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왕가의 피(1)
(159/210)
159화 왕가의 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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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왕가의 피(1)
2023.03.11.
“표정 좀 펴요, 형.”
프레이는 저택 본관 1층 테라스에 앉아 험악한 표정으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천천히 돌아보는 와중에도 그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놈들은 어떻게 됐냐?”
“하인들 숙소 뒤쪽에 지금은 안 쓰는 외딴 오두막이 하나 있더라고요. 일단은 거기다 가둬놨습니다. 차후의 처리는 지금부터 생각해봐야죠.”
프레이가 입매를 꿈틀거리며 표정만으로 이죽거렸다.
그가 보기엔 미적지근한 대처였다.
그러나 이미 자이안이 결정을 내렸는데 그걸 강요와 억지로 꺾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발산할 길 없는 스트레스를 애꿎은 허공만 노려보며 풀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자이안은 분명 올바른 판단을 할 거예요.”
오지랖 넓은 호구인 건 변하지 않았지만, 자이안은 여정을 거치며 죄에 대해서는 냉혹한 가치관을 가지게 됐다.
분노와 탐욕, 두 마족은 마물을 조종해 접경지대를 습격하고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때 놓친 마물 일부는 일리움 전역에 흩어져 아직도 산발적인 피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자이안이 두 마족을 동정심 따위로 용서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럴 거였으면 보석탑의 일을 마무리할 때 마법사들의 처형을 돕지도 않았으리라.
“내가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이러는 줄 아냐?”
그러나 프레이는 크룩스의 설득 따위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도 그 녀석이 판단을 그르칠 거라고는 생각 안 해. 문제는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제법 정신력이 강해지기는 했지만, 자이안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쉽게 공감하고 쉽게 상처 입는, 여린 마음을 가진 선인.
판단을 잘못하지는 않겠지. 자이안의 이성은 두 마족이 저지른 죗값을 냉정하게 계산해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도록 할 것이다.
그게 설령 죽음이거나, 혹은 죽음보다 더한 것이라도. 그러나 그의 마음은 어떨까.
상대가 말이 통하고 사고할 줄 알며, 연인을 구하기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도 있는 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그러한 사정을 알게 되었음에도, 죄의 무게에 맞게 그들을 처벌해야만 하는 지금.
자이안의 마음은 상처받지 않고 무사할 수 있을까. 아무런 가책도 고통도 느끼지 않고 철의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프레이는 회의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처음 만났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서로가 적의로만 가득할 때 죽였어야 했다. 하지만 결국 녀석은 몰라도 될 사실을 알아버렸지. 스스로는 느끼지 못해도, 그건 녀석의 마음에 평생 동안 눌러앉은 돌덩이가 될 거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요.”
잠시 말문이 막힌 크룩스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의 말이 옳았다. 그들이 아는 자이안이라면, 마족들을 처단한 뒤에는 죄의식과 싸우게 될 것이다.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뭐 인마?”
“평범한 일이잖아요. 죄의식을 느끼고, 극복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고, 시간이 걸려 천천히 낫고. 그러다가 버티지 못하고 약해졌을 때, 그때 지탱해주기 위해 저희가 있는 거 아닙니까?”
“…….”
입을 꾹 다물고 크룩스를 노려보던 프레이가 이내 작게 한숨을 뱉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래. 그 말이 맞지.”
“형은 자이안이 다치거나 힘들어질 것 같으면 너무 예민해져서 문제예요.”
육체가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에 대한 얘기였다.
“나도 안다. 내가 어떻게 애쓴다고 고쳐질 문제가 아니란 것도 알고.”
“그건 그렇죠.”
“최유민이랑 아르스는?”
“유민 씨는 탐욕을 구속 겸 치유하고 있습니다. 지금쯤 거의 마무리 단계일 겁니다. 아르스는 분노가 순간 이동으로 도망칠 수 없도록 공간만곡을 강제 고정하는 아티팩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네 각성자가 모두 소환되어 있었다.
자이안은 연인을 살리기 위해 뭐든지 하겠다는 분노의 진심을 믿고 싶었다. 그러나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비해 최소한의 대책은 해야 한다는 각성자들의 의견도 옳다고 생각했다.
“반응은 어떠냐?”
“탐욕이야 아직 정신 못 차리고 골골거리고 있고…… 분노는 얌전히 저희 지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탐욕이 치유되는 모습을 보고 나서는 확실히 고분고분해졌어요. 아무래도 둘이 연인 사이라는 건 확실한 것 같은데요. 엄청난 연기로 저희를 모두 속이고 있는 게 아니라면요.”
애초에 프레이는 그게 연기일 거라고 의심하지도 않았다.
전장에서, 반쯤 죽어가는 탐욕의 곁에 주저앉은 분노가 드러낸 절박한 감정은 진짜였다.
오히려 경계했던 건 연인에 대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폭주하는 것이었으나, 얌전히 있다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도 없어 보였다.
“백작은?”
“많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더라고요. 제가 마지막에 봤을 땐 뭘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멍하니 앉아만 있었습니다. 한 30분 전이니까,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두 마족의 처분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지만, 사실 일의 규모만 보면 출정식 도중 왕이 죽고 왕도가 반파되었다는 게 훨씬 더 심각한 문제였다.
하물며 백작은 최근까지 극렬하게 마찰을 빚기는 했으나 일단은 왕실에 충성을 바치는 귀족. 지금 상황은 매우 난감할 것이다.
“여기도 성국과 비슷한 꼴이 되겠군.”
“솔직히 말하면, 성국보다도 훨씬 상황이 나쁘죠.”
그 뒤로도 차례차례 주변인들의 상황을 물으며 현상을 확인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프레이는 가장 중요한 이름을 입에 담았다.
“자이안은 지금 뭐 하고 있냐?”
크룩스는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자이안은 지금…….”
* * *
오늘은 아침부터 이상하리만치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얼마 전 게사르트 자작이 찾아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미오네는 하나 남은 유일한 심복이 식사와 함께 저택의 정보를 가져다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식사를 가지고 찾아온 이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와, 왕도가 어떻게 됐다고요?”
미오네의 물음에 자이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마족의 습격으로 반파됐습니다.”
“마족이라니. 마물이란 얘긴가요?”
자이안은 혼란스러워하는 미오네에게 마족의 개념을 이해하기 쉽게 간추려 설명했다. 자이안이 지난 여정 속에서 겪은 커다란 사건들이 대부분 마족과 관련되어있다는 사실도.
“그, 그렇다면 전하는…….”
“시모스 왕은 죽었습니다.”
미오네는 창백하게 질린 채 입술을 떨며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자이안은 조금 의외였다. 시모스 왕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녀 역시 왕에게 좋은 취급을 받았을 것 같지는 않은데. 어쩌면 그래도 그의 죽음에 충격받고 애도할 만큼 가족의 정이 깊었던 것일까.
“그런…… 전하가, 아바마마가…… 이, 이렇게 쉽게, 이렇게 허망하게…… 나는, 난 대체 어떻게 해야…….”
고개를 숙이고 횡설수설하던 미오네가 퍼뜩 눈을 치켜뜨며 자이안을 노려보았다.
“다, 당신이 그런 거예요.”
“예에?”
상상도 못 한 누명에 자이안의 목소리가 뒤집어졌다.
“네가 그런 거라고!”
미오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이안에게 달려들었다.
얼이 빠져있던 자이안은 곧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두 팔을 붙잡으며 힘없이 한숨을 뱉었다. 미오네는 미친 듯이 난동을 부리며 발길질로 마구 자이안을 걷어찼다.
“미오네 부인. 냉정해지세요.”
“다 너 때문이야! 다 네 탓이라고! 너만, 너만 없었으면! 너 같은 게 이 세상에 있으니까……!”
“미오네.”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은 무거운 목소리에, 미오네는 온몸을 흠칫 떨며 움직임을 멈췄다.
무저갱처럼 깊고 시커먼 두 눈동자가 미오네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냉정해져요.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라고요. 대체 제가 당신께 무슨 해코지를 했다고? 제가 언제 한 번이라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날 모함하고 여기다 가뒀잖아!”
“그건 오롯이 당신 책임이잖아요. 현실에서 도망치지 말아요, 미오네. 당신은 죄인입니다. 죄를 지었으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겁니다.”
그 눈을 마주 볼수록 미오네는 점점 더 숨이 가빠지는 것 같았다. 다리가 휘청거리고 눈앞이 핑 돌았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뻔한 몸을 자이안이 부축해 침대에 앉혔다.
“왕도를…… 왕도로 데려다줘.”
한참 뒤, 힘없는 목소리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 너라면 어렵지 않잖아.”
잠시 말이 없던 자이안이 대뜸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미오네가 의아해하며 시선을 향하자, 자이안은 마치 깃털이라도 들 듯 가볍게 미오네의 몸을 들어 등에 업었다.
“무, 무슨 짓이야?”
“왕도를 보고 싶다면서요? 어차피 시간도 별로 안 걸리니 바로 가죠.”
얼이 빠진 미오네를 업은 채, 자이안은 그대로 별관을 나와 백작에게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마주친 기사나 하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유령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했다.
“자이안, 안 그래도 잘 왔…… 그건 뭐냐?”
백작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잠깐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뭐? 아니, 뭐라고?”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백작이 혼란에 빠져 연거푸 반문했다. 자이안이 대답을 하려는데, 한발 앞서 귓가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자이안에게 부탁했어요, 각하. 왕도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다고.”
“미오네 당신이?”
혼란이 극에 달한 백작의 표정이 반대로 담담해졌다. 백작은 이번에는 자이안을 돌아보았다.
“너는 그걸 또 호구처럼 들어주기로 했고?”
“별거 아닌 일이잖아요.”
“그러다가 미오네가 틈을 봐서 도망치기라도 하면…….”
거기까지 말했다가, 그게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소리인지 깨달았다. 미오네는 칼자루 한번 쥐어본 적 없는 힘없는 여자다. 자이안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지. 잠깐. 미오네 휘하의 첩보원들은? 몇 명 남아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사람들은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감시하고 있어요. 얌전하게 돌아다니는 것까지는 가만히 두겠지만, 선을 넘는 행동을 하려 하면 바로 막을 겁니다.”
둘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에 미오네는 황당한 심정이었다.
밤마다 몰래 정보를 가져다주는 첩보원들의 존재를 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방치한 거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이안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기분이었다.
“혼자 방에만 갇혀 있으면 심심할 테니, 대화 상대라도 있으면 좀 나을까 싶어서 그랬죠.”
사소한 배려라는 듯 말하는 자이안의 옆얼굴이 미오네는 솔직히 얄미웠다.
“……알았어요. 이제 첩보원들은 안 쓸게요.”
“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언제 눈에 띄어서 당신들 손에 죽을지 모르는 거잖아요. 부하가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
“…….”
그 말에 자이안이 느낀 것은 지독한 모순이었다.
그런 여자가 암살자들을 부려 마차를 습격하고 애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느냐, 하는 말이 턱 끝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자이안은 조용히 삼켰다.
“얼른 갔다 오거라. 돌아오면 내 일도 좀 도와주고.”
“급한 일부터 다 처리한 다음에요.”
“그냥 평생 안 도와주겠다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그러니.”
백작의 푸념을 뒤로하고 자이안은 저택을 나섰다.
저택과 마찬가지로 영도 역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왕도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아니다. 아직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붕 뜬 피난민들의 존재와 반쯤 억류된 게사르트 자작 휘하의 왕실 직할군이 문제였다.
‘할 일이 진짜 산더미처럼 많네.’
백작이 마지막에 유치하게 푸념을 한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왕도로는 어떻게 가죠? 말을 타고 가나요? 아니면 용을 타기라도 할 건가요?”
“그냥 달려갈 겁니다. 매번 케이에게 신세만 지는 것도 미안하고.”
“예?”
“꽉 붙잡으세요. 가다가 떨어져도 전 책임 안 질 겁니다.”
자이안이 두 다리에 힘을 불어넣었다. 근육이 불거지며 가죽 바지가 찢어질 듯 부풀었다.
어리둥절한 미오네가 자이안의 말이 은유나 비유가 아닌 그대로의 뜻임을 깨닫기도 전에, 자이안의 몸이 땅바닥을 엉망진창으로 깨부수며 포탄처럼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