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미오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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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화 미오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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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화 미오네(1)
2023.03.04.
‘꼴이 말이 아니군, 변경백. 물에 홀딱 젖은 사자가 꼭 이런 모습이겠어.’
백작의 뒤를 따라가며 게사르트 자작은 생각했다.
일리움의 귀족에게 있어 알레프 변경백은 질시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자작에게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그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한 듯 초췌한 백작의 모습에, 그는 가슴에 얹힌 묵직한 체증이 쓸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접경지대의 상황이 많이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호전된 상태요. 아직 방심할 수는 없지만.”
“폐하께서 보내신 2,500의 용맹무쌍한 군대가 함께한다면 필시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랬으면 좋겠구려.”
속을 떠보며 살살 신경을 긁는 말에 백작은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고 무심히 대꾸할 뿐이었다. 자작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비웃음을 짓고 싶은 기분이었다.
백작의 군대가 크게 패주했음은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이 주변만 봐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백작은 이런 상황에서도 약한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세만은 과연 대귀족답군. 변경의 야만적인 무지렁이 주제에.’
속으로 한껏 백작을 욕하며, 자작은 이번에는 시선을 조금 돌려 백작의 옆을 바라보았다.
‘이 청년이 자이안인가?’
아까부터 무덤덤하게 백작의 뒤를 따르고 있는 청년이었다. 일리움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검은 머리와 눈.
자작은 10년도 더 된 까마득한 옛날, 왕실에 돌았던 소문을 떠올렸다.
변경백이 악마의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 허황된 소문이라는 건 알았으나, 직접 보니 확실히 기분 나쁜 모습이었다.
왕이 미오네를 보내 새로운 후사를 만들게 한 건, 불치병도 불치병이지만 그 외모도 적잖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군.’
처음 봤을 때부터 자작은 자이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작의 자식이라고는 하나, 작위도 관직도 없으면서 자작인 자신에게 인사 한마디 없다니.
게다가 지금도 백작하고만 간간이 몇 마디를 나눌 뿐, 자작은 아예 있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제대로 된 예절을 배우지 못한 게 분명하다.
‘인재를 고르는 데 폐하의 눈이 틀린 적은 별로 없으니……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출정을 떠나기 전, 자작은 왕에게 불려 몇 가지 임무를 명받았다. 병력 파견은 이를 위한 명분이었다.
하나는 현재 변경백의 상황을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그의 힘을 깎아놓을 것. 이건 당장은 필요가 없어 보였다.
굳이 자작이 수를 쓸 필요도 없이 백작의 군대는 궤멸이나 다름없는 상태이니까.
다른 하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자이안의 정보를 모으고 그를 반드시 왕실 측에 회유할 것.
‘적조차 포용하고자 하시다니. 쉬이 내리지 못할 용단이야.’
얼마 전, 왕실에 큰 사고가 있었다.
정체불명의 괴한이 침입해 성벽과 별궁 일부를 부수고 왕의 처소에 침투해 그의 목숨을 위협한 것이다.
다행히 왕은 무사했지만, 당연히 왕실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왕실 직할군 사령관인 자작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초에는 괴한의 정체도 목적도 불명확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게 명료해졌다.
왕이 직접 사실을 밝힌 것이다.
물론 모든 관료에게 밝히지는 않았고, 이를 알아야만 하는 일부 중진들에게만. 자작은 자신이 그중 한 명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이 더없이 뿌듯했다.
‘미오네 왕녀는 아직 저택에 유폐되어 있는 건가?’
마지막 임무는 미오네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자작으로선 다소 의아한 심정이었다. 지금 그녀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
‘내가 판단할 문제는 아니지. 어디까지나 전하의 명을 따를 뿐.’
자작은 고개를 작게 내저어 허튼 생각을 떨쳐내고는 재차 마음을 다잡았다.
‘결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전하.’
* * *
「조금 전에 그 게사르트라는 귀족 말이다.」
백작과 자작이 협의를 위해 함께 떠나고, 혼자 남은 자이안은 피난민들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프레이가 입을 연 것은 자작과의 거리가 충분히 멀어졌을 때였다.
「정신지배를 받고 있던데.」
“예?”
자이안이 저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섰다.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고. 곳곳에 자작의 부하들이 퍼져 있다.」
자이안은 작게 숨을 삼키며 주변에 의식을 집중했다. 프레이의 말을 듣고 보니, 알게 모르게 그를 감시하는 이들의 모습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행동하면서 설명만 들어라. 아예 사람을 의지가 없는 꼭두각시로 만들 정도로 강력한 정신지배는 아니다. 판단력을 조금 두루뭉술하게 만들고 감정을 유도하는 작은 암시 정도야.」
‘마족의 짓일까요?’
「아니.」
뜻밖에도 프레이의 답은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마족이 아니라면 누가 자작에게 정신지배를 걸었단 말인가? 의문이 떠오르고, 거의 직후 한 가지 답이 떠올랐다.
‘설마 시모스 왕이?’
「마안으로 본 바로는 확실하다.」
프레이가 확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안은 작게 신음을 뱉었다.
「그렇다면 왕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해야겠네요. 순수한 의도로 병력을 지원할 뿐이면 굳이 정신지배를 걸 필요는 없었겠죠.」
「그렇겠지. 지금 왕이 벼르고 있는 게 뭐가 있지? 알레프를 잡아먹는 거하고 미오네를 구출하는 거. 이게 단가?」
당장 떠오르는 건 그 정도였다. 그러나 자이안은 곧 새로운 의문을 떠올렸다.
‘……하지만 왕홀은 부쉈잖아요.’
왕을 죽일 수는 없었지만, 그가 더 이상 허튼 짓을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어떻게 아직도 정신지배를 사용할 수 있을까.
「정신지배라는 건 애초에 마족이 아니어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일종이다. 거 왜, 보석탑에도 한 명 있었잖냐.」
프레이의 말에 자이안은 다시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뭐가 목적인지 확실히 알아내야겠군요.’
「협상이나 회유로 자백을 받아내는 건 어려울 거다. 아마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미리 정신지배를 건 거겠지.」
일견 어려운 일처럼 보였으나, 다행히 일행 중에 첩보의 달인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있었다. 소아레스와 유리아였다.
“게사르트 자작에게 감춰진 목적이 있을 것이고, 이를 알고 싶다. 그런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걱정 마, 자이안. 나랑 소아레스랑 힘을 합하면 금방 끝날 거야!”
둘은 자이안의 부탁을 선선히 들어줬다. 자이안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둘이 나선 이상 시모스 왕의 계략에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동안 유민과 함께 피난민과 부상자들을 돌보고, 해가 뉘엿뉘엿 기울 즈음 자이안은 저택으로 돌아갔다.
본관에 들어서기 전, 자이안은 문득 고개를 들어 별관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미처 해결하지 못한 일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갑작스러운 마물과 마족의 습격, 그리고 민간인 피난 준비 때문에 여태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슬슬 미오네와 독대를 해봐야겠어.’
자이안은 이를 위해 곧장 백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자작과의 협의를 얼추 마친 백작은 홀로 집무실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잡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지금 말이냐? 그래, 마음대로 하거라.”
자이안의 요청을 백작은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가볍게 허락했다.
자이안은 곧장 별관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그녀와 함께 먹을 식사도 준비해 갔다. 본래는 시종이 할 일이지만 어차피 가는 김이니 대신하기로 했다.
송구해 하는 시종을 웃음으로 떠나보낸 뒤, 자이안은 그가 해준 설명을 따라 별관 최상층 가장 끄트머리의 방으로 향했다.
“후우…….”
문 앞에 선 자이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막상 그녀와 독대할 생각을 하니 여태 느끼지 못하던 긴장감이 뒤늦게 스멀스멀 올라왔다. 자이안은 한 손으로 접시를 받치고 천천히 문을 두드렸다.
“…….”
인적 없는 복도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설마 도망친 건가?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감각을 집중해보니 문 너머로 사람이 있는 기척이 분명히 느껴졌다. 자이안은 안심하며 재차 문들 두드렸다.
“식사를 가져왔는데요.”
“……!”
안쪽에서 옷가지가 스치며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자, 자이안?”
“문 좀 열어줄래요? 아니면 억지로 부수고 들어갑니다.”
잠시 침묵. 이내 미오네가 힘없이 말라붙은 목소리로 말했다.
“열려 있으니까 마음대로 들어오든지 해요.”
“그럼…….”
살짝 문을 여러 안을 살피고, 실례될 일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완전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미오네는 침대 위에 옆으로 드러누워 있었다.
그대로 고개만 들어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닐비스는 어디 가고 당신이 식사를 가져온 거죠?”
“잘 지내나 궁금해서 좀 보러 왔어요. 시종은 그냥 얌전히 돌려보냈으니까 걱정 마시고요.”
뒤늦게 몸을 일으키며 미오네는 입술을 깨물었다.
유폐된 그녀의 수발을 들어주는 단 한 명의 시종, 닐비스. 그는 저택 내에 유일하게 남은 미오네 파벌이기도 했다.
본래 백작은 미오네 파벌을 하나도 빠짐없이 뿌리 뽑으려 했으나, 생각을 바꿔 그 한 명만을 남겼다.
유폐되었다고는 해도 수발을 들 시종이 한 명은 필요하니, 마침 그가 적격이라고 여긴 것이다. 물론 그 일거수일투족에는 지금도 엄중한 감시가 붙어 있었다.
“이제 와서 무슨 일이죠? 날 비웃으러 온 건가요?”
마지막 남은 아군마저 해코지를 당해 사라진 게 아닐까 걱정한 미오네의 마음을 자이안이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속마음이 훤히 드러난 기분에 미오네는 표독스럽게 인상을 썼다.
“눈치가 좋네요. 어떻게 아셨어요?”
테이블과 의자를 침대 근처로 끌어와 자연스럽게 앉으며 자이안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식사가 테이블 위에 얹혔다. 물과 빵 두덩이, 야채가 들어간 묽은 수프뿐인 평소에 비해 제법 호화로웠다.
“일단 좀 드세요. 그러면서 얘기나 좀 하죠.”
“이건…… 닐비스가 만든 게 아닌 것 같은데…….”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나름 먹을 만할 겁니다.”
미오네의 눈빛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그러다가 돌연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이 조소를 머금었다.
“하. 날 독살할 셈인가요?”
“어…… 그 발상은 생각 못 했는데. 제가 당신을 죽이고 싶었으면 그런 귀찮은 짓을 할 필요가 없죠. 얼마든 죽일 수 있는데. 독 같은 건 없으니까 걱정 말고 드세요.”
“나보고 당신 말을 믿으라고요?”
아무래도 증명이 되지 않으면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을 모양이었다. 자이안은 어쩔 수 없이 식기를 들고 음식들을 조금씩 덜어내 한 번씩 맛을 봤다. 그리고는 빙긋 웃으며 미오네를 돌아보았다.
“이제 믿겠어요?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좀 먹어요.”
사실 자이안에게는 어지간한 독은 통하지 않으니, 지금처럼 독이 없는 척하면서 미오네를 독살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정말로 음식에 독을 타지는 않았지만. 그가 말한 대로, 미오네를 죽일 거면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
그러고도 쉬이 믿지 못해 자이안을 노려보던 미오네가 마침내 식기를 받아들었다.
물로 헹군 식기를 냅킨으로 닦아 깨끗하게 만들고, 간신히 그녀가 식사를 생각했다. 자이안은 그 모습이 마치 상처를 입은 맹수 같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제 슬슬 얘기를 들어보고 싶은데.”
자이안이 미오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한테 대체 왜 그랬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