대하는 백작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대로 틈을 노려 자취를 감춰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성실하게 제 할 일을 다 하고 자이안에게 업혀 얌전히 영지로 돌아왔다.
“뭘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에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 제가 했을 뿐이죠. 다른 형제들한테 맡기자니 못하더라고요.”
빈말이 아니라 미오네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백작의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보상을 노리고 한 게 아니라고? 그럼 이대로 다시 미오네를 유폐해도 괜찮은 건가?
“더 할 말 있나요? 없으면 전 방으로 돌아갈게요.”
정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인사를 하고 미오네는 제 발로 별관으로 향했다.
백작은 얼이 빠진 얼굴로 그 등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자이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여자, 뭔가 좀…… 변한 것 같지 않으냐?”
“정확한 이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고생을 심하게 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싱겁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그렇다고 자이안이 뭘 숨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본인도 정말 잘 몰라서 아무렇게나 대답한 것이리라.
“어쩌면 변한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저것 역시 미오네의 본성의 일부라는 겁니다. 그걸 지금까지 저희가 볼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죠.”
의미심장한 말에 백작은 작게 침음을 뱉었다. 흘깃 그를 바라본 자이안이 화제를 돌렸다.
“영민들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좀 안정됐나요?”
“너 갈 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 아직 처리할 게 산더미 같긴 하지만, 그건 시간에 따라 차차 해나가야 할 일이고.”
희소식이었다. 자이안은 망토를 벗어 팔에 걸며 빙긋 웃었다.
얼마간 영지의 상황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 가볍게 의견을 나눈 뒤, 자이안은 다음으로 두 마족이 머물고 있는 오두막을 찾아갔다.
미오네의 일을 돕는 도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 찾아보기는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잠깐씩 지켜본 것에 불과했다.
‘제대로 보는 건 지난번 협상 이후로 처음인가.’
오두막으로 가는 길에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프레이였다. 다른 각성자들은 일을 마친 뒤 모두 지구로 돌아갔지만, 프레이와 아르스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어 이쪽에 머무르고 있었다.
“왔냐? 이번엔 또 얼마나 있다 갈 거냐?”
“왕도는 어느 정도 정리됐습니다. 미오네도 돌아왔고요. 인수인계도 했으니 또 사고라도 터지지 않는 이상 다시 안 가도 됩니다.”
“오호. 마침내!”
모처럼 듣는 희소식에 프레이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마족들은 어때요?”
“오두막에서 거의 나오지도 않고, 힘을 회복한다고 안에서 깨작거리는 게 다다.”
프레이의 할 일은 자이안을 대신해 마족들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아직 그들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당장 얌전히 있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었다.
“저놈들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건 확실하다. 아마 적당히 협력하는 척하다가 우리에게서 도망칠 셈이겠지.”
그들이 제대로 마계로 향하는 길을 열어준다면, 그리고 도망친 뒤 사람들을 해치지 않고 얌전히 지낸다면. 백 보 양보해서 눈감아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을 자신과 동등한 지성체로 여기고 있지 않다. 그저 먹이에 불과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
프레이는 지난 며칠간 대화를 나누고 감시하면서 이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들이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자이안과 프레이가 자신들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곳에서 도망쳐 자유의 몸이 된다면? 이유 없이 인간들을 학살하지는 않더라도, 필요한 상황이라면 거리낌 없이 사냥할 것이다.
“다행히 아티팩트 개발은 순조롭다. 아르스 말로는 늦어도 일주일 내로 시제품이 완성될 거라고 하더군.”
아르스는 둘의 목숨을 해치지 않고, 힘을 모으는 걸 방해하지도 않으면서, 원하는 순간 언제든 둘을 구속할 수 있는 복잡한 메커니즘을 가진 아티팩트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쉽지 않은 과제였으나 아르스는 희희낙락하며 몰두했다.
아티팩트 개발에 특화된 자기 능력도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자이안은 왕도에 머무는 도중 MP가 뭉텅이로 소모되는 감각을 몇 번이나 느꼈다.
“굉장히 오래 걸리네요. 거의 한 달 동안 붙잡고 있는 것 같은데.”
“마족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생물이니까. MP를 다루는 능력은…… 뭐랄까. 아예 차원이 다른 느낌이다. 우리가 MP를 도구처럼 다룬다면, 저쪽은 아예 자기 신체의 연장선 같이 쓴다고 해야 하나. 손발을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감각이지.”
MP를 다루는 능력이 강함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프레이는 탐욕, 콜시픽스가 가진 능력의 상세와 한계를 재빠르게 간파하고 이를 역이용해 그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을 완벽하게 구속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만드는 건 그런 편법 같은 걸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실패하진 않을 거다. 아티팩트 개발에 대해서만은 거짓말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녀석이니까.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뒤, 자이안은 잠시 오두막 쪽에 시선을 향했다. 그러나 결국 두 마족을 만나지는 않았다.
자이안은 프레이와 헤어져 다시 저택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바란드를 찾았다. 그러나 바란드는 안뜰에도, 자기 방에도 없었다.
“뭐? 아, 내가 말하는 걸 깜빡한 모양이구나.”
설마 하는 마음에 다시 백작을 찾아가니,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바란드는 지금 외출 중이다. 피난민들을 구호하는 일을 돕고 있을 거다.”
“……구호요?”
“그래.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하더구나. 피난민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제 눈으로 보고, 작은 것이나마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고 싶다고.”
그리 말하는 백작의 눈은 따뜻했다.
얼마 전, 그러니까 자이안이 돌아오기 전의 백작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태도였다.
그 시기였다면 따뜻한 눈으로 바란드의 행동을 설명하기는커녕, 그 아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관심도 없었으리라.
“훌륭한 아이야. 내 아들이라는 사실이 과분할 정도로.”
“그러게요. 어쩌다 미오네와 아버지 사이에서 그런 애가 태어났는지 모르겠네요.”
“……그건 칭찬이냐? 칭찬이겠지? 우리 자이안이 아무리 삐뚤어졌어도 자기 아비 면전에 대놓고 욕을 하진 않을 게야, 암.”
“욕하는 건데요? 그리고 ‘우리 자이안’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좀 기분 나빠요.”
짓궂은 농담으로 분위기를 조금 환기하고, 자이안은 백작에게 바란드의 위치를 물었다.
백작은 대답하는 내내 충격이라도 받은 듯 창백한 안색이었지만, 아마 기분 탓이었을 것이다.
‘과분한 아이라.’
백작에게 얘기를 듣고 저택을 나오면서, 자이안 역시 그 말에 공감했다.
‘알레프, 일리움 같은 틀에 얽매이는 게 아까울 정도로 과분한 아이지.’
다시 망토를 두르고, 자이안은 영도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마을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백작의 말에 따르면 지금 바란드는 그 마을에 있다고 한다.
‘한번 바란드와 제대로 얘기를 나눠볼까. 후계를 이을 생각이 있는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지는 않은지.’
빠르게 속도를 내며, 자이안은 뭐가 진정으로 바란드를 위한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 * *
천천히 눈을 뜨며, 아리멜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 집중이 잘 안 되네.’
힘을 모은다는 건 길고 지루한 작업이었다.
그녀의 능력은 제한 없이 자유로운 공간이동. 한 번 가본 장소는 물론이고, 아예 한 번도 간 적 없는 장소조차 복잡한 연산을 거쳐 순식간에 좌표를 특정해 이동할 수 있다.
공간이동에 준비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고, 별다른 징조도 없다. 다른 동족들조차도 아리멜의 공간이동은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차원 간 이동은 그런 그녀에게도 제법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MP의 소모도 크고 준비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 혼자서 이동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해야 한다면 부담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왜 이러지. 머리가…….’
머릿속에서 노이즈 섞인 잡음이 울리는 것만 같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인상을 쓰며 이마를 짚자, 콜시픽스가 그 변화를 알아차렸다. 곁에서 힘을 모으는 일을 돕던 그가 눈을 뜨고는 걱정스런 표정을 했다.
“왜 그래?”
“응. 그냥, 집중이 잘 안 돼서.”
“그럼 억지로 할 필요 없지. 오늘은 이쯤 하고 쉬자고. 어차피 시간 많아.”
자이안 일행에게 제시한 ‘세 달’이라는 기한은 기만이었다.
짐을 여럿 달고 차원 이동을 하는 게 부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넉넉잡아 한 달이면 충분했다.
일부러 기간을 길게 잡은 이유는 그 사이에 상대를 회유하거나 도망칠 기회를 잡기 위해서였다.
“응. 그러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아리멜이 저도 모르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마치 먼 곳에 있는 무언가를 집중해서 보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가야 해.”
머리속의 잡음이 커지는 것 같았다.
“뭐라고?”
영문모를 말에 콜시픽스가 반문했다. 이어 그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우려 섞인 표정으로 아리멜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아리멜? 괜찮아?”
“가야 해.”
“가다니? 갑자기 어딜?”
어깨를 붙잡는 손을 떨쳐내고 아리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잡음이 점점 더 커졌다. 노이즈가 고막을 찢을 듯 시끄럽게 지직거렸다.
그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묘하게 귀에 익은 목소리.
-어…… 물을…… 라!
잡음이 머리를 울릴 것처럼 커지고, 그 속에서 목소리도 점점 더 커졌다.
-왕가의 보물! 그건 누구도 아닌 나만의 것이다!
그 목소리가 익숙한 이유를 아리멜은 마침내 깨달았다. 꿈속에서 들은 목소리였다.
-보물을 되찾아라!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