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복마전의 이변(3)
(151/210)
151화 복마전의 이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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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화 복마전의 이변(3)
2023.03.03.
“……허어. 이게 대체 뭐야.”
자이안과 마주 선 마족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낮게 탄식을 뱉었다. 뒤쪽에 선 여자의 반응은 그보다 더했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무시무시한 괴물을 목도하기라도 한 듯, 창백한 얼굴로 어깨를 떨고 있었다.
“저, 저건…… 위, 위험해.”
“그래. 나도 보면 안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자이안은 칼끝을 똑바로 겨눴다.
아까부터 후각이 쉴 새 없이 경종을 울렸다. 코가 썩어들어갈 것만 같은 사악한 냄새. 그들을 피해 진군하는 마물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케이.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마족이 확실하다.
“다른 녀석들이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대충 알겠군. 네가 죽인 거냐?”
“마물을 물리십시오.”
자이안은 상대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했다.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호. 이 상황에서 협상을 하겠다고?”
“협상이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입니다.”
“무섭구만, 무서워. 그렇게 못 하겠다면?”
“당신들 둘 모두, 여기서 죽을 겁니다.”
물론 그들이 마물을 물린다고 해서 얌전히 보내줄 생각도 없었다. 그들도 똑같이 생각했으리라. 남자는 새살이 돋아난 목덜미를 벅벅 긁으며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이거 안 되겠는데.”
다음 순간 그 커다란 몸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훌쩍 뒤로 뛰었다.
“도망치자.”
거의 동시에, 자이안이 바닥을 박찼다. 번개의 구슬이 방전을 일으키며 왼손 끝에 맺혔다.
“아틀라스!”
왼손을 휘둘러 번개의 사슬을 내뻗으며 자이안이 소리쳤다. 빛의 기둥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크룩스가 자이안의 뒤를 바짝 쫓아, 순식간에 추월했다.
남자가 기겁하며 여자를 지키듯 앞으로 나섰다.
“이런 미친! 더럽게 빠르네! 아리멜, 아직이냐?!”
“조금만 더 기다려! 거의 다 됐어!”
번개의 사슬이 두 마족의 팔다리를 묶었다. 거의 동시에 지척까지 거리를 좁힌 자이안과 크룩스가 각각 검과 주먹을 휘둘렀다.
남자가 몸을 급격하게 팽창시키며 공격을 막으려 했으나, 검과 주먹은 부풀어 오른 살덩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분쇄하며 파고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끝났어!”
여자의 외침과 함께, 마치 거짓말처럼 두 마족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런.”
크룩스가 가볍게 탄성을 뱉으며 주먹을 거뒀다. 조각조각으로 찢어진 살점 조각이 후두둑 바닥에 쏟아졌다.
「젠장. 못 봤다.」
뒤늦게 마안을 연 프레이가 나직하게 욕을 뱉었다. 아끼지 말고 일찍 마안을 열었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였다.
두 마족이 사라진 자리에는 검푸른 균열이 남아 있었다. 그 현상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추적을 뿌리치기 위해 마계로 돌아간 것이다.
“해석할 수 있겠어요, 형?”
「……솔직히 말하면 어렵다.」
자리에 남은 MP의 잔향을 해석해 어떻게든 적을 쫓으려 했으나, 프레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마법적 이론에도 들어맞지 않는 기묘한 흔적이었다.
인간이 사용하는 마법과는 완전히 다른 이론이 적용된 특수한 기술이다.
“하하. 도망치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힌 친구들이네요.”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걸 보면 만능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적을 마주치고, 쓰러뜨리는 데 실패하고, 아무 성과도 없이 놓쳤다. 프레이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쯧. 이거 야단났군.」
자이안의 표정 역시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두 명의 마족. 그들과의 싸움은 결코 쉽게 흘러가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전혀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자이안은 스펙트럼을 재차 들어 올리며 주변 마물의 움직임을 살폈다. 마치 홀린 것처럼 앞으로만 나아가던 마물들이 갑자기 제정신을 차린 듯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며 내분이 일어나는 모습도 곳곳에서 보였다. 마족이 사라지자 마물을 지배하던 명령 역시 힘을 잃은 것이다.
그 와중에 몇몇 마물이 자이안 일행의 존재를 눈치 챘다. 마물의 본능, 인간의 말살. 조만간 주변의 모든 마물이 일행을 노리게 되리라.
자이안으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마물들의 신경이 일행에게 쏠릴수록 저지선 너머로 피해가 퍼질 확률이 줄어든다.
마물의 수가 제법 많기는 했으나, 이 정도 규모는 세계수 이북의 균열을 정리할 때 몇 번이나 상대해 봤다.
“피해가 더 퍼지기 전에 얼른 정리하고 돌아가죠.”
마물들을 향해 나아가며 자이안이 가볍게 말했다.
* * *
저지선 너머 메마른 땅에 셀 수도 없이 많은 마물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알레프 백작은 지옥 그 자체가 현세에 강림한 듯한 그 광경에 눈을 가늘게 뜨며 침음을 뱉었다.
“사상자의 규모가 어떻게 되느냐.”
그 질문에 그의 곁에 있던 부관이 답했다.
“아직 인원 점검이 모두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잠정적인 수치라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다.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게 급하니.”
“알겠습니다. 현재 시점에서 사망자는 추정 850명. 그 중 평기사가 670명, 나머지는 분대장 급 이상의 지휘관입니다. 중대급 이상의 고위 지휘관의 사망자는 추정 30명이며, 고위 지휘관의 총수의 절반을 넘는 수입니다. 그 밖에 전투가 불가능한 부상자의 수가 추정…….”
이어지는 숫자의 나열을 들으며 백작은 한숨을 터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접경지대를 지키는 기사단의 수는 총 2,000명. 그중 절반에 가까운 수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나머지 중 절반 이상이 절대적 요양을 취해야 하는 중상을 입었다.
생사를 파악하지 못한 실종자의 수까지 합하면 거기서 더 늘어난다. 사실상의 궤멸 상태.
“……다 내 잘못이군.”
한숨 대신, 백작은 그저 담담히 말하며 쓰디쓴 감정을 삼켰다.
총사령관으로서 저지선을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이안의 말만 무턱대고 믿고 무책임하게 자리를 비웠다.
자신이 자리를 지켰다 한들 결과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죄책감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미처 막아내지 못해 일리움 내부로 침투해버린 마물도 꽤 많았다.
지금까지 일리움은 다른 나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마물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나라였다.
알레프 변경백과 그 휘하 기사단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거야 본래 군대가 해결할 일이라지만…… 한동안은 나라가 혼란에 빠지게 되겠지.’
“아버지.”
시름 속에서 들려온 반가운 목소리에 백작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임시로 세운 천막에서 나온 자이안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다소 지쳐 보이는 얼굴색이었다.
“저쪽 천막의 부상자들은 모두 치료했습니다.”
“……뭐라고?”
상상도 못 한 말에 백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그게 무슨…… 대체 어떻게?”
“백마법이요.”
“이 녀석아, 그걸 묻는 게 아니지 않느냐.”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대답하는 자이안을 보며 백작은 허탈한 심정이었다.
병력은 바닥나고 부상자 때문에 발이 묶여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걸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해결하다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전장에 다시 서게 될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신체 일부가 결손된 심각한 부상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일단 완치했다. 그러나 잃어버린 체력까지 한 번에 돌아온 것은 아니다. 정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래 백마법은 신체는 물론 정신까지 두루 치유하는 계통의 마법이지만, 자이안이 배운 건 다친 몸을 치유하는 마법뿐이었다.
부상은 완벽하게 치유할 수 있어도, 죽음의 공포 속에서 전의가 꺾여버린 이들까지 북돋아 줄 수는 없었다.
“아마 저쪽 천막은 괜찮을 겁니다.”
자이안이 또 다른 천막을 가리켰다. 지금 그쪽은 유민이 치유를 맡고 있었다. 그녀라면 자이안과는 달리 꺾여버린 의지도 바로잡아줄 수 있으리라.
“잘했다, 자이안. 고맙다.”
백작으로서는 부상자들이 제 발로 움직일 수 있게 됐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다소 시간은 걸리겠지만, 전의를 잃은 부하들도 언젠가는 다시 검을 들게 될 것이다. 백작은 부하들의 의지를 믿었다.
“제 생각엔 민간인들을 안쪽으로 피난시키고 전선을 천천히 물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물들이 또 습격할지도 모른다는 소리냐?”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비는 해야죠.”
잠시 고민한 백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당장 전력을 재정비하는 건 불가능하다.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을 써서 주민들을 피난시키며 부대를 재편하고 지휘계통을 바로잡는 게 나을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적의 습격은 제가 어떻게든 막아보겠습니다.”
“다음에는 나도 함께 싸우마.”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할 말이다, 이 녀석아.”
백작이 부관을 돌아보고,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기사단의 총사령관으로서 백작이 할 일은 산더미같이 많았다. 희소식도 들었으니, 더 이상 미적거리지 말고 정력적으로 일할 시간이었다.
그 뒤로 며칠이 지났다.
다행히 그 이상 마물의 습격은 없었다. 백작은 때때로 자이안이나 각성자들의 조언을 새겨들으며 남은 병력을 추스르고, 접경지대 근처의 주민들을 안쪽으로 피난시켰다.
고향을 버리고 떠나라는 갑작스런 통보에 불만을 가질 만도 하건만 다행히 눈에 띄는 마찰은 없었다.
“말만 안 할 뿐이지, 불만은 차곡차곡 쌓이고 있을 겁니다.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복지를 충실히 보장해야 해요.”
크룩스의 조언에 비축된 식량을 아낌없이 풀었다.
이후의 보고에 따르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던 몇몇 피난민들이 충분한 식량을 배급받고 잠잠해졌다는 모양이다. 백작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번 습격 때 놓친 마물들이 피난민 집단을 공격하는 일도 있었다.
자이안이 직접 나서서 마물을 토벌하고, 이 모든 게 백작이 내린 적재적소의 지시라는 소문을 은연중에 흘렸다.
피난민들 사이에 백작의 결단을 옹호하며 그에게 불만을 드러내는 이들을 통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밑밥은 대충 깔아놨으니, 이제는 안전하게 피난시키는 일만 남았구만.”
신중하게 한 걸음씩 피난 계획을 진행시켰다.
부상으로 누워있던 병력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덕분에 시간이 흐를수록 일이 점점 더 수월해졌다. 결국 큰 사고 없이 모든 주민들을 영도 근처로 피난시키는 데 성공했다.
“좋아. 한시름 놓았구만. 근데 저것들은 뭐냐?”
영도 근처에 못 보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왕실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이 바람결에 나부꼈다.
그 모습을 본 백작이 표정을 굳혔다. 안 좋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자이안의 ‘설득’ 덕분에 다 잘 해결된 줄 알았는데, 설마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단 말인가?
“알레프 백작 각하 되십니까?”
군대 후방에서 화려하게 치장된 갑옷을 걸친 남자가 말을 타고 나왔다. 백작의 모습을 확인하고, 말에서 내려와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게사르트 자작.”
결코 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안면 정도는 있는 귀족이었다. 백작의 기억이 확실하다면 분명 왕실 직할군의 중진일 터.
“국왕 전하의 명을 받들어, 백작 각하를 돕기 위해 왔습니다.”
자작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