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0화 복마전의 이변(2) (150/210)


150화 복마전의 이변(2)
2023.03.02.


저지선 너머, 복마전으로 이어진 메마른 땅 일면이 시커멓게 물들어 있다. 부글거리는 진흙을 연상케 하는 그것은, 발 디딜 팀도 없이 밀집한 마물의 대군이었다.

케이는 1만 이후로 마물의 수를 세는 것을 포기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마물을 쓰러뜨렸고, 그와 비슷한 수가 새로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문자 그대로 끝이 없었다.

“후퇴! 전원 후퇴하라!”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지금 여기서 놈들을 막지 못하면……!”

“지금 전력으로 적들을 막는 건 불가능해! 저지선은 포기한다! 다음 저지선까지 전원 후퇴!”

지상은 아비규환의 도가니였다.

길게 이어진 성벽은 형편없이 무너져 곳곳에서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성벽 앞에는 기사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살아남은 기사들은 끝까지 저지선을 지키고자 했으나 현실을 일깨우는 냉혹한 명령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적들에게서 도망쳐야만 했다.

‘지금 모습으로는 무리야!’

쉴 새 없이 공중을 누비며, 케이 역시 쓰디쓴 좌절을 삼켜야만 했다.

과거 세계수의 숲 북쪽에서 폭식의 군대를 상대했을 때에도 적의 수는 비슷했지만, 지금은 그때와 양상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때 적들은 자이안 일행을 상대하는 데 더 전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케이가 아무리 마물을 쓰러뜨려도, 놈들은 케이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오로지 저지선을 넘기 위해 진격했다.

이대로 저지선이 무너지면, 그다음은 알레프 영지가 쑥대밭이 된다. 거기서 끝날 리가 없다.

알레프가 멸망하면 그다음은 일리움 전체, 나아가 대륙 전체가 마물의 파도에 휩쓸릴 것이다.

‘천룡화할까?’

성룡의 모습에서는 본연의 10% 정도밖에 발휘하지 못한다. 오죽하면 좁은 공간이라는 제약이 있었다고는 해도 보석탑의 네 장로에게 패해 쓰러졌을 정도.

천룡으로 변하면 지금 적들을 전멸시키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이 역시 아무런 제약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천룡의 힘을 쓰면 쓸수록 케이는 점차 생물이 가지는 본능과 감정을 상실하고 오직 별의 의지를 대행할 뿐인 기계적인 존재로 변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직후 자이안은 케이에게 되도록 천룡의 힘은 쓰지 말아 줄 것을 부탁했다.

케이는 처음에는 그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모습이 되든 간에 존재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지금은 어렴풋하게 알 것도 같았다.

‘내가 감정을 모두 상실하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자이안을 대하게 된다면…… 그건 분명 슬픈 일일 거야.’

하지만, 하고 케이는 이어 생각했다.

‘지금 여기서 마물들을 막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쳐도, 자이안은 분명 크게 슬퍼하겠지.’

마음의 무게추가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었다.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아주 잠깐만. 금방 회복할 수 있을 정도로만. 자이안이 걱정하지 않을 정도까지만 힘을 해방하자.’

잠시 공중에 멈춘 케이가 깊게 숨을 들이켜며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가슴 안쪽에서 잠들어 있던 힘이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호오.”

그 순간, 케이의 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뭐야. 날개 달린 도마뱀이잖아?”

“다 멸종한 줄 알았는데, 살아있는 게 있었나 봐?”

“마침 잘 됐다. 기념 삼아 가죽이나 벗겨가도록 하지.”

지척에서 들리는 남녀 한 쌍의 목소리. 케이는 전율하며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날개를 펼쳤다.

‘다가오는 걸 전혀 못 느꼈어!’

케이의 몸이 소리를 찢어발기며 높이 솟구쳤다. 그러나 한 번 목덜미에 달라붙은 불길한 예감은 도무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도망치려고? 어림도 없지.”

남자의 목소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 위쪽에서 들려왔다.

케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저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는, 그러나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싫어질 만큼 불길한 마나를 품은 남자.

마족이었다.

마족이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다음 순간 그 팔이 위아래로 쩍 갈라지며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삽시간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새와 늑대, 용, 벌레, 그리고 온갖 생물의 머리를 난잡하게 뒤섞어 빚어낸 듯한 끔찍한 형상의 머리였다.

상승을 멈춘 케이가 즉시 측면으로 방향을 꺾었다. 그러나 그 순간 우악스러운 힘이 케이의 꼬리를 콱 틀어쥐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과 함께 꼬리를 내려다보니, 또 다른 마족이 사납게 웃으며 케이를 붙잡고 있었다.

“귀찮게 굴지 마라. 아픈 꼴 당하기 싫으면.”

남자가 오른팔을, 거대한 흉물의 머리를 거세게 휘둘렀다. 케이는 필사적으로 목을 꺾었다. 그러나 미처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강렬한 충격과 통증이 왼쪽 머리를 후려쳤다.

-아윽……!

눈앞이 급격하게 흐려졌다.

마지막으로 힘을 쥐어짜 꼬리를 휘둘러 마족을 떨쳐냈으나, 더 이상 하늘을 날 힘이 없었다.

케이는 한쪽 뿔이 뿌리 끝까지 뽑혀나가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크게 파헤쳐진 머리의 상처를 감싸며 힘없이 떨어졌다.

‘하필 뿔을…….’

쿠우웅! 마물의 군세를 깔아뭉개며 케이가 지상에 추락했다.

잠시 공중에 떠 있던 두 마족의 모습이 지워지듯 사라졌다가 지상에 다시 나타났다. 오른팔을 원래대로 되돌린 남자가 길게 늘어진 케이의 목으로 다가가며 이죽거렸다.

“그러게 귀찮게 굴지 말라니까. 한 번에 통째로 먹혔으면 아프지도 않았을걸.”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남자의 모습이 변했다. 골격이 커지고, 근육이 부풀었다. 피부가 뒤틀리며 검붉게 변색되고, 더 질기고 단단해졌다. 두꺼워진 목 주변으로는 갈기가 자라났다.

케이는 피가 스며들어 흐려진 시야로 힘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반격해야 한다. 하다못해 도망쳐야 한다. 그렇게 생각만 했을 뿐, 발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뿔은 용의 힘의 근원. 그 절반을 뿌리째 뽑힌 상태로 아직 의식을 잃지 않고 있는 게 기적이었다.

-다가…… 오…… 지…….

“호? 놀랍군. 아직도 정신을 잃지 않고 있나?”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진심으로 놀랍다는 듯 말했다. 여자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심드렁하게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시 보니, 호오. 제법 나이를 먹은 용이군. 싸우는 게 워낙 미숙해서 알아보지 못할 뻔했어. 이거 횡재했는데.”

“그거 먹을 거야?”

“글쎄. 일단은 죽이고 나서 생각할까?”

남자의 몸집이 계속해서 커졌다. 케이의 앞에 도착해 두 손을 들어 올렸을 때에는 5미터가 넘는 거인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케이는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움찔거리며, 남자의 두 팔이 하나로 뒤섞여 거대한 흉물의 머리로 변하는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엔 쓸데없이 피하지 마라. 그러면 안 아프게…….”

말을 멈춘 남자가 갑자기 급하게 몸을 비틀었다.

충격파가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와 남자의 가슴팍을 사납게 할퀴었다. 질긴 피부가 길게 찢어지며 회색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쯧.”

마치 케이에게서 그를 떨어뜨려 놓으려는 듯, 충격파가 연달아 날아왔다. 남자는 작게 혀를 차며 몇 걸음 더 물러났다.

그 어떤 마물의 갑각보다도 단단하다고 자부하는 피부를 찢어낸 공격이다. 무턱대고 맞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결국 크게 거리를 벌린 남자가 두 팔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두 인영이 나타나 케이를 등지고 섰다.

-유리아, 소아레스…… 케흑. 미안.

“괜찮아. 사과하지 마.”

“무리해서 말하지 마시고, 회복에 전념하십시오.”

소아레스의 말에 케이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빠른 회복을 위해 스스로 의식을 가라앉힌 것이다. 그 모습을 확인한 뒤, 둘은 적을 돌아보며 단검을 들고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마족이네.”

“마족이군요.”

유리아의 눈, 소아레스의 귀가 단숨에 적의 정체를 파악했다.

7명이던 마족이 대부분 쓰러지고 남은 마족은 탐욕과 분노뿐.

“어느 쪽이 탐욕이고 어느 쪽이 분노인지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괜찮아. 둘 다 죽이면 상관없잖아?”

두 여성은 마지막으로 한 차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다음 순간, 둘이 동시에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인간? 그냥 평범한 인간이라고?! 이거 놀라운데!”

자세를 낮춘 마족이 두 팔로 땅을 후려쳤다. 지면이 흔들리며 쩍 갈라지고 암석이 솟구치며 시야를 가로막았다. 둘은 불규칙적인 궤도로 교차하며 장애물들을 돌파해 동시에 적의 코앞까지 접근했다.

“다리부터!”

단검을 휘두르며 유리아가 소리쳤다. 소아레스가 곧장 그 뜻을 알아듣고 반대쪽 다리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 순간 마족의 다리가 흉측하게 뒤틀리며 수백 가닥의 촉수 다발로 변했다. 유리아는 눈을 부릅떴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하반신의 약점이 사라졌다.

촉수가 길게 늘어나며 사방을 폭풍처럼 휩쓸었다. 둘은 급히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창날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둘을 노리고 정확하게 날아왔다.

몸을 숙이며 단검을 휘둘러 공격을 빗겨내고, 유리아는 기습적으로 충격파를 내질렀다. 마족은 나무토막처럼 두껍게 변한 두 팔을 앞세워 충격파를 막아냈다.

“따끔하군. 그래, 이게 다냐? 이 정도로는 내 피부에 생채기밖에 못 낸…….”

그 순간 마족의 등 뒤에 유령처럼 접근한 소아레스가 소리도 없이 단검을 휘둘렀다.

소아레스에게는 유리아처럼 원거리를 공격하는 충격파도, 보기만 해도 적의 약점을 간파하는 마안도 없었다. 그 대신 그녀가 자부하는 것은 평생을 다해 갈고닦은 은밀한 일격.

‘우선은 목을…….’

칼날이 두꺼운 근육의 틈새를 물살을 가르듯 절묘하게 파헤쳤다.

적은 칼이 피부를 찢어내는 그 순간까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완벽한 기습. 그렇게 생각했으나, 직후 마족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

당혹이나 놀람보다도, 소아레스는 몸에 새긴 훈련에 따라 즉시 자리를 이탈했다.

다행히 후속 공격은 없었다. 마족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멀뚱히 상황을 관망하고만 있던 여성 마족의 곁에 서 있었다.

“……미안. 덕분에 살았다.”

“흐흥. 이따 머리를 잔뜩 쓰다듬어주면 봐주도록 할게.”

남자가 머리를 긁으며 주눅 든 목소리로 말하자, 여성은 기분 좋은 얼굴로 가슴을 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확히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아마 여성 마족의 능력으로 남자가 목숨을 구한 듯했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애먹네.”

“상상 이상으로 귀찮은 인간들이야.”

“흐응. 도와줄까?”

“아니. 넌 계속해서 힘을 모아라. 만약을 대비해야지.”

피부가 찰흙처럼 늘어나며 남자의 목덜미에 난 깊은 상처를 뒤덮었다.

“걱정 마라. 못 이길 정도는 아니거든.”

남자는 두꺼운 손으로 목을 주무르며 둘을 향해 걸어왔다. 둘은 말없이 단검을 고쳐 들었다.

스무 걸음가량의 간격을 두고 남자가 자리에 멈춰 섰다. 잠시 침묵 속에서 대치가 이어졌다. 그러나 대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돌연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적을 앞에 두고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지? 지금 죽고 싶다고 광고하는 건가? 그래, 그럼 바라는 대로 해줘야…….”

남자가 공성추처럼 크게 부풀어 오른 두 팔을 들어 올린 그 순간이었다.

멀리, 저지선 너머 엉망이 된 전선에서 흰빛이 번쩍였다. 갑자기 엄습해오는 불길한 감각에 남자가 잠시 흠칫 놀라며 움직임을 멈췄다.

직후, 빛의 파도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전장을 휩쓸었다.

“제기랄!”

저 너머에서 시작된 빛의 파도가 삽시간에 몰려와 두 마족을 덮쳤다.

남자는 급히 뒤로 물러나, 여자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성검의 빛에 휩쓸린 남자의 몸이 끔찍하게 녹아내렸다.

“윽……! 허억……!”

간신히 버텨낸 남자가 온몸에서 새하얀 연기를 피워 올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서도 두 눈만은 적의로 사납게 빛나며 정면을 응시했다.

“미안해요. 마물이 너무 많아서 좀 늦었어요.”

스펙트럼을 쥔 자이안이 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