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일리움 왕, 시모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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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일리움 왕, 시모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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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일리움 왕, 시모스(1)
2023.03.06.
백작은 밤새 보고서 등을 처리하느라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키고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제는 중요한 작업을 대부분 끝내고 사소한 것들만 남았다. 남은 건 굳이 백작이 직접 처리할 필요 없이 가인들을 시켜도 될 정도.
‘오늘은 게사르트 자작이 없군.’
창밖을 내다본 백작이 눈초리를 좁혔다. 자작은 지난 며칠간 꾸준히 새벽 훈련을 하는 자이안의 앞에 나타났다.
무슨 의도인지는 노골적으로 보였다. 자이안을 아군으로 끌어드리려는 것이다.
백작이 보기에는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자이안을 붙잡아 두기에 일리움 왕국이라는 틀은 너무나 작았다.
‘갑자기 행동이 변했다. 그렇다는 건…….’
백작 역시 자작이 왜 이런 시기에 굳이 군을 이끌고 찾아왔는지 알고 있었다. 백작 스스로 알게 된 것은 아니고, 자이안이 알려줬다.
아들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백작은 능력의 차이를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조만간 본색을 드러내겠군.’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
게사르트 자작이 수십 명의 병사를 이끌고 저택을 들이닥쳤다.
“자작. 이게 무슨 짓이오?”
“알레프 변경백. 참으로 유감입니다.”
저택에 주둔 중인 기사들이 무장을 갖추고 자작의 앞을 막았다. 당장 칼부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러나 자작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이걸 보시지요, 변경백.”
자작이 품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냈다.
왕의 직인이 찍힌 서류는, 그를 알레프 변경백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한 특별 감찰관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서류를 슥 살핀 백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서류에 적힌 혐의의 내용은 대부분이 터무니없는 과장이거나 날조에 불과했다. 그러나 적어도 거기 찍힌 직인만은 진짜였다.
“영도에 머무르는 동안, 부하들과 함께 몰래 혐의를 조사했습니다. 저로서는 사실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혐의의 대부분은 사실로 밝혀졌군요.”
지금 자작은 왕의 위세를 빌려 입은 것이다. 제아무리 변경백이라도 무턱대고 이를 거부할 수는 없다. 자칫하면 왕명을 거부한 것이 되니까.
“백작. 긴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겸허히 죄를 인정하고, 죗값을 치르십시오.”
자작이 비릿하게 웃으며 보란 듯이 서류를 내밀었다.
* * *
“어머님에 이어 아버님까지…….”
이번에는 바란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초지종을 지켜봤다. 애써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으나, 이번만은 어려웠다.
미오네의 죄상이 밝혀지고 별관에 유폐된 것만 해도 어린 바란드에게는 견디기 힘든 상실이었을 터.
그런데 이제는 아버지까지 얼토당토않은 죄목으로 잡혀가게 생겼다. 울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만 해도 대단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바란드. 아버지는 괜찮을 거야.”
자이안이 바란드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었다. 바란드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혀, 형님. 아버님께서 정말로 그런 일들을 저질렀을까요?”
게사르트 자작에게 거론된 백작의 혐의는 부당하게 영민을 수탈했다든가, 왕실에 대한 불충을 저질렀다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증거와 증인도 충실히 준비되어 있었다. 유리아와 소아레스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자이안조차 그대로 속아 넘어갔을 정도였다.
그게 모두 날조된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지금은 그런 능력을 이런 일에 쓰고 있다는 사실이 한심할 뿐이었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아버님께서는 죗값을 치러야겠지요.”
바란드의 대답은 훌륭했으나 놀랍지는 않았다. 이미 바란드는 미오네가 유폐되었을 때에도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인 바 있었다.
“하지만 그게 지금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이어진 그 말에는 조금 놀랐다.
“왜 그렇게 생각해?”
“다소 소강상태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전시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아버님께서는 국왕 전하께 충성을 바친 귀족이기도 하지만 전선을 지키는 사령관이기도 합니다. 전시에 사령관의 죄를 묻는 군주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죄를 묻고자 한다면 전시가 끝난 뒤에. 시급히 죄를 물어야 한다면 하다못해 이를 대체할 인재를 먼저 마련해야 마땅해요.”
바란드는 우려로 흐려진 표정으로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아버님마저 잡혀가게 되면 가문은 물론이고 나아가 왕국 전체가 위험해질 거예요.”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릴 뻔했다. 사실 그렇게까지 복잡한 얘기는 아니다. 침착하게 생각한다면 누구나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런 식견을 8살 어린아이가 발휘한다는 사실은 분명 놀라웠다.
“어쩌면…… 전하께서 어머님의 죄를 사하기 위해 무리한 수단을 강행한 것인지도 몰라요.”
자이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대해서는 자이안도 비슷하게 추측했다.
이대로 자작의 날조가 먹혀 백작이 실각하면, 알레프 가문은 가주가 없는 행정 마비 상태가 되고 만다.
변고 등으로 가주 자리가 비게 되면 보통 자식이나 부인이 그 자리를 대리하게 된다.
바란드를 가주 대리에 앉힐 수는 없으니, 이는 미오네를 유폐에서 해방하기 위한 좋은 명분이 될 것이다.
‘하긴, 바란드가 이대로만 자라 준다면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긴 한데.’
미오네는 유폐되고, 백작은 행정 능력이 영 어설프고 가문에 대한 책임감도 부족했지만 그래도 자이안은 가문의 미래가 마냥 어둡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둘 사이에서 대체 어쩌다 이런 아이가 태어난 건지 믿기지가 않을 정도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바란드.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자이안은 바란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심시키듯 말했다. 너무나도 낙관적인 그 말에 바란드는 의아해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순간 무언가 알아차린 듯 눈을 크게 떴다.
“……또 형님께 도움을 받게 되는군요.”
고개를 숙인 바란드가 죄스러운 심정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가문은 그에게 뭐 하나 해준 게 없는데, 자이안이 돌아온 뒤로는 계속해서 그에게 도움만 받고 있었다.
“저번에 말했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일 뿐이라고.”
자이안은 별 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다. 백작에 대해서는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대로 몰락하는 걸 바랄 정도는 아니었다.
저지선에서의 전투를 겪어 보니 어느 정도는 그의 입장이 이해되기도 했다.
비록 아비로서는 못난 사람이었지만,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하나라도 더 많은 이들을 지키고자 애써 왔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희생을 폄하하게 둘 수는 없다.
“유리아, 소아레스.”
복도 저편에서 두 사람이 다가왔다. 옆에는 아르스도 있었다. 자작의 날조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자이안 님,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어.”
이번에 준비한 것은 소리와 영상을 기록했다가 원하는 때에 출력하는, 말하자면 동영상 녹화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아티팩트였다.
자이안은 한 차례 일행들을 돌아본 뒤, 마지막으로 바란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한창 백작과 자작이 설전을 펼치고 있는 방으로 향해 문을 두드렸다.
* * *
“아까부터 계속 똑같은 말을 하게 하는군, 자작. 지치지도 않으시오?”
“지치다니요? 전하의 명을 받드는 한, 변경백께서 모든 혐의를 인정하게 될 때까지 제가 지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백작은 의자에 앉은 채 이마를 짚으며 인상을 썼다.
솔직히 말하면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동안 얼마나 공을 들인 건지, 자작이 준비한 증거들은 백작 본인이 봐도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게 아닌지 의심하게 될 정도였다.
‘어쩌면 내가 아니라 휘하 단장 중 몇몇이 일탈을 한 것일지도…… 이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그만큼 정교하게 조작된 증거였다. 그렇다고 순순히 혐의를 인정할 수는 없었다. 백작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할 말은 똑같소, 자작. 나와 내 휘하 기사단은 당신이 말한 횡령, 서류 조작, 왕실에의 거짓 보고, 뭐 그런 일들은 조금도 저지르지 않았소.”
“그 말씀은, 전하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뜻입니까? 자칫 불충의 죄가 더해질 수 있습니다, 변경백.”
“없는 사실까지 지어내 나를 핍박하는 전하께 정말 충정을 바칠 가치가 있는지 일고가 필요하겠구려.”
날카로운 대답에 자작의 표정이 굳었다.
사실, 자작 역시 마냥 상황을 낙관하지는 않고 있었다.
물론 증거는 스스로도 자부할 정도로 완벽했지만, 지금처럼 백작이 막무가내로 뻗대면 마땅한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건 백작의 무력이었다. 당장은 얌전하지만, 만약 그가 화를 못 참아 자작을 죽여 버리기라도 하면?
백작이 섣부른 행동을 못 하도록 병사들을 잔뜩 끌고 왔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마 그가 마음먹으면 지금 뒤에 서 있는 네 명의 병사는 눈 깜짝할 새에 피떡이 되어버릴 것이다.
물론 정말로 그런 짓을 저질렀다가는 백작은 왕국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되지만, 그때는 어차피 자작은 싸늘한 시체가 된 뒤다.
왕실에 대한 충성도 살아있을 때에나 의미가 있지, 죽고 나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때문에 자작은 언제든 백작을 강제로 연행할 수 있음에도 되도록 그를 말로 설득하기 위해 이렇게 애쓰고 있었다.
자작의 그런 심정의 변화는 그에게 걸린 정신지배가 서서히 약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왕의 명령을 의심하지 않고 맹신하며 목숨을 바쳐 충성해야 한다는 암시가 벗겨지며 목숨을 아끼기 시작한 것이다.
“자이안입니다. 잠시 실례할게요.”
결론이 없는 쳇바퀴 같은 문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마치 영원히 반복되는 시간 속에 갇힌 것만 같은 상황 속에서 처음으로 변화가 찾아왔다.
백작과 자작이 허가를 내리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고 자이안이 당당히 들어왔다. 유리아와 소아레스도 함께였다.
“자이안 공. 이게 무슨 무례한 행동입니까?”
백작의 표정에 안도가 어렸고, 반대로 자작은 불편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자이안을 힐난했다. 정작 자이안은 사과 한마디 없었다.
그는 비어있는 자리에 태연하게 앉았다. 자작의 눈짓 한 번에 병사들이 대번에 무기를 꺼내 들었음에도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지금 자작께서 준비한 증거들을 반박할 증거를 가져왔습니다.”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자작이 예의를 차리는 것도 잊고 멍청히 반문했다.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동영상이 기록된 아티팩트를 꺼내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자이안이 아티팩트를 하나 조작하자, 테이블 위에 반투명한 영상이 펼쳐졌다.
으슥한 골목길. 허름하게 차려입은 남자 2인조가 부랑자 하나를 붙잡는다. 그에게 슬그머니 금화를 하나 건네며 은밀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린다.
묵직한 금화의 감각에 광기로 번들거리던 부랑자의 눈이, 뒤이어 목에 와 닿은 비수의 서늘함에 금세 비굴함으로 물든다.
이윽고 2인조는 으슥한 그림자 속으로 교묘하게 사라진다. 부랑자는 골목길을 떠돌고 피난민 무리에 섞여들며 백작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한다.
“이, 이건…… 이게 그러니까…….”
자작의 말이 급격하게 어눌해졌다. 그러나 준비된 영상은 하나가 아니었다.
다음 영상. 처음과 똑같은 2인조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들이나 입을 법한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다.
날조된 이름을 대고는 영도의 식량 불출을 맡은 관리와 대면해, 그에게 거짓 증언을 요구한다. 관리는 난색을 표하지만, 2인조가 꺼낸 가족의 이름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에게는 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가 있고, 2인조는 어머니를 모실 수 있도록 부족함 없는 지원을 약속한다. 관리는 결국 참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이 모든 대화는 비밀에 부쳐진다.
“이, 이건 사악한 환술입니다!”
몇 개의 영상이 더 재생되었을 즈음, 자작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자이안 공, 실망입니다! 전하께서 그 영민하신 혜안으로 이미 모든 죄를 꿰뚫어 보고 계신데, 아무리 혈연이 중하다 한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악한 환술에 의존하다니!”
“환술이라.”
백작이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 말, 확실히 책임지실 수 있겠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변경백! 이런, 이제 보니 변경백도 한통속이었군요! 감히 이런 사술로 전하를 능멸하려 들다니,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겁니다! 병사들은 어서 저 둘을 붙잡……!”
그 순간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어느새 밖으로 사라졌던 소아레스가 남자 두 명을 이끌고 들어왔다. 그 익숙한 얼굴에 자작은 망연히 입을 닫았다.
영상 속에서 몇 번이나 보인 2인조였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둘은 임무를 마치는 즉시 영도를 떠나 최대한 멀리 도망칠 것을 명령받았다. 신분 역시 말끔하게 지우고, 행여나 의심을 받지 않도록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추적은 불가능하다. 그래야 정상이다.
“이래도 환술이오?”
백작이 다시 한번 물었다. 자작은 떨리는 눈으로 2인조를 바라보았다. 둘은 슬그머니 그 시선을 피했다. 자이안이 그들 대신 말했다.
“두 사람은 그동안 당신의 지시로 저지른 일을 모두 자백했어요. 남은 건 당신뿐입니다, 게사르트 자작.”
“이, 이이익……!”
자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자이안에게 삿대질을 하며 악에 받쳐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 둘을 붙잡으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움직였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울리고, 병사들이 쥐고 있던 무기가 반으로 부러져 사방으로 날아갔다.
“더 저항할 거라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자이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일견 관대해 보이는 그 말은, 그 행동의 책임을 자기 목숨으로 지게 되리라는 뜻을 은연중에 포함하고 있었다.
“…….”
자작은 목덜미에 닿은 서늘한 단검의 감촉에 시커멓게 죽은 안색으로 식은땀을 흘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