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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왕도 붕괴(2) (158/210)


158화 왕도 붕괴(2)
2023.03.10.


“이런 제기랄! 뭐 이렇게 눈치채는 게 빨라!”

탐욕은 다급하게 소리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지만 그렇다고 연인을 놔두고 갈 수는 없다. 소화 중에 건드리는 건 아주 위험한 짓이다. 물론 소화는 금방 끝나겠지만, 그 전에 자기들이 먼저 끝장나게 생겼다.

‘그렇지!’

헉 하고 숨을 삼킨 분노가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왕도 전역을 뒤덮은 거대한 마법진. 그 마법은 아직 그의 제어 하에 놓여 있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며 묶어두고만 있던 에너지도 아직 건재했다.

한때 이름 높은 마도학자였던 그는 특히 타인이 구축한 술식을 빼앗아 자신의 것처럼 구사하는 데에 능숙했다.

원래는 자신보다 한참 수준이 낮은 술식만 빼앗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속자가 된 뒤로 오랜 시간 스스로의 능력을 연마하고, 찬탈자에 의해 마족으로 화한 이후부터는 그런 제약도 유명무실해졌다.

동족이라면 모를까, 인간이 사용하는 마법은 그와 비교하면 그저 어린애 수준의 허술한 술식에 불과하다.

힘의 강약은 상관이 없고, 오직 술식의 구조가 얼마나 정교하고 복잡하냐가 중요했다.

“이거나 맞고 꺼져버려라!”

용의 모습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처음 만났을 땐 맛있는 보양식으로 보였지만, 자이안 일행이 그 위에 타고 있는 지금은 아니었다. 탐욕이 거칠게 소리치며 두 손을 크게 휘둘렀다.

검붉게 변색된 마법진이 웅웅 소리를 내며 떨리고, 목표를 잃고 주변을 부유하던 에너지가 순식간에 응축되어 자이안 일행에게 쏘아져 나갔다.

“케이! 숨결을!”

한 차례 깊게 숨을 들이켠 케이가 푸른 화염을 토했다.

자이안 역시 번개의 사슬을 이용해 마법진을 그리고, 백염을 뿜어내며 힘을 보탰다. 강대한 두 힘이 공중에서 맞부딪치고 엄청난 폭발이 왕도를 뒤흔들었다.

-으아아아! 미, 밀린다아아!

거칠게 밀려 들어오는 적의 공격에 케이가 깜짝 놀라며 당황했다. 백염을 유지하는 데 의식을 집중하는 한편, 자이안은 펜던트를 붙잡고 프레이의 이름을 외쳤다.

“아포칼립스!”

“오냐! 잘 불렀다!”

프레이가 장갑을 낀 두 손을 교차하며 휘둘렀다.

번개의 사슬이 상대의 에너지를 휘감고 백염의 철퇴가 그 위를 강렬하게 후려쳤다. 에너지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뒤틀렸다.

“지금이야, 케이!”

케이가 공중에서 한 차례 크게 몸을 비틀며 궤도를 꺾었다.

광학 병기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빛의 기둥이 그 곁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날개를 펄럭이며 그 여파를 역이용해 가속도를 얻은 케이가 조금 전 자이안이 했던 말대로 지면에 내리꽂혔다.

-착륙한다아아!

자이안 일행이 케이의 등 위에서 튕기듯 뛰어올랐다.

유리아는 소아레스를 붙잡고 연거푸 충격파를 쏘아내며 그 반동으로 추락하는 속도를 죽였고, 자이안은 정반대로 더 빠르게 가속하며 스펙트럼을 쥐고 일직선으로 탐욕을 향했다.

“칫……! 그럼 이건 어때!”

새하얀 전광이 파직거리며 눈앞을 가로막았다.

번개의 사슬이었다. 자이안은 조건반사적으로 스펙트럼을 휘둘렀으나 강렬한 반동에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공중에 떠 있는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정작 프레이는 자이안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충격을 받은 기색이었다.

“제기랄. 뭐 이런 무식한 마도가 다 있어? 손이 다 얼얼하군.”

손에 쥔 번개의 사슬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탐욕이 툴툴거렸다. 그 모습을 본 프레이의 눈에 불이 켜졌다.

“너! 내 마법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진짜 몰라서 묻는 거냐? 술식을 빼앗았다.”

프레이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술식 강탈.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개념이었다. 프레이의 눈이 짙은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괜한 짓을 했나?”

“콜스! 소화 끝났어!”

프레이의 묘한 반응에 뒷머리를 인상을 쓰는데 마침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탐욕은 만면에 화색을 띠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잔해 틈에 몸을 숨기고 기회를 노리던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뛰쳐나갔다.

“아리멜!”

“윽! 아, 알고 있어!”

분노의 반응은 빨랐다. 마안을 연 프레이조차 쉽게 감지하지 못할 만큼 은밀한 MP의 흐름과 함께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충격파가 한발 늦게 분노가 있던 자리를 휩쓸고, 소아레스가 잔해들을 밟고 뛰어오르며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유리아 님! 적이 도망칩니다!”

“놓칠 줄 알고!”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순간 이동으로 도망친 분노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탐욕은 인상을 쓰며 그 뒤를 쫓으려 했으나, 자이안이 스펙트럼을 겨누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이번엔 당신들을 놓치지 않을 겁니다.”

“비키라고!”

탐욕이 거칠게 소리치며 손에 쥔 번개의 사슬을 휘둘렀다. 앞선 충돌로 그 공격의 위력을 알게 된 자이안은 맞받아치는 것보다 회피를 택했다.

그러나 완벽하게 피했다고 확신한 순간, 사슬 끝이 두 갈래로 찢어지며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자이안을 습격했다.

자이안은 어쩔 수 없이 스펙트럼을 세워 공격을 막았다. 스파크가 번쩍이고, 강렬한 충격에 자이안의 몸이 뒤로 붕 날아갔다.

“삼촌!”

뒤로 날아간 자이안과 교대하듯 프레이가 탐욕에게 쇄도했다.

그가 두 손바닥을 교차하자 등 뒤로 무수한 숫자의 마법진이 한순간에 펼쳐졌다. 흉측한 괴물이나 다름없는 탐욕의 얼굴에 눈에 띌 정도로 짙은 당혹이 어렸다.

“어디 이것도 한 번 빼앗아봐라!”

“치잇……!”

마법진이 밝게 깜빡거리며 번갯불과 불타오르는 화살, 이글거리는 뱀, 기압의 철퇴 따위가 일시에 쏟아져 나왔다.

일대를 뒤덮는 어마어마한 양의 마법에, 탐욕은 기가 질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미로워 보이는 기색이었다.

‘놀랍군. 하나하나의 완성도는 별 거 아니지만, 이 많은 수의 술식을 안정적으로 다루고 있어.’

감탄과 함께 불안이 점점 커졌다. 자이안 하나만 해도 상대하기 버거울 지경인데 그만큼이나 위험한 적이 갑자기 또 나타났다. 적에게 쫓겨 도망친 분노의 행방도 걱정이었다.

‘이대로 얻어맞고 있을 수만은 없지.’

손에 쥔 번개의 사슬을 좌우로 쭉 찢었다. 강탈한 술식은 온전히 탐욕 자신의 것. 술식의 내용을 개변하거나 구조를 강화하는 것도 자유자재였다.

사슬이 방전을 일으키며 불안정하게 떨렸다.

두꺼운 다리에 힘을 주고 힘껏 뛰어오르며, 탐욕은 거세게 번개의 사슬을 휘둘렀다.

꽈르릉!

굉음과 함께 수백 갈래로 찢어진 사슬이 일대를 사납게 휩쓸었다. 모처럼 펼친 융단 폭격이 허망하게 휩쓸려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프레이는 냉정하게 적의 능력을 분석했다.

‘이번엔 빼앗지 않는군. 뭔가 제약이 있는 건 확실한데.’

프레이가 두 손을 크게 펼치며 두 개의 원을 그렸다. 공중에 마법진이 만들어지며 강렬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십 미터 정도 거리까지 접근한 탐욕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기껏 만들어낸 마법진이 불안정하게 뒤틀리더니 순식간에 검붉은 색으로 만들었다.

‘그렇군. 숫자 제한인가.’

형체를 잃어버린 번개의 사슬을 내던지고, 탐욕이 두 팔을 길게 늘이며 내뻗었다.

프레이는 공중에서 불규칙적인 궤도로 비행하며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옷자락이 놈의 팔뚝에 스쳐 사정없이 찢어졌다.

‘완력도, 속도도 수준급으로 강해. 거기에 마법을 강탈하는 능력…… 솔직히 나와는 상성이 좋지 않다.’

공중을 누비며 대응 수단을 고민하던 순간, 갑자기 몸 전체가 허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프레이는 헉 하고 정신을 차리며 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지탱하는 비행 마법이 자취를 감췄다.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는 프레이의 머리 위로 탐욕이 흉측한 얼굴을 뒤틀며 그를 비웃고 있었다.

안 그래도 거대한 탐욕의 몸이 더욱 커다랗게 부풀었다.

피부가 찢어지고 근육이 뒤틀리며 꼬여 생명체라고 할 수도 없는 형상을 만들어냈다. 거대한 손이었다.

“이대로 얌전히 죽어라! 더 이상 우릴 귀찮게 굴지 마!”

주먹을 쥔 탐욕이 프레이에게서 빼앗은 비행 마법의 힘까지 더해 지상을 향해 급강하했다.

사이에 끼인 프레이는 작게 혀를 차며 열 손가락을 쭉 펼쳤다. 각각의 손가락에 수십 겹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두 손을 깍지를 끼며 앞으로 내민 순간, 모든 마법진이 하나로 합쳐지며 그의 앞에 펼쳐졌다.

“[심장을 꿰뚫려라. 지옥 불의 창이 죽음을 넘어서까지 너를 쫓을 것이다.].”

마법진이 수축하며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탐욕이 프레이가 펼친 마법의 술식을 강탈하려 했다. 그러나 상상 이상으로 복잡한 구조에 시간이 걸렸다.

설상가상으로 탐욕의 뒤에서 케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채 자라지 않은 한쪽 뿔의 원수를 갚으려는 듯 앞발로 탐욕을 가차 없이 후려쳤다.

날카롭게 집중한 정신이 걷잡을 수 없이 흐트러졌다. 탐욕이 마법을 술식을 빼앗는 것보다 먼저 한계까지 응축된 마법진이 한 줄기 불꽃의 선을 그렸다.

“끄아악……!”

감정을 버리고 무심한 눈으로 적을 응시하며, 프레이가 깍지 낀 두 손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탐욕의 중심을 꿰뚫은 불꽃의 선이 그 궤도를 따라 휘어지며 그의 반신을 갈랐다.

외마디 비명을 터뜨린 탐욕이 힘을 잃고 바닥에 추락했다. 둔중한 소리를 내며 지면이 함몰하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후우. 안 하던 걸 하려니 진이 다 빠지는군.”

탐욕이 술식의 구조를 해석해 이를 강탈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름대로 세운 대책이었다.

단순한 구조의 마법을 먼저 펼치고 이를 즉석에서 합쳐 쓸데없이 복잡한 구조를 가진 마법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불안정한 술식을 강제로 안정화하기 위해 잘 쓰지도 않는 주문까지 읊었다.

처음 시도해보는 방식인 만큼 마법이 폭주할 가능성도 있었고 제대로 성공해도 적에게 먹히지 않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상정한 대로 일이 잘 풀렸다.

흙먼지 속, 반쪽이 난 몸을 붙들고 꿈틀거리는 탐욕을 내려다보며 프레이는 그대로 지면에 추락하듯 착지했다.

마법의 도움 없이 맨몸으로 착지하려니 두 다리가 시큰거렸다.

뻐근해진 몸을 이리저리 풀며, 완전히 놈의 숨통을 끊기 위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 순간 갑자기 놈의 곁에서 인기척이 나타났다.

“코, 콜스!”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 프레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까 전 유리아와 소아레스의 추적에 모습을 감춘, 프레이조차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된 순간이동을 사용하는 마족이었다.

“삼촌! 그 마족이 이쪽으로 온 것 같습니다!”

한발 늦게 자이안이 프레이에게 달려왔다. 유리아와 소아레스도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프레이는 심드렁하게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넌 삼촌이 혼자 싸울 때는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이제 와서 나타나냐?”

“유리아, 소아레스와 함께 다른 마족을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삼촌이라면 혼자서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설마 자신 없으셨어요? 어디 다치신 곳도 없으시면서.”

“……끄응.”

생각지 못한 날카로운 반격에 프레이는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별문제 없기도 했고, 상성 때문에 불안했다는 사실을 솔직히 밝히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정말로 위험했다면 거리낌 없이 자이안을 찾아 도움을 요청했겠지만, 그 정도 위기를 겪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족들은…….”

흙먼지가 잠잠해지며 드러난 광경을 보고 자이안이 말을 멈췄다.

목숨을 걸고 도망칠 때는 언제고, 분노는 치명상을 입은 탐욕의 곁에 주저앉아 있었다.

자이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프레이를 돌아보았으나, 정작 프레이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콜록, 커흑……. 후우, 아리멜, 왜 그런 우중충한 표정이야. 나 때문에 그러는 거냐? 걱정…… 쿨럭, 걱정하지 마. 한숨 푹 자면서 쉬고 나면 금방 낫겠지.”

“응, 부, 분명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쉬어. 아무것도 말하지 마.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내가, 내가 어떻게든…….”

다시 한번, 자이안은 말없이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어째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다. 일행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기색이었다. 유리아와 소아레스는 물론이고, 각성자들을 모두 포함해 일행 중 가장 적에게 냉혹한 프레이조차 그랬다.

“도, 도와줘.”

퍼뜩 고개를 든 분노가 절박한 얼굴로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이봐. 우리 방금 전까지 서로를 못 죽여서 안달이던 사이라고. 게다가 그놈을 걸레짝으로 만들어놓은 건 나다. 하필 자이안도 아니고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아무나 좋아. 제발 부탁이야. 콜스를 살려줘. 미안해. 우리가 다 잘못했어. 하라는 건 뭐든지 할게. 미안해. 부탁이야, 제발…….”

순간 프레이는 뜬금없이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에는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자이안이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염병.”

자이안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이 예상된 프레이가 이마를 짚었다.

“그러다 뒤통수 맞아도 난 책임 안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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