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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일리움 왕, 시모스(2) (155/210)


155화 일리움 왕, 시모스(2)
2023.03.07.


‘게사르트 자작도 실패했군.’

일리움 왕성, 본궁 지하.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존재조차 모르는 은밀한 공간에서의 의식을 바라보며 시모스 왕은 무심히 생각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자이안 알코스의 능력을 확인했으니 오히려 성공이라고 봐야겠지.’

한 번씩 눈을 깜빡일 때마다 왕의 눈이 희푸른 색으로 명멸하며 희미한 마력의 파동이 새어 나왔다.

정신지배를 받은 동물들이 알레프 영지의 영도를 돌아다니며 모으는 정보를 쉴 새 없이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지배가 왕홀의 힘이 아니라 시모스 왕 본연의 능력일 것이라는 프레이의 추측이 들어맞은 셈이다. 왕홀의 능력은 왕족의 피에 깃든 힘을 일깨우고 이를 증폭하는 것.

왕홀이 파괴된 지금도 정신지배는 문제없이 쓸 수 있다.

비록 규모와 힘은 크게 약해지겠지만. 그렇게 약해진 힘을 오로지 알레프에만 집중하느라 다른 지역의 정보 수집이 완전히 막혀버렸어도 시모스 왕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군무의 중진이라고 할 수 있는 게사르트 자작이 알레프에 붙잡힌 것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게사르트 자작을 직할군 사령 자리에 앉힌 건 그의 능력 때문이 아니다. 충성심이 높고 정신지배 저항력이 낮아서 다루기가 쉬우니까.

자작보다 능력 있는 인재는 충분히 있었다.

능력이 충분한데도 자작에게 밀려 부관 자리에 머무르고 있던 이들 중 한 명을 골라 승진시키면 왕실에의 충성심을 더욱 강화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조만간 알레프로부터 연락이 올 것 같은데.’

게사르트 자작은 당당히 왕의 이름을 들먹이며 변경백을 모함하려 했다.

당연히 책임을 촉구하는 연락이 올 터. 그러나 시모스 왕은 일찌감치 자작의 실패를 예상하고 미리 모든 꼬리를 잘라놓았다.

자이안의 부하인 듯 보이는 두 여자, 유리아와 소아레스의 첩보 능력은 시모스 왕조차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둘의 감시망은 알레프 영지에 국한되어 있다. 제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어도 왕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파악할 수는 없다.

게사르트 자작은 왕실의 법도대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재산과 작위를 몰수당하고 옥에 갇히거나, 법례에 따라서는 사형도 가능했다.

구하고자 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그래서는 자이안의 호감을 얻지 못할 것이다.

‘자작의 목숨을 자이안 알코스의 호감과 맞바꾼다. 충분히 이득이다.’

그날. 자이안이 용을 타고 날아와 왕궁에 침입해, 거리낌 없이 힘을 드러내며 모든 그림자들을 몰살시킨 날. 시모스 왕은 전에 없는 환희와 전율을 느꼈다.

까마득한 과거 변경백의 힘을 직접 처음 보게 된 날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자이안은 심지어 그와 비교도 되지 않게 강했다. 알레프 왕은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저런 강자는 자신의 지배하에 있어야 한다.

젊은 시절 겪은 피 튀기는 왕위 계승 정쟁. 왕위와 함께 왕홀을 계승 받고 눈을 뜨게 된 강력한 정신지배 능력. 이러한 과거의 경험들은 시모스 왕에게 뒤틀린 신념을 심었다.

강하고 능력 있는 인재는 반드시 자신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그 능력은 죽을 때까지 오직 왕국을 위해 쓰여야 하며, 지배자인 자신은 이를 위해 앞장서야 한다.

변경백의 힘에 눈독을 들이게 된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으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그 뒤틀린 신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신념에서부터 비롯된 욕망이 자이안을 향하고 있었다. 최우선순위는 자이안. 그다음은 미오네. 변경백은 지금에 와서는 3순위에 불과하다.

“커헉……!”

의식에 참여한 마법사 한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가슴을 움켜쥐며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시커멓게 죽은 피를 몇 차례 토해내더니 가늘게 경련했다. 그도 잠시, 왕의 무심한 시선 속에서 완전히 움직임이 멈췄다.

“방해되지 않게 치워라.”

기사 둘이 나서서 마법사의 시체를 옆으로 끌고 갔다.

밖으로 내버리지는 않았다. 시체 역시 의식의 재료로 쓸모가 있으니까.

마법사들이 의식을 진행시키고, 마력과 생명력이 모조리 뽑혀나간 시체는 의식을 위한 연료가 된다. 훌륭한 선순환이다.

‘곧 마무리되겠군.’

자이안은 왕홀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생각해 돌아갔지만, 사실 왕홀은 파괴된 것이 아니었다.

자이안이 부순 왕홀은 아티팩트 자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징이며 단말기일 뿐.

아티팩트의 진짜 핵은 바로 왕의 심장과 융합되어 있다.

왕을 죽이지 않고 왕홀만 파괴해서는 큰 의미가 없다. 시간이 지나면 복구되고, 지금처럼 대규모 의식으로 그 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다.

게다가 파괴된 왕홀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수확이 발견됐다. 왕홀에 또 다른 힘이 잠들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어째서 선왕들이 이 힘을 이렇게 숨겨놓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왕홀의 복구도, 왕홀에 잠든 힘의 해석도 모두 마무리 단계였다.

접경지대가 엄청난 수의 마물에 습격당했다는 사실, 변경백의 군대가 이를 막지 못해 전선을 크게 물렸다는 사실을 왕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걱정을 하거나 따로 대비를 하지 않은 이유는, 변경백이나 자이안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어차피 알레프에는 변경백과 자이안이 있다. 둘의 무력이라면 마물 따위는 수십만이 몰려들어도 왕국을 해할 수는 없을 것이야.’

그리고 지금은 거기에 새로운 이유가 하나 더해졌다.

“허어억……!”

의식을 진행하던 마법사들이 비명에 가까운 숨소리를 내며 자리에 무너졌다. 목숨은 건졌지만, 당장 기절해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기력을 잃은 상태다.

24명의 마법사가 의식에 참여했고, 끝까지 살아남은 건 11명뿐.

그러나 당장에라도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보며 열망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 광경에 시모스 왕은 조소를 지었다.

목숨을 바쳐 마도를 탐구하고, 그 끝에 정말로 목숨을 잃어도 기꺼워하는 미치광이들.

몸을 일으킨 왕이 마법사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제단의 중심, 거룩한 빛을 뿜어내며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왕홀을 붙잡았다.

빛이 찬란하게 폭발하며 지하실 전체를 뒤덮었다.

마법사들이 감격에 겨워 오오……! 하고 탄성을 흘렸다. 이윽고 빛이 잦아들었다, 아니, 시모스 왕의 몸에 빨려 들어갔다.

왕은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켜며, 심장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새로운 힘에 잠시 취했다.

‘이 힘이 있다면…….’

왕이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동자가 검푸른 색으로 빛나다가 곧 잠잠해졌다.

‘이 힘이 있다면, 복마전 전체를 평정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터.’

몇 가지 제약은 있으나, 그만큼 강력하고 파괴적인 힘이었다.

이 힘 앞에서 마물 따위는 수만이건 수백만이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변경백도 자이안도 이 힘을 감당할 수는 없으리라.

‘변경백과 자이안이 있는 이상,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없기는 하지만…….’

그들 앞에서 이 힘을 드러낸다면? 왕이 직접 나서서 마물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시모스 왕의 입매가 저도 모르게 호선을 그렸다.

‘출정을 준비해야겠군.’

등을 돌려 지하실의 출구로 걸어 나가며, 왕은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자리를 정리하라.”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쓰러진 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마법사들에게 다가갔다.

왕홀의 힘의 비밀은 오로지 왕에게만 허락되어야 한다. 게다가 모든 마력이 뿌리째 뽑혀 두 번 다시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그들에게는 더 이상 아무 가치가 없다.

피보라가 몰아치는 지하실을 뒤로하고 시모스 왕은 기꺼운 기분으로 지상으로 올라갔다.

* * *

접경지대의 상황은 비록 좋지 않았으나, 알레프 저택은 지난 며칠간 오랜만에 느긋하게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 몇 개가 곳곳에 숨어있었지만, 당장 폭발할 기미는 없었다. 미오네는 물론이고 임시로 구금당한 게사르트 자작도 묘하게 얌전했다.

「너무 신경 안 써도 돼요, 자이안.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여러 번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안 나왔잖아요?」

크룩스의 말에 자이안은 별관에서 시선을 거두고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안도 물론 유리아와 소아레스의 능력을 신뢰했다. 둘이 수상한 걸 못 찾았다면,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굳이 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잠깐 고민 끝에 자이안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이안이 별관을 돌아본 건 사실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별관 최상층 가장 구석진 방에서 아까 전부터 계속해서 시선이 느껴졌다. 펜던트의 영상통신 범위에 미치지 않는 장소라 각성자들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별관 최상층 구석은 미오네가 유폐된 방이었다. 시선의 주인도 그녀가 분명하리라. 그러나 의외로 적의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하앗! 에잇! 흡!”

미오네의 시선은 자이안이 가르친 대로 목검을 휘두르는 바란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뭔가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바란드가 자이안과 함께 안뜰에서 공부를 할 때면 슬그머니 창문에 나타나 멍하니 바란드를 바라볼 뿐. 처음 이를 알아차렸을 때는 크게 경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래도 바란드만은 자기 자식이라 이건가.’

하인들로부터 들은 얘기를 종합해보면, 적어도 미오네는 바란드 앞에서만은 자상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였다는 모양이다.

처음에는 그것도 정치적으로 계산된 행동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지금 저 모습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동정심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더 괘씸했다. 모성 같은 인간적인 감정이 남아있었더라면 더욱 자이안에게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괜히 생각하지 말자. 나만 심란해질 뿐이야.’

미오네 말고도 신경 쓸 일은 많았다. 게사르트 자작의 처분도 남아있고, 그를 끄나풀로 보낸 시모스 왕에게 또 허튼짓을 못 하도록 제대로 경고도 해야 한다.

‘말로 한다고 알아들을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아예 사고방식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국정이 개판이 될까 봐 우려되어 시모스 왕을 죽이지 못한다면, 반대로 그를 죽여도 문제없도록 미리 준비를 해 놓으면 되는 것이다.

‘왕태자, 혹은 일리움을 맡길 만한 다른 왕족과 접촉해 그에게 사실을 전하고 협력을 구한다. 시모스 왕이 당장 죽어도 국정 운영에 차질이 없도록…… 이렇게 정리하니까 내가 역모를 꾸미는 나쁜 놈이 된 것 같네.’

딱히 틀린 표현도 아니었다. 제아무리 무능력한 암군이라도, 정당한 절차를 걸치지 않고 무력으로 몰아내면 반역이 아니고 뭐겠는가.

옛날 같았으면 꿈도 못 꿨을 계획을 자연스레 떠올리는 스스로에게 놀라며 자이안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왕실로부터 자작의 처분에 대한 답변이 왔다.”

점심이 지나, 바란드의 교육도 없는 휴식 시간. 백작이 자이안을 찾았다.

“의외로 대응이 빠르군요.”

왕실에 해명을 촉구하는 사자를 보낸 게 고작 며칠 전. 물리적으로 벌써 답이 오는 건 불가능하니, 아마도 통신 마법이라든가 하는 특수한 수단을 사용한 모양이다.

묘한 기분이었다. 백작의 지원 요청이나 미오네에 대한 처분은 답을 미적거렸으면서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빨랐다.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라면서 잡아떼더구나. 뭐 이건 당연히 예상한 거니 그렇다 치고…… 그다음이 의외다. ‘게사르트 자작은 왕을 사칭하고 그 권위를 능멸한 죄로 엄중히 처벌할 것이며, 원한다면 변경백령의 자치적인 법도에 따라 처벌해도 좋다.”

자이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생각하던 프레이가 추측을 말했다.

「꼬리를 자르는 김에 너한테 점수를 올리겠다는 속셈 같은데?」

그게 사실이라면 가소로운 시도였다. 프레이의 추측을 백작에게 전하자, 백작 역시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하께서 아무래도 너를 제거하기보다는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시는 모양이구나.”

“전 싫습니다.”

“나도 안다.”

미심쩍기는 했으나 일단은 잘된 일이었다.

“미오네에 대한 대답은 아직입니까?”

“그게 좀…… 일단 오기는 했다. 네가 만족할 만한 답은 아닐 것 같다만.”

자작을 단호하게 쳐낸 것과 달리 미오네에 대한 답은 두루뭉술했다.

혐의가 있을 수도 있음은 인정하나 확실치는 않다, 백작가에서 임의로 미오네를 구금하는 것은 왕족에 대한 무례로 비칠 수도 있다, 왕실에서 직접 사실을 조사하고 싶으니 신변을 양도해 달라, 이런 내용이었다.

‘시모스 왕 답지 않다.’

자이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부하도 가족도 모두 장기짝으로 여기는 냉혹한 정치가. 그것이 시모스 왕에 대한 자이안의 인상이었다.

오랜 세월 충정을 바친 게사르트 자작을 가차 없이 쳐내는 것은 그에 걸맞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는 미오네를 구하려 애쓰는 건 이상하다.

‘그래도 자식이라서 정이 있는 건가?’

단순히 생각하면 그게 정답이겠지만, 아무래도 찜찜함이 지워지지 않았다.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조만간 한 번 더 왕궁에 찾아가야겠습니다.”

자이안은 무슨 산책이라도 나갈 거라는 양 태연한 말투였다. 잠시 말문이 막힌 백작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으며 충고했다.

“너무 피해를 키우지는 마라.”

“아버지도 참. 저도 그 정도로 경우가 없지는 않습니다.”

가볍게 너스레를 떨고, 다시 왕도로 향할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이전과 달리 구체적으로 정보를 모으고 계획을 세웠다.

단순히 왕을 협박하는 것만이 아니라, 왕위를 계승할 만한 다른 왕족을 찾아보고 그와 접선해 미리 상황을 공유해야 했다. 아무하고나 협력할 수는 없으니 미리 차근차근 준비를 해야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무렵, 어느 오후.

바란드에게 마법을 가르치던 자이안이 갑자기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형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집중이 끊긴 바란드가 천진한 얼굴로 물었다. 자이안은 정신을 차리고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드럽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속마음은 결코 부드럽지 못했다.

‘잘못 느낀 게 아냐.’

조금 전. 아주 짧은 순간, 짙은 마력의 파동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의 전신을 휩쓸며 멀리 사라졌다.

그 파동은 일전에 시모스 왕과의 만남에서 느낀, 왕홀이 뿜어내는 불길한 마력의 파동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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