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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왕가의 피(2) (160/210)


160화 왕가의 피(2)
2023.03.12.


알레프 영도에서 왕도까지의 거리는 군마를 타고 거의 쉼 없이 전력으로 달렸을 때 기준으로 약 일주일. 직선거리는 약 400km다.

이 세계의 문명 수준을 감안하면 상당히 먼 거리이지만, 자이안에게는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음속을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적당히 체력을 분배하며 달려도 한 시간 정도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였다.

“헤윽…… 으엑.”

주변 지형을 통해 왕도가 가까워졌음을 알아차린 자이안이 속도를 늦췄다.

평범한 성인 남성이 전력으로 뛰는 정도의 속도를 유지했다. 그리고 미오네는 그의 등에 업힌 채 정신이 나가기 직전이었다.

“시,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아…….”

“엄살이 심하시네요. 그렇게 빨리 달린 것도 아니고, 다치지 않도록 결계도 걸어 줬는데.”

“엄살? 어엄사알?!”

고개를 번쩍 든 미오네가 자이안을 물어뜯을 기세로 소리쳤다. 그러나 곧 진이 빠진 듯 다시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왕도까지는 얼마나 남았죠?”

“지금도 보이는데요. 고개 들고 한 번 직접 보세요.”

자이안의 말에 미오네는 다시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성벽에 둘러싸인 왕도의 모습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성벽 일부가 볼품없이 무너지고, 그 너머 시가지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보다 더 멀리에 보이는 왕성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권위를 상징하는 휘황찬란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폐허나 다름없어 보였다.

“일리움이…… 이렇게 허망하게.”

미오네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뱉었다. 자이안은 딱히 그녀를 위로하지 않고 무너진 성벽을 뛰어넘어 왕도에 발을 디뎠다.

밖에서 본 것만 해도 참혹했는데, 성벽 안쪽의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 백성들이 불안에 떨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곳곳에서 비명과 고함이 울렸다.

급히 짐을 싸 피난을 떠나려는 이.

그들을 노려 금품을 빼앗으려는 이.

어떻게든 소란을 잠재우려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는 이.

선조들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세상의 멸망이 닥쳤다고 미친 듯이 홍소를 터뜨리는 이.

치안이 완전히 마비되어 만들어진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아바마마의 시신은 어디에 있죠?”

“왕성 앞에 있었는데, 아마 누가 치우지 않았을까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면서도 자이안은 왕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시모스 왕의 시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왕성으로 항하며 미오네는 무너진 왕도의 모습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꼼꼼히 살폈다.

자이안이 슬쩍 그녀의 옆얼굴을 돌아보았으나, 모든 감정이 깊이 가라앉은 듯한 담담한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내기는 어려웠다.

‘의외로 침착해 보이네.’

명확히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그 정도였다. 지금까지 자이안 앞에서 드러냈던 적반하장이나 광기에 찬 모습을 생각하면 뜻밖이었다.

‘왕족. 왕족이라.’

문득 미오네의 본래 신분에 생각이 미쳤다.

그녀가 알레프와 정략결혼으로 맺어지기 전 왕성에서 어떤 생활을 보냈는지는 잘 모른다. 악랄한 정치적 수완을 생각하면 나름대로 제왕학 따위를 공부한 것일까?

‘시모스 왕은 후사 때문에 고민이 많았던가.’

자식들이 하나둘 성인이 되는데 성에 차는 능력을 가진 아이가 없어 고민이라는 얘기를 어렸을 적에 들은 적이 있었다.

장자를 왕태자로 임하기는 했으나 능력이 특출해서 그런 게 아니라 장자 상속 관습을 따른 것에 불과했다.

‘왕이 뒤늦게 미오네의 능력에 욕심이 났나?’

그렇다면 유폐된 미오네를 구하려 벌인 공작들이 나름 이해가 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할수록 뭔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모스 왕은 할 수 있으면 평생 왕위에서 내려오지 않을 인간이었어. 자만심도 강했고. 후사를 위해 미오네를 구한다는 건 이상한데.’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어느새 왕성이 코앞이었다.

왕도 전체가 난리도 아니었지만 직접 전투가 벌어진 왕성 앞은 지옥이나 다름없는 끔찍한 상황이었다.

수백 명의 시체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다. 대부분의 시체가 전투의 여파에 휘말려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었다.

“아, 아바마마!”

몸을 비틀며 억지로 자이안의 등에서 뛰어내린 미오네가 그 끔찍한 광경 한복판으로 다급히 달려갔다.

시모스 왕의 시체는 길 한복판에 볼품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왕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할 만큼 왕도의 상황이 개판인 것이다.

“아바마마! 아, 안돼. 어떻게 이럴 수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시체를 붙드는 미오네의 모습에 자이안은 묘한 기분이었다. 미오네가 시모스 왕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던 게 정말로 부녀의 정 때문이었단 말인가?

“의외네요. 당신은 시모스 왕을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

고개를 든 미오네가 사납게 소리쳤다.

“당연히 싫어하죠! 이런 인간이 나와 피가 이어진 아비라는 게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다고요! 항상 자신이 완벽한 줄 알고! 자만심도 심하고! 신하들을 사람이 아니라 부품 다루듯 대하고!”

자이안은 입을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상과 정반대의 대답이었다.

“그래도 왕이잖아요! 왕이 죽어버린 거라고요!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이래서는 안 돼요. 이대로는 아바마마의 죽음을 죄 없는 백성들이 짊어지게 된단 말이에요.”

일순간 자이안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자이안이 시모스 왕을 처음 만났을 때 한 생각과 똑같았다.

“죽더라도…… 하다못해 대책을 세우고, 백성들이 받아들일 시간을 주고 죽었어야죠. 그게 군주의 의무라고요. 그런 것도 몰라요?”

“……그런 말이 당신 입에서 나올 줄은 몰라서 당황하고 있습니다만.”

“이럴 때가 아니에요. 살아남은 관료들이 아직 있을 거예요. 그들이라도 모아서 최소한의 행정이라도 복구해야 해요. 당신도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도와요.”

“예?”

어안이 벙벙해진 자이안이 되물었다.

“제가 뭘 믿고 당신을 돕습니까?”

“그럼 이대로 백성들이 혼란에 빠져 힘들어하는 걸 혼자 멀뚱히 구경이나 하든가요!”

미오네는 자이안을 노려보며 강하게 쏘아붙였다.

그 바람에 시모스 왕의 시신을 붙들고 있는 한쪽 손이 왼쪽 가슴께, 심장이 있는 위치에 얹혔다. 그 순간 차갑게 굳은 시체가 덜컥 떨렸다.

“아바마마?!”

미오네가 깜짝 놀라며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시모스 왕이 되살아나는 일은 없었다.

그 대신 시신이 푸르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몇 번 더 덜컥거리며 움직이더니, 푸른빛이 가슴팍에 모였다. 시커멓게 죽은 살갗이 찢어지며 시신 안쪽에서 혈관이 달라붙은 짙푸른 보석이 튀어나와 미오네의 앞에 떠올랐다.

“이, 이게 대체 뭐죠?”

갑작스러운 상황에 미오네는 얼이 빠져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정작 자이안도 보석의 정체를 파악하느라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이 마력의 느낌. 분명 왕홀의 마력과 비슷해.’

한참 침묵하며 자신이 아는 지식을 총동원한 자이안이 마침내 진실을 깨닫고 한숨을 터뜨렸다.

왕홀은 아티팩트 본체가 아니라 힘을 제어하기 위한 단말기에 불과했다. 진짜 본체는 왕의 심장과 융합해 숨겨져 있었다.

“미오네. 함부로 손대면 안 됩니다.”

“예? 하지만 보석이 저를 부르고 있어요.”

넋이 나간 얼굴로 대답하며 미오네는 천천히 보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이안은 급히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헉, 하고 숨을 삼킨 미오네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현혹되면 안 됩니다. 자칫 당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그 순간, 얌전히 허공에 떠 있던 보석이 내쏘아진 화살처럼 빠르게 미오네의 가슴팍으로 날아갔다.

눈을 부릅뜬 자이안이 손을 내뻗었으나 보석은 그를 놀리는 듯 손가락 틈새를 유유히 빠져나가 미오네의 가슴팍에 달라붙었다.

급변하는 사태에 미오네의 몸이 바짝 얼어붙은 순간, 마치 스며드는 것처럼 그녀의 몸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미오네! 괜찮습니까?!”

자이안은 다급하게 그녀의 어깨를 붙들며 소리쳤다.

정작 미오네는 딱히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은 듯 멍한 표정이었다.

반쯤 입을 벌리고 허공을 바라보던 그녀가 곧 정신을 차리고 자이안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짙푸른 빛이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냥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에요.”

왕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미오네가 옷을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이안도 따라 일어서며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프레이 삼촌과 함께 왔어야 했나.’

망토의 힘으로 ‘힘의 마안’을 흉내 낼 수는 있지만 당연히 정밀도는 프레이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떨어진다.

애초에 원본과 똑같은 성능의 마안을 가지고 있어도, 힘의 흐름을 읽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 해석하는 건 풍부한 지식을 갖춰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죠? 걱정 안 해도 당신 뒤통수를 치고 도망가지는 않을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하아. 안 아프면 됐습니다.”

“절 신경 쓸 시간에 관료들을 모아줘요. 저보다는 당신이 더 빨리 사람들을 모을 수 있겠죠. 전 그동안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잠시 고민한 자이안이 이내 미오네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MP를 일으켜 손끝으로 그녀에게 작은 마법을 새겼다. 대상의 위치를 3차원 좌표로 감지할 수 있는 간단한 추적 마법이었다.

“당신이 자리를 옮기면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허튼 생각 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세요.”

“기다릴 거라고 했잖아요. 말귀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 건가요?”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는 말을 뒤로하고 자이안은 왕성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살아남은 관료들이 있다면 아마 왕성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진짜 누구 한 명이랑 같이 올걸.’

미오네가 자신을 증오한다는 건 뻔히 알 수 있는 사실인데 너무 안일하게 행동했다.

자이안은 그녀가 허튼 짓을 벌이지 않기를 바라며 왕성을 뒤지고, 시모스 왕의 이름을 사칭해 관료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 모았다.

“살아남은 관료들은 이게 전부인가요?”

정말로 뜻밖에도, 미오네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자이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이안이 떨떠름해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미오네는 당당하게 관료들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미오네 왕녀!”

관료들이 그 얼굴을 알아보고는 경악하며 소리쳤다. 미오네는 약식으로 예를 갖춰 인사를 한 뒤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전하께서 승하하셨어요. 사악한 마물의 습격을 받았죠.”

“그, 그런 세상에……!”

“그렇다면 아까 그 소란이 모두 마물의 소행이란 말입니까?”

“자세한 건 경위를 조사해봐야겠죠. 그리고 지금은 조사를 위한 인력이 필요해요.”

거침없는 말투, 낭랑한 목소리로 미오네는 관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자이안은 몇 걸음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 미오네는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행정을 복구하고 왕도의 혼란을 잠재우려 노력하고 있다.

‘종잡을 수가 없네.’

어떻게든 그녀의 본성을 파악하려다가, 그냥 한숨과 함께 포기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왕가의 지시에 따라 냉혹하게 자이안을 살해하려 했던 것도, 혼란에 빠진 백성들을 수습하려 애쓰는 것도. 그 모두가 미오네의 본성이다.

‘이래선 나만 나쁜 놈 같네. 나쁜 건 미오네인데.’

다시 한숨을 뱉고, 케케묵은 감정을 거기에 실어 떠나보냈다.

“미오네.”

한창 관료들을 설득하고 세세하게 지시를 내리는 미오네에게 자이안이 말을 걸었다. 말이 끊긴 미오네는 인상을 쓰며 홱 자이안을 돌아보았다.

“바쁘니까 쓸데없는 말은 이따 해요.”

“도와드릴게요.”

“예?”

언제나 그랬듯, 자이안은 이번에도 자신의 마음의 목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왕도 수습 작업, 저도 도와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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