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화 협상(1) (161/210)


161화 협상(1)
2023.03.13.


미오네는 그 자리에서 임시지휘 본부의 수립을 선언하고 철두철미하게 관료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두려움에 질려 뿔뿔이 흩어진 병사들도 어찌어찌 그러모아 민간 통제 임무를 맡겼다.

미오네는 쉴 새 없이 전해지는 보고의 작은 단어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보고 내용이 허술하거나 일의 진행이 지지부진할 때는 자기보다 나이가 두 배는 되는 관료들을 가차 없이 윽박지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혼란을 수습하고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열정적이기까지 했다. 어찌 보면 뜻밖이었고, 어찌 보면 어울렸다.

‘미오네도 뼛속부터 악인은 아니라는 걸까. 인간의 본성은 악이 아니라 선…….’

복잡한 심정이었으나 자이안은 성실히 왕도의 혼란 수습 작업을 도왔다.

돕겠다고 먼저 말을 꺼낸 게 자신이기도 했고, 왕의 자만심 때문에 벌어진 사건에 휘말린 왕도의 백성들이 안타깝기도 했다.

“기분은 어떻습니까, 미오네? 어디 아프거나 이상한 느낌이 드는 부분은 없고요?”

“전 괜찮으니까 시킨 일이나 마저 해줘요.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는 당신이 가장 유능하니까, 당신이 이렇게 놀고 있으면 그만큼 효율이 떨어져요.”

자이안은 일을 돕는 도중 틈틈이 미오네의 상태를 확인했다. 미오네 역시 말은 퉁명스러워도 꼬박꼬박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지금으로서는 잠잠하지만, 아까 전 그녀와 융합된 아티팩트의 핵이 어떤 식으로 그녀에게 영향을 끼칠지 몰랐다. 그게 부정적인 영향일지 긍정적인 영향일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

“뭔가 이상한 거 같으면 바로 말해야 합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요.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쓰러져버리면 모든 게 무용지물이 되니까.”

이 정도 소란을 단번에 깔끔하게 정리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하루아침에 집이나 가족을 잃고 떠돌이 신세가 된 이들이 문제였다. 평민도 있지만, 귀족이나 관료들도 만만찮게 많았다.

“왕도가 이런 처참한 몰골이 된 건 모두 선왕께서 그릇된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왕실에서 적절한 배상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나마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해지고 최소한의 여유가 생기자, 이번에는 어디서 소식을 들은 귀족들이 미오네를 찾아왔다.

어느 의미로는 참으로 대단한 작자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악착같이 이득을 챙기려 들다니.

“파덴 자작. 보면 알겠지만 왕실은 지금 의무를 행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하지만 자작께서는 스스로의 의무를 망각하신 것 같네요.”

“왕녀?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저는 왕실 내각의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 임시로나마 왕권을 대리하고 있습니다. 왕실에 대한 충정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면, 자작. 당신 역시 지금은 제 명을 따라야 합니다.”

“하…….”

파덴 자작이 비웃음을 머금으며 손을 들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열 명 남짓한 병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면서도 무기를 꺼내 들었다.

상황을 확인하고 이리로 찾아오는 그 짧은 새에 병사들을 매수한 모양이었다. 대단한 수완에 헛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억누르며, 미오네는 슬쩍 자이안을 돌아보았다.

“이런 건 당신 일이죠?”

대답 대신 자이안이 움직였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미오네는 전혀 보지 못했다.

자이안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북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병사들이 무기를 놓치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땅에 떨어진 무기는 아주 깔끔하게 두 조각으로 절단이 나 있었다. 미오네로서는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도 없는 무위였다.

“파덴 자작이라고 했던가요?”

“뭐, 뭐?”

“이대로 감옥에 갇힐 건지, 아니면 얌전히 저희 일을 도울 건지 선택권 정도는 드리겠습니다.”

“…….”

자이안의 물음에 자작은 시커멓게 죽은 안색으로 무릎을 꿇었다.

정작 미오네는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그는 바라보지도 않고 자이안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 표정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괴물.’

자이안은 별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어깨만 한 차례 으쓱였다.

-그래서, 지금 그 여자 옆을 지키고 있다고? 오지랖을 부려도 참…… 이젠 감탄밖에 안 나온다.

-왕도를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미오네만큼 적극적으로 혼란을 수습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 없어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누가 그런 게 궁금하대? 그런 건 나도 알아. 내가 우려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 너 무슨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삼촌, 제가 농담 삼아 호구 소리 듣고 다니고 저도 스스로가 그런 놈이라는 거 잘 아는데, 그 정도로 앞뒤를 못 가리지는 않습니다.

프레이는 자이안이 혹시 감정에 치우쳐 죗값도 치르지 않은 미오네를 용서하면 어쩌나,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이안은 걱정을 드러낸 프레이가 놀랄 정도로 단호하게 부정했다.

해가 지고 몇 시간이 지난 깊은 밤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왕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지는 않아도 될 만큼 상황에 여유가 생겼다.

각성자들에게 제대로 말도 없이 왕도로 훌쩍 떠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리고, 자이안은 우선 프레이에게 통신을 걸었다. 겸사겸사 그에게 자문을 구할 문제도 있었다.

-흐음. 아티팩트의 핵이 미오네와 융합했다고.

-예. 아직은 별다른 이상징후가 없기는 한데…… 왕의 시체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립니다.

자이안 일행이 왕도에 도착했을 때 왕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때는 마족들과의 전투에 집중하느라 신경 쓰지 못했지만, 다시 미오네와 함께 왕도에 찾아와 왕의 시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이상함을 눈치 챘다.

왕의 시체에는 외상의 흔적이 없었다.

뒤늦게 의아함을 느낀 자이안은 백마법으로 간단하게 시체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야 확신을 가졌다. 왕은 갑작스런 쇼크와 발작, 심장 마비 등의 사인으로 죽었다.

-왕이 무리하게 아티팩트의 힘을 끌어내려 했고, 그 반동으로 자멸했다. 정황상 그게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미오네도…….

-그건 직접 보기 전까지는 모르겠다. 네 말만 가지고 판단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적어.

문제는 프레이가 당장 저택을 비울 수가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지금은 얌전하지만, 마족들이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몰라. 적어도 아르스가 봉인용 아티팩트를 완성하기 전까지는 난 여기서 못 움직인다.

-알겠습니다. 사태가 수습되는 대로 미오네를 데리고 제가 가겠습니다.

-너무 늦지 마라.

우려 섞인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통신이 끝났다.

자이안은 프레이의 마지막 말을 곱씹으며 미오네에게 향했다.

임시로 세운 허름한 천막은 밤이 늦었음에도 환한 불로 밝혀져 있었다.

안에서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 의견을 나누는 목소리, 종이를 넘기고 서류를 작성하는 소리 따위가 어지러이 섞여 들렸다.

늦지 않게 돌아가려면, 지금보다도 더 힘내야 할 것 같았다.

* * *

오래된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과거의 기억이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흐린 형상으로 두서없이 떠오르다가 다시 수면에 가라앉았다.

진흙처럼 몸에 끈적이며 달라붙는 시커먼 수면 위를 그는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소중한 무언가를 찾기 위해. 그게 무엇인지도 잊어버린 상태로.

대속자가 되기 전.

대속자가 되어 천 년이 넘게 인류를, 세계를 위해 헌신하던 시기.

고향을 버린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고, 차원 항행 함선에 몸을 실었을 때.

심지어는 찬탈자에게 잡아먹혀 모든 영혼과 육신을 송두리째 빼앗긴 뒤에도.

그의 곁에는 언제나 그녀가 있었다.

‘이름이…… 뭐였지?’

필사적으로 수면을 헤엄친다.

‘얼굴이…… 목소리가…… 기억해내야 해.’

강박적으로 기억을 찾아 헤맨다. 빛바랜 기억들을 하나하나 꺼내 내용을 확인한다. 그러나 마치 그를 괴롭히려는 듯, 그녀에 대한 내용만이 하얗게 칠해져 있다.

‘제발. 안 돼. 이런 건…….’

불안감이 몸을 좀먹는다. 점점 손발이 느려진다. 어느새, 그는 헤엄을 멈췄다. 끈적거리는 수면이 그를 붙잡아 천천히 아래로 끌어내린다.

-……스.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운 목소리. 애틋한 목소리. 따뜻한 목소리. 그토록 바라마지않았던, 바로 그 목소리.

-콜…… 스.

그는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팔다리를 옭아매는 진흙들을 떨쳐내고 위로 솟았다. 수면 위로, 그보다 더 위로. 암흑천지의 바다에서 위로 계속해서 솟아올랐다.

아주 멀리, 새하얀 빛이 짓쳐든다.

-콜시픽스!

목소리가 강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검은 하늘이 쪼개지며 새하얀 빛이 사방을 덮었다. 수면이 요동치며 들끓었다.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직도 기억나지 않는 그 이름을, 영혼 깊은 곳에 새겨져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그 이름을.

“……!”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 * *

“허어억……!”

탐욕은 거칠게 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

“콜록, 콜록……!”

급히 숨을 들이쉰 탓에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폐를 쪼개는 듯한 고통에 인상을 쓰며, 그는 힘겹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벽과 천장이 나무로 만들어진 허름한 방이었다. 대부분의 가구가 오랫동안 방치된 듯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가 누워있는 침대도 딱딱하고 불편했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콜스! 정신이 들어? 나, 나야. 알아보겠어? 괜찮은 거지? 괜찮은 거 맞지……?”

침대 옆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탐욕은 천천히 시선을 돌리고, 뻣뻣한 팔을 들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가 허겁지겁 두 손을 들어 맞잡았다. 저도 모르게 자연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아리멜.”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그 이름을 그는 조심스럽게 불렀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약에 취한 듯 머리가 멍했다. 왜 자신들이 이런 곳에 있는지, 왜 이렇게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지, 그녀는 왜 당장이라도 울음을 쏟아낼 것 같은 표정인지.

그가 답을 떠올리기도 전에, 대답이 제 발로 알아서 찾아왔다.

“지금쯤 슬슬 깨어날 거라더니. 칼 같구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낯설지 않았다. 귀에 들어온 순간 온몸의 털을 곤두서게 하는 목소리. 탐욕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보름 만에 정신을 차린 기분은 어떠냐?”

적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너…… 이 자식……!”

그 모습을 본 순간 듬성듬성하던 기억이 번개처럼 되살아났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적들의 손에 붙잡혔다.

어떻게든 침대에서 내려와 상대와 맞서려 했다.

그러나 뻣뻣하게 굳은 몸은 마치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리멜을 지켜야 하는데. 자괴감에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아리멜이 일어났다. 그를 등지고서, 상대와 똑바로 마주 보고 섰다. 마치 적으로부터 그를 지켜주려는 것처럼. 탐욕은, 콜시픽스는 움직임을 멈추고 멍청히 그 등을 바라보았다.

-제발 부탁이야. 콜스를 살려줘. 미안해. 우리가 다 잘못했어. 하라는 건 뭐든지 할게…….

이가 빠져 있던 마지막 기억이 채워졌다. 죽어가는 와중에 들었던 그 목소리가, 환청이 아니라 실제였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아리멜…….”

힘겹게 몸을 일으킨 콜시픽스가 아리멜의 손을 붙잡았다.

“미안하다.”

아리멜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러나 끝까지 그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사소한 움직임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앞의 적을 노려보았다.

“상황은 대충 이해한 모양이군.”

프레이는 쏟아지는 적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하며 태연하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더니 손동작 하나 없이 마법으로 아리멜이 앉아 있던 의자를 붙잡아 끌어왔다.

“너무 경계하지 마라. 너희 쪽에서 지랄발광을 하지 않는 한, 우리가 먼저 너희를 공격하지는 않을 테니까. 우리는 약속은 되도록 지키는 주의거든.”

털썩, 의자에 앉은 프레이가 다리를 꼬고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으며 턱을 괬다. 적의와 의문이 섞인 혼란스러운 두 쌍의 시선이 그의 사소한 동작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럼, 협상을 시작해볼까.”

프레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