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일리움 왕, 시모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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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일리움 왕, 시모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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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일리움 왕, 시모스(3)
2023.03.08.
‘왕이 또 뭔가를 꾸미고 있는 건 분명해.’
자이안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그러나 혼자 고민한다고 명확한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삼촌도 느끼셨습니까?’
혼자 끙끙거릴 필요는 없었다. 자이안에게는 훌륭한 의논 상대가 많았으니까.
「봤다. 좀 지치기는 하지만, 항상 마력시를 열어놓기를 잘했군.」
마력시. 프레이가 가진 권능 ‘힘의 마안’의 하위 호환 격인 능력이다.
다른 에너지의 흐름은 느낄 수 없지만 그만큼 MP의 흐름을 민감하게 감지하는 능력으로, 자이안과의 여행 도중 필요성을 느낀 프레이가 마안의 메커니즘을 참고해 직접 개발했다.
「좀 더 확실하게 뭘 알려면 높은 곳에서 한 번 봐야 할 것 같은데.」
‘높은 곳이요?’
자이안이 저택 지붕을 쳐다봤다. 그러나 프레이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저런 거 말고. 왕국 전체, 하다못해 이 근방 지형 전부를 부감할 수 있을 만한 높이가 필요하다.」
‘그런 거라면…….’
“바란드, 잠깐만 쉴까?”
갑작스런 말에 바란드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자이안의 얼굴을 보며 그는 곧 뭔가를 깨달은 듯한 눈빛이 되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군요?”
자리를 정리한 바란드가 의자에서 내려왔다.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전 제 방에서 복습을 하고 있을게요!”
사정을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바란드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저택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당장 명확하게 설명하기가 어려운 일임을 눈치챈 것이리라.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보면 볼수록 욕심이 나고,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더 주고 싶은 그런 아이였다.
“아포칼립스.”
잠시 바란드의 빈자리를 바라본 자이안이 펜던트를 쥐고 나직하게 읊조렸다. 빛의 기둥이 솟아오르고 프레이가 그 안에서 나타났다. 정작 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뭔데? 난 왜 불렀어?”
“전 비행 마법 못 쓰잖아요.”
“아, 맞다. 그랬지. 나이아는 당연히 쓸 줄 알았으니 너도 그런 줄 착각했네.”
자이안은 프레이에게 허리춤을 붙들려 그대로 상공 수 킬로미터 높이까지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마안을 열고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프레이는 작게 혀를 찼다.
“쯧. 벌써 잔향이 거의 사라졌군. 마력은 이게 문제라니까.”
MP와 달리 마력은 사용한 흔적이 빠르게 사라진다.
게다가 이번에는 마력의 파동 자체가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기도 했다. 프레이의 마안으로도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런 수확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포칼립스의 이름값은 그런 자존심 상하는 상황을 허락하지 않았다. 공중에서 이곳저곳을 바라보며 나름대로 정보들을 조합한 프레이가 다시 지상으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뭐 알아낸 게 있습니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추측 정도는 해볼 수 있겠지. 혹시 지도 가지고 있냐? 일리움 전역이 최대한 정확하게 그려진 지도 말이다.”
“그런 거라면…….”
잠시 고민한 자이안이 프레이와 함께 백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변경백은 엄연한 군사 귀족. 정교한 지도처럼 전략적으로 중요한 물건은 백작이 직접 관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리움 전도라면 당연히 있지. 무슨 일이냐? 프레이 형님까지 같이.”
“잠깐 보여줘 봐라. 조사할 게 있다.”
엄연히 극비 정보였으나 백작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책상에 어지러이 흩어진 서류들을 가지런히 모아 한쪽에 정리하고, 깔끔해진 공간에 커다란 지도가 깔렸다.
왕도를 중심으로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한 나라. 잠시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프레이는 이윽고 지도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약한 MP가 손가락 끝에 맺히고, 지도 위를 어지럽게 움직이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빛의 궤적이 되어 그려졌다. 왕도를 중심으로 서북부 변경백령까지 이어지는 기하학적인 문양.
“……형님. 이게 뭡니까?”
“나도 그리면서 확인하는 중이다. 집중하고 있으니까 잠깐 조용히 해봐.”
프레이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금색으로 불탔다.
지도 위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문양을 말없이 노려보던 그가 이내 다시 손을 움직였다. 곧 왕도를 중심으로 지도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원형의 문양이 그려졌다.
자이안이 가장 먼저 그 정체를 알아차리고 신음을 뱉었다.
“마법진?”
어찌나 복잡하고 고도의 술식이 구현된 마법진인지, 그저 눈으로 보고만 있을 뿐인데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후우, 하고 짧게 숨을 뱉은 프레이가 MP가 맺힌 손가락을 가볍게 털며 허리를 폈다.
“자이안, 아까 네가 느낀 마력 파동의 정체다.”
처음에는 추측이라고 말했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프레이의 말에 강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도로와 강, 산과 산맥 위치, 영지의 분포도 등 지형의 상당 부분이 그 위에 덮어 씌워진 마법진과 정확히 일치했다.
“왕국 전체가 천연의 마법진이다. 아니, 아니지. 이런 복잡한 마법진이 자연적으로 그려질 리가 있나. 처음에 왕국이 건국될 당시부터 이런 형태가 되도록 계획되었던 거다. 솔직히 말하면 놀랍군.”
“잠깐, 그러니까…… 건국왕께서 애초에 나라를 세우실 때 이런 마법진을 그린 거라고?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소, 형님?”
프레이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은 아직도 황금빛으로 불타며 마법진의 정확한 구조를 해석하고 있었다.
“자이안. 미적거릴 틈이 없다.”
얼마 뒤, 마침내 마안을 닫은 프레이가 급히 자이안을 돌아보았다.
“한시라도 빨리 왕도로 가봐야겠어.”
“정확한 이유는요?”
“이 마법진의 술자는 국왕이다. 마법의 내용은 인위적으로 천재지변을 불러일으켜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거고.”
자이안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사실이라면 터무니없이 강력한 마법이었다.
“강한 마법일수록 큰 대가가 필요하지. 이건 각성자가 아닌, MP를 다루지도 못하는 일반인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아냐.”
그러나 이어진 프레이의 말은 자이안을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경악에 빠뜨렸다.
“이건 마법진 내부 사람들의 목숨을 빨아먹고 작동하는 마법이다.”
* * *
아리멜티에나.
그녀가 자신의 연인과 함께 스스로의 과거를 기억해낸 것은 극히 최근이다. 그전까지는 그녀 역시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분노’라고만 불렸을 뿐이다.
“몸은 좀 어때?”
“나쁘지는…… 않아.”
머리맡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는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대답을 들은 상대의 표정은 오히려 더 어두워질 뿐이다.
“미안.”
“사과하지 마. 잘못한 건 나라고. 하, 젠장.”
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욕설을 뱉으며 곁에 털썩 주저앉는다.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다는 마음과, 그가 자신을 이렇게나 아껴준다는 사실에 기쁘다는 마음이 교차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연인의 손을 맞잡았다.
“콜시픽스. 너 혼자 잘못한 건 아냐. 굳이 말하자면, 우리 둘 다 잘못한 거지.”
한때는 ‘탐욕’이라고만 불렸던 남자는 그녀의 위로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작게 혀를 찼다.
방심, 그리고 실수. 미처 예상하지 못한 강한 적. 몇 가지 변수가 둘의 계획을 걷잡을 수 없이 망쳐 놨다.
분노가 가진 능력은 은밀하게 공간을 이동하거나 차원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해준다. 기억을 되찾은 둘은 이 힘을 기반으로 찬탈자로부터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완벽하게 도망치기 위해서는 더욱 강한 힘을 손에 넣어야 했다.
찬탈자는 수하들과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단순히 멀리 도망치기만 해서는 바로 위치를 감지당한다.
차원을 뛰어넘어 멀어진다고 해서 지배력이 약해지지도 않는다. 먼저 연결을 끊지 못하면 아무리 멀리 도망쳐도 언제든 놈의 꼭두각시가 된다.
마족이나 마물이 힘을 키우는 방법은 각양각색이지만,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효과를 볼 수 있는 건 마나에 오염되지 않은 다른 차원의 지성체를 죽이고 그 영혼의 힘을 흡수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마물의 비정상적인 살의는 바로 이런 본능에서 비롯된다.
계획을 세우는 와중에, 동족들이 모두 자취를 감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이 버리고 떠난 고향 차원으로 향한 뒤에 종적이 묘연해진 것이다.
둘은 은밀하게 고향 차원의 상황을 정탐했고, 고향이 예전과 같은 풍부한 자원을 되찾았으며 ‘인간’을 자칭하는 지성체들이 차원을 지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기묘한 우연의 일치였고,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둘은 고향 차원을 습격해 인간들을 몰살하고 힘을 키워 찬탈자로부터 도망치는 방향으로 계획을 가다듬었다. 변경백령 접경지대에서 벌어진 대규모 습격은 바로 그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강적의 등장으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무리하게 힘을 쓴 분노는 앓아누웠고, 지금도 시름시름 약해지고 있다.
‘그 괴물 같은 인간 남자. 다른 동족은 아마 그 남자에게 죽었겠지.’
새삼 떠올려도 믿을 수 없는 두려운 힘이었다.
그런 강력한 존재가 힘을 빌려준다면 계획대로 찬탈자에게서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텐데. 아니, 어쩌면 아예 찬탈자를 죽이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뒤늦은 생각이었다. 둘은 마물을 앞세워 인간을 습격하고 많은 이들을 죽였다. 자신이 상대 입장이라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아주 최악은 아니다.’
전장에서 도망친 뒤로 꽤 긴 시간이 지났으나 아직도 추적이 없다. 분노의 능력이 상대의 추적 능력을 웃돈다는 뜻이다.
한 번 마계로 돌아가 흔적을 지우고 다시 고향 차원으로 넘어오는 방법을 쓴 것도 추적을 따돌리는 데 큰 공헌을 했으리라.
문제는 무리하게 힘을 쓴 분노가 쓰러지고 말았다는 것이고.
“슬슬 자리를 옮겨야겠어. 일어날 수 있겠어?”
“걷지도 못할 정도는 아냐. 부축 좀 해줘.”
비틀거리며 일어난 분노가 탐욕의 가슴에 쓰러지듯 안겼다.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허세를 부리는 게 뻔히 보였다. 탐욕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의 힘을 끄집어내 그녀에게 나눠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본말전도다. 전투와 지휘는 자신이 맡고, 이동과 도주는 분노가 맡는다. 이게 가장 이상적인 역할 분담이다.
분노가 힘을 되찾아도 무리하게 힘을 쪼갠 여파로 자신이 약해지면 의미가 없다.
“……잠깐.”
사람의 손이 미치지 않은 숲속을 정처 없이 걷던 탐욕이 흠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마나를 민감하게 감지하는 마족 특유의 감각기관이 특정한 장소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마나의 흐름을 알아차렸다.
엄밀히는 마나가 아니라 하위 호환인 마력이었지만, 마족에게 있어서는 둘 다 별 차이가 없는 힘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잠시 멈춘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놀렸다. 탐욕은 파동이 일어난 중심지로 향하게 시작했다. 숲이 끝나고 사람의 손이 닿은 도로가 나타나자 눈에 띄지 않도록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커다란 도시로군. 문명 수준은 미개한 것 같은데, 제법이야.”
화려한 성을 중심으로 원형 시가지가 펼쳐진 도시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한 나라의 수도인 것 같았다.
광택을 내는 갑주로 무장한 병사들이 왕성 앞에 도열해 있었다. 그들 앞에 호화로운 갑주와 왕관, 붉은 망토를 두른 중년의 남자가 근엄한 목소리로 연설을 하고 있었다.
탐욕의 눈이 번뜩이며 빛났다. 마나의 파동은 그 남자를 중심으로 발생했다.
‘저 남자다.’
공중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탐욕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인간을 먹이로 보는 것은 마물과 마족의 본능. 마족이라면 이성으로 어느 정도는 자제할 수 있으나, 진미를 앞두고 그런 얄팍한 자제심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저 인간을 죽이면, 아리멜은 곧바로 힘을 회복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그 본능을 탐욕은 연인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이겨냈다.
“조금만 참아, 아리멜. 금방 편해질 거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다음 순간 탐욕은 먹잇감을 향해 운석처럼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