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왕도 붕괴(1)
(157/210)
157화 왕도 붕괴(1)
(157/210)
157화 왕도 붕괴(1)
2023.03.09.
시모스 왕은 왕성 앞에 도열한 군단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이 많은 이들을 지배하는 군주라 생각하니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필시 영광스러운 날로 기록될 것이다.’
왕이 다시 한번 왕홀을 들어 올렸다. 오직 그만이 느낄 수 있는 마법의 파동이 왕국 전역으로 뻗어 나갔다.
그치지 않고 한 번, 두 번, 같은 동작을 반복할수록 마법의 구조가 견고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밑 작업은 끝났군. 나머지는 알레프 영지에 도착한 다음 해도 되겠어.’
왕홀을 내린 왕이 재차 군단을 돌아보았다. 무수한 수의 눈동자가 오직 그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다.
“제군들이여, 들어라. 오늘 우리는 태곳적부터 우리를 괴롭힌 오래된 공포를 쓰러뜨리기 위한 위대한 한 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연설을 시작했다. 군사를 모은 이유. 목적지. 최종 목표. 화려한 미사여구를 섞어, 최대한 희망적으로 포장했다.
그래도 불안을 이기지 못하는 병사들이 곳곳에 보였다. 왕은 그들의 심정을 이해했다.
일리움은 다른 나라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마물로부터 안전한 나라였지만 그래도 그 공포만은 눌어붙은 자국처럼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초식동물이 본능적으로 천적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것도 이제 끝이다.’
왕홀에 담긴 일리움 왕가의 힘으로, 자신의 손으로 복마전을 제패할 것이다.
더 이상 마물의 공포는 일리움을 위협하지 못하리라. 자신의 손으로 힘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다. 왕은 머지않은 미래를 그리며 위풍당당하게 군마에 올라탔다.
그 순간이었다.
‘저건…… 새인가?’
문득 위를 바라본 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까마득하게 높은 하늘에서 검은 점이 빠르게 커다래지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외형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사람?’
왕은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직후 생각을 고쳐먹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형체를 뒤집어썼을 뿐인 무시무시한 무언가다.
“전원 산개하라! 병사들은 들어라! 전원, 산개……!”
콰아앙!
갑작스러운 명령에 병사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크고 시커먼 무언가가 굉음과 함께 그들 사이로 추락했다.
운이 나쁘게 그 밑에 깔린 병사가 무참하게 목숨을 잃고, 주변의 병사들도 땅이 뒤흔들리는 충격에 나동그라지거나 힘없이 날아갔다.
“웬 놈이냐! 정체를 밝혀라!”
왕을 호위하고 있던 기사들이 눈짓 한 번에 즉시 무기를 뽑으며 상대를 포위했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래 먼지 속에서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거대한 형상이 엿보였다. 키는 5미터를 훌쩍 넘을 정도로 크고, 팔과 다리는 기둥처럼 두껍고 단단했다.
“흐으으읍……! 하아, 맛있는 냄새가 나는군.”
먼지 속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순간 거친 돌풍과 함께 먼지가 흩어져 사라졌다. 동시에 그 안의 거대한 형상도 모습을 감췄다.
“아아아악!”
기사 한 명이 비명을 터뜨렸다.
길게 늘어난 팔이 그의 하반신을 무참하게 잡아 찢었으나, 너무나 빨라 아무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상반신만 남은 기사가 바닥에 널브러져 꿈틀거리다가 숨을 거뒀다.
“적을 찾아라! 놈이 날뛰게 두어선 안 된다!”
사령관의 호통에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부질없이 몇 명의 기사가 또다시 삽시간에 목숨을 잃었다.
“저, 저쪽에 있다!”
괴물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인간의 피와 살점으로 입가가 더러워진 채로 멀뚱멀뚱 주변을 살폈다.
정체불명의 여성이 괴물의 등에 업혀 그 입가를 닦아주고 있었다.
“그래. 너로군.”
8개로 분열된 괴물의 눈이 시모스 왕에게 향했다. 왕은 왕홀은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네놈들이 보고서에 쓰여 있던 마족들인가.”
알레프를 굴복시키기 위해 지원 병력을 보내지 않았을 뿐, 접경지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보고서를 통해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특히 변경백이 직접 쓴 부분에는 마물을 다스리는 미지의 지성체, 두 마족의 존재가 분명히 언급되어 있었다.
“마족? 아, 그렇군. 너희 인간이 우리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인가? 그럼, 뭐 그런 걸로 하지. 그래, 우리는 네가 아는 대로 마족이다.”
“접경지대의 침공이 실패해 사라졌다고 알고 있는데.”
“그때 힘을 제법 많이 소모해서, 회복을 좀 해야 되거든. 그렇게 됐으니, 얌전히 우리한테 잡아먹혀라.”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시모스 왕이 왕홀을 들어 그 끝을 두 마족에게 향했다. 오호? 하고 탐욕은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재밌는 물건을 가지고 있구나. 그것도 맛있어 보이는데?”
“마침 잘 와주었다, 사악한 괴물들이여. 너희들의 목숨을, 왕홀의 새로운 힘을 피로하는 거름으로 쓰도록 하지.”
시모스 왕이 눈을 지그시 감고 의식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혼란에 빠져있던 병사들이 기계적인 동작으로 무기를 꺼내 두 마족에게 향했다. 탐욕의 얼굴이 즐거움과 놀라움으로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이거 정신지배잖아? 너 진짜 인간 맞냐? 우리랑 동족 아닌가?”
시모스 왕은 탐욕의 말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대신 정신을 완전히 지배당한 병사들이 그들을 향해 파도처럼 몰려나갔다.
‘아직 술식이 완전해지지 않았다.’
왕홀에 잠재된 또 다른 힘. 천재지변을 자유자재로 조종하고 지형을 변화시킬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마법이다.
엄밀히 말하면, 왕홀에 깃든 힘은 그런 현상을 발현케 하는 강력한 에너지 자체였다.
이를 정교한 술식을 통해 폭주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다뤄, 왕의 고유한 능력인 정신지배를 증폭하거나 천재지변을 조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모스 왕은 불완전하게나마 순수한 에너지 그 자체를 조종할 방법을 찾은 상태였다.
다만 아직 실전을 거치지 않은 이론의 단계였다. 갑자기 찾아온 두 마족은 이론을 검증할 훌륭한 실험대가 될 것이다.
‘어쩔 수 없군. 제물을 바쳐야 하나.’
그 강대한 힘을, 제아무리 시모스 왕이라도 아무 대가 없이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왕홀의 힘은 일리움의 피를 대가로 요구한다. 피, 즉 생명이다. 그러나 이는 시모스 왕 한 명의 목숨 대신 다른 많은 수의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도 해결할 수 있었다.
‘병사들과 백성들을 일부 제물로 바친다면…….’
분명 두 마족을 쓰러뜨릴 만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제물로 바쳐진 이들은 마족의 습격으로 희생되었다고 공표하면 그만이다.
시모스 왕이 직접 두 마족을 쓰러뜨리고 그 위대한 힘을 드러내 보인다면 백성들은 분명 왕을 경외하며 그 업적을 찬양하게 되리라.
초월적인 힘을 가진 왕을 중심으로, 일리움은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라에 한층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병사들 역시 비록 정신지배의 영향이라고는 하나 마족들이 왕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분전하고 있었다.
덕분에 시모스 왕은 예상한 것보다도 한결 쉽게 마법의 구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달려드는 병사들을 귀찮은 듯 떨쳐내면서도 두 마족의 시선은 오직 시모스 왕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들이 경악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시모스 왕의 마법이 완성되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병사들이여! 물러나라!”
왕의 호령에 병사들이 썰물처럼 좌우로 갈라졌다. 기회라고 여긴 탐욕이 시모스 왕을 습격하려 했으나 그 순간 바닥이 갈라지고 솟구친 돌무더기가 그의 두 다리를 옭아맸다.
“나, 일리움 왕 시모스 륜 테이도스 키릴 셴 일리움의 이름으로……!”
왕이 왕홀의 끝을 마족들에게 겨눴다. 그를 중심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왕도 전체를 뒤덮으며 펼쳐졌다. 뒤이어 하늘이 급격하게 흐려지고, 지면 깊은 곳에서부터 둔중한 진동이 퍼졌다.
몰려든 먹구름 사이로 천둥번개가 희게 번쩍이고, 급기야 회오리와 함께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왕도 곳곳에서 갑작스런 재해로 인한 피해가 속출했다. 왕홀에 깃든 순수한 에너지를 불러일으킨 여파만으로 환경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을 직감한 듯 얼어붙은 마족들을 노려보며 왕은 호기롭게 외쳤다.
“너희 사악한 마족을 벌하리라!”
그가 왕홀을 휘둘렀다. 동시에 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탐욕이 히죽 웃었다.
‘웃어?’
빛이 일대를 뒤덮었다. 왕은 자신이 지쳐서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수한 에너지의 분류가 두 마족을 향해 쇄도했다. 그 여파가 주변에까지 미치며 땅을 뒤엎고 늘어선 건물들을 산산이 박살 냈다.
그리고 마침내 두 마족이 흔적도 없이 휩쓸리기 직전.
마법진의 색이 붉게 물들었다.
“허억!”
돌연, 시모스 왕은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가슴이 갑갑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숨을 삼키며 쓰러져 무릎을 꿇고,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마족을 휩쓸어야 하는 에너지의 분류가 그 앞에 멈춰 있었다. 탐욕이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휘저을 때마다 에너지도 똑같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힘만 세지 단순무식한 마도로군.”
머리 위에 펼쳐진 검붉은 마법진을 바라보며 탐욕이 실망스럽게 말했다.
“무, 무슨…… 무슨 짓을 한 거냐!”
“음? 보고도 몰라? 마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인간이군.”
탐욕의 대답은 그게 다였다. 들어봤자 이해하지도 못할 상대에게 일일이 자세히 설명할 생각 자체가 없는 것이다.
자리에 주저앉은 채 그를 노려보던 시모스 왕은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뱃속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한 차례 엄습했다가 간신히 잠잠해졌다. 힘없이 입을 가린 손을 내린 왕은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손바닥이 시커먼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어, 어째서……! 제물은 분명히 바쳤을 텐데!”
시모스 왕은 한 가지 착각을 했다.
왕홀이 요구하는 대가. 시모스 왕은 이를 백성들의 목숨으로 대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술식을 잘못 이해해 벌어진 착각이었다.
왕홀의 힘은 반드시 정당한 대가를 치른다. 왕이 아닌 다른 인간의 목숨은 힘을 일시적으로 증폭하는 효과를 낳을 뿐이다.
제아무리 많은 제물을 바쳐도, 설령 대륙 전체를 제물로 바친다 하더라도 왕홀은 마지막에는 반드시 왕의 목숨을 대가로 받아간다.
“아리멜, 저거 죽기 전에 얼른 먹어야겠는데?”
“내려줘. 내가 직접 할게.”
분노가 탐욕의 등에서 내려와 잠시 비틀거렸다가, 다시 균형을 잡고 시모스 왕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추레한 영혼이지만, 그 힘만은 도움이 되겠지. 너무 원망하지는 마. 어차피 자업자득으로 죽을 거, 내가 유용하게 써 주는 거잖아?”
분노가 왕의 영혼을 강제로 끄집어내는 사이, 탐욕은 왕도 위에 펼쳐진 검붉은 마법진을 어떻게 써먹을까 고민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왕도는 병사들과 시민들이 한데 엉키며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왕의 목숨이 꺼져감에 따라 정신지배가 풀린 것이다.
대부분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도망치기 바빴다.
적을 쓰러뜨리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다시 무기를 든 극소수의 용감한 이들도 있었으나, 정작 탐욕의 모습을 보자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바짝 굳어버렸다.
왕이 감히 가늠할 수도 없는 강대한 힘을 발하고, 탐욕이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용감하게 나서 봤자 허망한 개죽음이 될 뿐임을 본능적으로 알아버렸다.
“……이런 젠장.”
불현듯 탐욕이 욕설을 뱉으며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익숙지 못한 기분이 심장을 쥐어짰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탐욕은 다급히 분노를 돌아보았다.
“아직이냐?!”
“지금, 소화 중이라서…… 말 걸지 말아줘…….”
따로 소화에 집중해야 할 만큼 강력한 영혼이었다는 소리다.
원래대로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겠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너무 나빴다. 탐욕이 재차 서쪽을 돌아보았다. 하늘 너머 작은 점처럼 보이는 그림자가 시시각각 커다래졌다.
“케이, 더 속도를 높여 줘. 저기 마족 둘, 보이지?”
-아주 잘 보여!
“이대로 들이받아 버려.”
자이안 일행이 왕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