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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화 미오네(2) (153/210)


153화 미오네(2)
2023.03.05.


“고작 그게 궁금했던 건가요?”

식기를 내려놓은 미오네가 자이안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당신도 참 어지간히 할 일이 없나 보네요. 고작 그런 걸 듣고 싶어서 여기까지 찾아올 정도면.”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신랄한 말이었다.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굉장히 공격적이시네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런 꼴이 됐는데……!”

“그거야 당신 때문이죠. 자업자득이잖아요?”

“……!”

눈을 부릅뜬 미오네가 입을 뻐끔거렸다. 잠시 뒤, 그녀는 언제 그렇게 공격적이었냐는 듯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모습은 흡사 모든 감정을 쏟아내 버리고 말라비틀어진 듯 보였다.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미오네가 힘없이 식기를 들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자업자득으로 무너져 내린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나요?”

“글쎄요. 딱히 그렇지는 않은데.”

어깨를 으쓱한 자이안이 반대로 미오네에게 물었다.

“저는 오히려 당신 기분을 듣고 싶은데요. 뭐, 비웃는다거나 놀리고 싶다는 건 아닙니다만. 순수하게 궁금해서요.”

“……지금 당장 나이프로 당신 눈알을 찔러버리고 싶어요.”

신랄한 말과는 달리 묵묵히 식사를 입으로 가져다 옮길 뿐이었다. 자이안은 그 초췌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면 불편해서 식사가 안 넘어가거든요.”

참지 못한 미오네가 자이안을 흘겨보았다. 자이안은 시선을 거두지 않고 어깨만 으쓱했다.

“불편해도 참아요. 지금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대답이라뇨?”

“아직 제 물음에 대답 안 했잖아요. 대체 저한테 왜 그랬냐고.”

식사를 멈춘 미오네가 아연히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그게 궁금하다고?”

“그렇게 이상하게 여길 일입니까? 저를 학대하고 죽이려 한 상대한테 왜 그랬냐고 물어보는 건데.”

자이안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금까지의 가벼운 태도를 버리고, 진지하게 미오네를 마주 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미오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스물도 안 된 청년의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깊고 어둡게 가라앉은 눈. 자이안이 세상 물정 모르는 그저 착해빠진 청년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해하려 노력했었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죠.”

과거를 돌이켜보며 자이안이 말했다.

나이아가 죽고, 그녀를 뒤따르듯 자이안에게도 쇠약증이 발병하고, 온 가문이 시름에 휩싸였을 때 나타난 미오네.

자이안의 태생을 폄하하고, 그를 후계자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시작한 갖은 학대.

“알레프는 왕국의 안보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이니까,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병자를 후계자로 둘 수는 없었겠죠. 그 판단은 이해해요.”

그러나 자이안이 이해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특히, 그가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왜 제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었습니까?”

자이안의 의중을 묻거나 그를 설득하려는 단 한 번의 시도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적으로 그를 공격하기만 했다는 점.

“상의…… 라고요?”

고개를 든 미오네가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세상 물정도 모르는 어린아이였던 당신에게 상의? 부탁이니 왕국을 위해 후계자를 포기해 달라, 뭐 이런 말이라도 했어야 했다는 건가요? 그럼 대체 뭐가 달라진다고? 얌전히 자기 자리를 포기할 셈이기라도 했나 보죠?”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은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을 겁니다. 당신이 지금 같은 상황에 처하는 일도 없었을 거고.”

“하. 거짓말하지 마요, 이 위선자 같으니.”

미오네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모두 악하다. 선이라 함은 추악한 악성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낸 얄팍한 가면에 불과하다.

그것이 미오네가 아는 인간의 본질이었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며 형제자매가 서로를 죽이는 왕실이라는 이름의 마경에서, 미오네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확실히 배웠다.

“정말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요, 미오네? 인간은 모두 악하고, 선은 거짓일 뿐이라고?”

자이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심으로 자신을 측은히 여기는 듯한 그 눈빛에 미오네는 순간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미오네는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나이프를 거칠게 내던졌다. 날카로운 은제 나이프가 자이안의 이마에 부딪힌 다음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자이안의 이마에는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다. 괴물을 보는 듯한 역겨운 기분이 점점 더 강해졌다. 미오네는 씹어뱉듯 사납게 말했다.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자이안은 한숨을 삼키며 나이프를 주워 테이블에 다시 올려놓았다.

그러나 미오네는 나머지 식기마저 내던지고는 힘없이 침대 위에 쓰러질 뿐이었다. 음식은 아직 절반 가까이 남아있건만, 더 먹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

“아직 얘기는 안 끝났는데요.”

“당장 꺼지라고!”

의자에서 일어난 자이안은 그 말에 따르는 대신 침대 위, 미오네의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그 순간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킨 미오네가 그동안 숨겨놓은 비수를 쥐고 자이안에게 달려들었다.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칼날을 맨손으로 붙잡아 세우고, 자이안은 잠시 말없이 미오네를 내려다보았다.

“끝까지 반성하지는 않는군요.”

“뭐?!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미오네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내가 나 하나 좋자고 그랬을 것 같아?! 모든 건 오직 왕국을 위해서였어! 너 같은 괴물은 사라져버리는 게 나아! 그래서 죽이려고 한 것뿐이라고!”

팔목을 붙잡힌 채 미친 듯이 날뛰던 미오네가 어느 순간 힘이 쭉 빠진 듯 힘없이 늘어졌다.

“세상에 죽어도 좋은 목숨 같은 건 없습니다, 미오네.”

“입바른 소리 하지 마. 역겨우니까.”

“잘못을 후회하지는 않는 겁니까?”

“내가 저지른 건 잘못이 아니야. 왕국을 위한 정당한 희생이지. 후회? 흥, 당연히 후회하지.”

자이안의 손아귀를 거칠게 떨쳐낸 미오네가 적의로 가득한 눈동자를 향했다.

“그때 너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확실히 죽였어야 했는데.”

“…….”

자이안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의 대화를 통해 확실히 실감했다.

시모스 왕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이안과 미오네는 아마 평생이 걸려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에 내키면 또 오겠습니다.”

문을 나서기 직전 자이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뒤늦게 내던져진 식기들이 닫힌 문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자이안은 그제야 억누른 감정을 해방하며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훌륭한데.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악녀야.」

프레이가 입매를 비틀며 비아냥 섞인 감상을 꺼냈다. 자이안은 뭐라 할 말이 없어 쓴웃음만 지었다.

모처럼 용기를 내 독대했는데도 이렇다 할 수확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미오네가 드러낸 왕국을 향한 비정상적인 헌신. 이게 과연 진짜 그녀의 감정일까?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왕궁 알현실에서, 시모스 왕이 왕홀의 힘으로 정신지배를 증폭해 암살자들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모습을 봤다.

오늘 왕의 명을 받아 찾아온 게사르트 자작 역시 판단력을 흐리고 사고를 유도하는 정신지배에 걸린 상태였다.

그렇다면 어쩌면 미오네 역시, 왕의 꼭두각시였던 건 아닐까?

「저거 또 또 쓸데없는 생각 한다.」

표정 변화만 보고도 자이안의 심경을 얼추 꿰뚫어본 프레이가 다 들으라는 듯 말했다.

「자이안, 혹여라도 말도 안 되는 호구 같은 생각은 절대 하지 마라. 호구 짓도 사람을 가리고 선을 지켜야지. 대놓고 너 죽이려 드는 상대한테까지 그러면 그건 호구가 아니다. 그냥 등신 새끼지.」

신랄한 말에 자이안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 같은 게 있다고 해서 사사로이 죄의 무게추를 더하거나 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럴 거였으면 보석탑에서 마법사들이 모조리 처형당하게 두고만 보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감정은 이성과는 별개였다. 만약에라도, 비약에 가까운 자이안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저, 어쩔 수 없을 만큼 불쌍한 여자라고, 그렇게 생각했을 뿐입니다.’

굳게 닫힌 방문을 마지막으로 한 번 되돌아본 뒤, 자이안은 미련 없이 별관을 떠났다.

* * *

“자이안 공, 오늘도 이런 이른 시간부터 훈련이십니까?”

완전히 일과로 정착된 새벽 훈련 시간. 무심히 검을 휘두르는 자이안의 귀에 불협화음이 들려왔다.

집중이 흐트러진 자이안은 잠시 칼끝을 내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정말 열심이시군요. 변경백령의 군사들이 모두 일기당천의 정예병인 것이 다 자이안 공께서 이리 모범이 되어주시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과하게 상대를 치켜세우는 사근사근한 말투. 자이안은 삐뚤어지려는 표정을 다잡으며 꾸벅 가볍게 인사했다.

“그러는 자작도 아침 일찍부터 바빠 보이시네요.”

“저야 뭐, 전하의 녹을 받아먹고 사는 몸이니 하루하루 분골쇄신하는 것이 신하의 당연한 덕목이 아니겠습니까. 하하.”

예의상 나누는 인사말 속에서 자이안은 아주 짧은 순간 자작의 표정이 굳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는 자이안이 아무 경칭도 없이 그를 ‘자작’이라고 부른 순간. 순식간에 가면 같은 웃는 표정으로 되돌아오기는 했으나, 자이안의 눈썰미를 속이지는 못했다.

「엄청 노골적이구만.」

「저희는 사정을 다 아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면 딱히 그렇지도 않을걸요?」

프레이와 크룩스 사이에 상반된 의견이 엇갈렸다. 자이안은 불편한 심정을 감추기 위해 필사저적으로 감정을 다스려야만 했다.

자작이 가문을 찾아온 목적은 이미 유리아와 소아레스에 의해 모두 밝혀진 상태였다.

자작이 은밀하게 영도 곳곳에 흩뿌린 부하들을 역으로 감시해 알아낸 것이다.

매일 아침 자이안을 찾아와 친근한 척 구는 것도 그를 회유하고자 하는 연기에 불과하다. 그걸 알면서도 맞춰주려니 상상 이상으로 고역이었다.

‘차라리 뭔가 사고라도 일으켜주면 편할 텐데.’

자작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신중했다. 유리아와 소아레스에게 목적을 들킨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고, 차근차근 정보를 모으며 확실한 계획을 세울 때까지 결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당장 자이안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자작위의 귀족을 아무 명분도 없이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칫 잘못했다간 알레프 백작의 입장이 아주 난감해진다. 어느 정도 예절을 갖추되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도록 선을 긋는 것이 최선이었다.

“바쁘실 텐데 슬슬 들어가 보세요, 자작. 저는 조금만 더 땀을 흘리겠습니다.”

“하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조금 뒤 다시 뵙겠습니다.”

무기질적인 미소 아래로 이죽거리는 심정을 감추며 자작이 자리를 떠났다. 자이안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목검을 들고 천천히 뒤두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 번 흐트러진 집중력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면서도 자이안의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잡생각이 떠올랐다.

‘조만간 뭔가 행동을 일으킬 것 같은데.’

아니, 그것은 잡생각이 아니라 예감이라고 표현해야 하리라. 그동안의 경험과 논리적 추론, 직감이 한 데 어우러져 만들어낸 예지에 가까운 추측.

그리고 그 예감은 며칠 뒤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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