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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협상(2) (162/210)


162화 협상(2)
2023.03.14.


“그렇게 죽일 듯이 싸워놓고 이제 와서 협상이라니? 무슨 개소리야, 이건?”

“입이 꽤 험한 친구로구만. 마음에 드는데.”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은 날카로운 말을 듣고도 프레이는 넉살 좋게 받아칠 뿐이었다.

“너무 흥분하지 말고, 일단 얌전히 들어봐라. 너희들에게도 나쁜 얘기는 아닐 거다.”

당장 사지를 찢어발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간신히 몸만 지탱하고 있는 팔은 사람은커녕 종이 한 장 찢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숨을 몰아쉬며 프레이를 노려보던 콜시픽스는 결국 긴 한숨만 한 차례 뱉었다.

“들어는 보마.”

“그렇게 나와야지. 멀쩡히 대화가 통하는 상대끼린데, 이성적으로 타협점을 찾아야 하지 않겠냐?”

장난스럽게 웃은 뒤, 프레이는 본격적으로 화두를 꺼냈다.

“먼저, 너희들에게 질문이다. 자세히 보니 서로를 본명으로 부르는 것 같은데. 과거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고 봐도 되는 거냐?”

“……무슨 소리지?”

“마계로 넘어가 찬탈자에게 잡아먹히기 전, 이쪽 세계에서 선주 인류로서 살아가던 시절의 기억이 있냐는 소리다.”

“……!”

콜시픽스는 눈을 부릅뜨고는 얼어붙었다.

무표정하게 듣고 있던 아리멜도 놀란 표정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콜시픽스를 치유하기 위해 투항했으나,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당연히 자이안 일행이 마족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도 지금 와서 알았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설마……!”

“우린 지금까지 너희 둘을 제외한 마족, 아니, 대속자라고 해야 알아듣겠군. 대속자 5명을 모두 만났다. 제정신인 놈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놈도 있었지만, 결국은 모두 죽었지.”

“아. 그런 거였나.”

콜시픽스가 김빠진 얼굴로 몸에 힘을 뺐다. 그대로 침대 위에 엎어질 뻔한 것을 아리멜이 급히 잡아 부축했다.

“난 또 동족들 중 누가 살아남아서 너희를 끄나풀로 쓰는 건가 했는데…… 하긴, 너희처럼 강한 인간들이 동족들의 뒤치다꺼리나 할 리는 없겠지.”

“호오. 우릴 꽤 고평가하는구만.”

“직접 싸워봤으니까.”

태연함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프레이를 마주하고 있는 지금 콜시픽스의 본능은 계속해서 경종을 울려대고 있었다.

상대는 언제든지 자신의 목숨을 거둬갈 수 있는 위험한 적이라고.

다른 동족들이라고 다르겠는가. 콜시픽스는 자신이 교만에 비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동족들 중에서 무력이 꽤 강한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반응을 보니 옛날 일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군.”

“그래. 기억이 돌아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왜 알고 싶은 거지?”

“너희를 마물과 다를 바 없는 괴물인지, 대화가 통하는 지성체인지 확실히 정해야 하니까. 지금부터는 후자라고 여기도록 하지.”

프레이는 천천히 다른 마족들과의 만남을 풀어놓았다.

교만을 시작으로 음욕과 폭식. 그들이 직접 죽인 적. 시기와 나태. 마족이 아닌 선주 인류로서 나름대로 그들에게 힘이 되었던 이들.

“대단한 일을 겪었다는 건 알겠다. 그 중심에 자이안이라는 그 어린 인간이 있다는 것도. 그런데 자이안 본인은 어디 가고 네가 협상을 하고 있는 거냐?”

“걔는 지금 바빠. 너희가 깨어났다는 얘기를 전하니 어떻게든 여유를 내서 돌아오겠다고 하긴 했는데…… 음? 잠깐.”

갑자기 말을 끊은 프레이가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콜시픽스는 마나의 움직임을 통해 그가 원시적인 통신 마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청을 시도하려 했으나, 약해진 몸은 아주 미약한 마나만 다루려 해도 온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은 고통을 호소했다.

“괜찮아? 무리하지 마, 콜스.”

그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차린 아리멜이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녀를 걱정시킬 수는 없다는 생각에, 콜시픽스는 허튼 생각을 포기하기로 했다.

“귀신같은 녀석이구만. 지금 오고 있다는데?”

“그 자이안이라는 인간이?”

“그래. 얼마 안 걸릴 것 같으니 기다리자고.”

잠시 고민한 콜시픽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안과 마주한 건 목숨을 건 전투에서뿐. 싸울 필요가 없을 때에는 어떤 성격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프레이가 시종일관 태평한 지금은 더더욱.

“도착한 모양이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콜시픽스의 위기 감각이 프레이와 맞먹는 위험한 적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시끄럽게 알렸다. 저도 모르게 긴장으로 몸이 굳고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삼촌! 지금 도착했습니다!”

허름한 문이 벌컥 열렸다.

땀과 흙먼지를 뒤집어쓴 자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반갑습니다. 으음, 당신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마족?”

“콜시픽스다. 탐욕의 대속자니까 탐욕이라고 불러도 되고. 그 마족이라는 건 너희 세계의 말이냐?”

“……분노. 아리멜티에나.”

“그럼 콜시픽스, 아리멜티에나라고 부르겠습니다. 아, 마족이라는 단어는…….”

콜시픽스는 평상시 자이안의 인상을 금세 단정 지었다.

‘그냥 착해빠진 어린애 같은데.’

마물들을 물리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일 거라느니 이번에는 놓치지 않을 거라느니, 살벌한 소리를 하던 인간과 동일인인가 싶었다.

처음에는 시끄럽던 위기 감각도 자이안과 몇 마디 나누며 시간을 좀 보내니 잠잠해졌다.

찬탈자에게 한 번 잡아먹힌 뒤로 심적인 부분에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겪기는 했으나, 그래도 천년 넘게 수백억을 다스리던 때의 경험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자이안의 속마음을 짐작해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결국 우릴 용서해줄 생각은 없어 보여. 하지만 한편으로 그런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큰 짐으로 느끼고 있군.’

그를 잘 구슬려 여기서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잠깐 생각했으나, 뒤에 선 프레이를 보고 얌전히 포기하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판단을 고민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 부류의 인간이다. 누가 그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비난하면 욕이나 한 사발 퍼붓고 자기 갈 길 계속 가는 인간.

“결론부터 우선 말씀드리면…….”

서로 탐색하는 듯한 질문이 몇 번 오간 뒤, 자이안이 본론을 꺼냈다.

“저희는 찬탈자를 찾아 죽이려 합니다.”

“……?”

콜시픽스는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자이안이 정신이 나갔거나.

“불가능해.”

콜시픽스에 비해 감정 기복이 적은 아리멜이 곧바로 반론했다.

“그건 ‘죽인다’는 개념이 존재하는 생명체가 아냐.”

“하지만 어쨌든 존재하고 있기는 하죠. 그럼 싸워서 없앨 방법이 있기는 할 겁니다. 실제로 제 어머니는 놈과 싸워봤어요. 죽이지는 못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지만.”

“뭐?”

난생처음 듣는 얘기였다. 이번을 제외하면 쭉 마계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그런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다.

“나이아 알코스라는 이름의 여자다. 전혀 모르는 거냐? 그 녀석 말로는 너희하고도 싸워본 적이 있다고 했는데.”

“나이아…… 알코스……?”

“아윽!”

갑자기 아리멜이 신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붙잡았다. 콜시픽스는 급히 그녀를 부축하려 했으나 그 순간 그 역시 강렬한 두통에 사로잡혔다.

나이아 알코스라는 이름. 분명 처음 듣는 그 단어가 그의 기억을 마구 헤집으며 바늘로 뇌를 쿡쿡 찌르는 듯한 고통을 가하고 있었다.

“뭔데. 갑자기 왜들 저래?”

“나이아…… 나이아 알코스……!”

어느 순간, 두통이 씻은 듯이 가라앉았다. 그 대신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던 기억 일부분이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위화감이었다. 기억 일부가 흐릿하다고? 그런데 왜 아무 의문도 느끼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거지?

“찬탈자다!”

그다음으로 찾아온 감정은 분노였다.

“그 괴물이 우리 기억을 건드렸어!”

“뭐라고?”

“빌어먹을. 아리멜, 괜찮아? 머리는 어때?”

“응. 이제 괜찮아졌어.”

긴 한숨을 뱉은 뒤 콜시픽스는 다시 자이안 일행을 돌아보았다.

“너희 말대로다. 우리는 나이아 알코스라는 이름의 인간 여자와 싸운 적이 있어. 그리고…… 죽었다.”

프레이의 표정이 굳었다. 반면 자이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당신들이 이미 죽었다면, 여기 있는 당신들은 뭡니까?”

“찬탈자가 되살린 거다! 우리 몸도 영혼도 모두 그 자식 손아귀에 있으니까! 되살리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기억을 빼버린 거겠지. 한 번 죽었다 살아난 기억이 남아있으면 제대로 말을 안 들을지도 모르니까.”

“……흐음.”

프레이는 짐짓 담담한 표정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이 모두 나이아에게 한 번씩 당했다는 사실은 알겠다. 그럼 더 우리를 믿을 만하지 않냐? 난 그 녀석 오빠고, 얘는 그 녀석 아들이다.”

“그 여자의 가족이라고? 어쩐지 이상하리만치 강하더라니…….”

콜시픽스는 이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가진 정보를 기반으로 차근차근 손익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너희를 마계로 안내해줄 수는 있다. 아리멜의 힘이라면 가능해. 준비가 좀 필요하지만.”

마침내 콜시픽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찬탈자와의 싸움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는 없다. 놈은 우리를 멋대로 조종할 수 있어.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심해지지. 우리가 어설프게 너희와 함께 해봤자 방해만 될 거야.”

“기대도 안 했다. 길만 열어줄 수 있으면 충분해. 그놈 약점이나 습성 같은 것도 알려주면 더 좋고.”

“약점이라…… 일단 아는 건 모두 말해주마.”

콜시픽스의 선택은 적극적인 협조였다.

찬탈자를 죽인다는 목적 자체는 이득이면 이득이지 결코 손해 볼 게 아니었다. 기억과 자아를 되찾은 뒤로 가장 큰 목적은 놈에게서 완전히 도망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죽고 나면 자유가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콜시픽스는 신중하게 줄을 잡아당겼다.

“조건? 아, 살려달라고?”

프레이는 흘깃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리멜티에나. 우리에게 투항할 때, 뭐든지 할 테니 콜시픽스를 구해달라고 말했죠.”

“……!”

흠칫 어깨를 떤 아리멜이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

“나, 난 어떻게 돼도 괜찮아. 하지만 콜스는 안 돼.”

“아리멜을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협상은 결렬이다. 죽을 때까지 네놈들을 쫓아다니며 괴롭힐 거다.”

사나운 말에 자이안도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어차피 너희를 마계로 데려가려면 나와 아리멜 둘 다 살아있어야 해. 나와 아리멜은 어느 한쪽이 죽으면 다른 쪽도 급격하게 약해지는 상호의존적 관계니까.”

“쯧.”

어쩔 수 없음을 깨달은 프레이가 작게 혀를 찼다. 자이안이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다시 두 마족을 응시하며 자이안의 머리도 바쁘게 돌아갔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생살여탈권은 이쪽이 쥐고 있는데 정작 그걸 무기로 쓰는 건 상대 쪽이라니.

게다가 그들의 목숨이 정말 적절한 죗값이 될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찬탈자는 얼마든지 그들을 되살릴 수 있으니까.

-일단은 나도 마계로 갈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연구해 보마. 저번에 한 번 보긴 했으니,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겠지만…….

은밀하게 전해진 프레이의 통신에 자이안은 아주 미세하게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어차피 너희 모두를 데리고 마계로 가려면 시간이 좀 필요해. 적게 잡아도 세 달?”

“왜 그렇게 오래 걸리냐? 너희 둘은 금방금방 휙 오가던데.”

“우린 찬탈자에게 묶인 신세이지만, 너희는 아니니까. 게다가 숫자도 많고. 준비할 게 많아. 어설프게 준비했다가 아리멜에게 부담을 지우고 싶지도 않고.”

“그럼, 세 달입니다.”

자이안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이상의 유예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콜시픽스는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세 달 내에 힘을 키우면서 이곳에서 도망칠 수단을 확보해야 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이는데, 섣불리 트집을 잡을 수도 없고. 일이 괜히 복잡하게 꼬이는군. 차라리 되든 안 되든 고문이라도…… 제길. 그러다 뭐 하나 잘못되면 진짜 돌이킬 수 없어진다.’

프레이는 답답한 심정을 물도 없이 퍽퍽한 고구마만 먹는 기분으로 삼켜야만 했다.

‘세 달. 찬탈자만 죽이고 나면 이 모든 게 끝날 거야. 이 둘의 처벌이라든가…… 복잡한 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자이안은 어찌 됐든 하나가 매듭이 지어졌으니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서로의 생각이 복잡하게 휘몰아치는 허름한 오두막 안에서 협상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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