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복마전의 이변(1)
(149/210)
149화 복마전의 이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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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복마전의 이변(1)
2023.03.01.
두 가지 소문이 일리움 국내에 알음알음 퍼졌다.
하나, 왕이 직접 군대를 꾸려 알레프에 보냈으나, 아무런 성과도 없이 맥없이 포기했다는 소문.
하나, 왕실의 어리석음에 하늘의 분노가 용으로서 현현해 왕궁에 직접 천벌을 내렸다는 소문.
각각의 소문 모두 어느 정도의 사실과 어느 정도의 과장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호사가들 사이에서 추측이 오가고 살이 더해지며 그럴듯한 뜬소문들도 여럿 파생되었다.
별관에 유폐된 미오네에게도 소문은 전해졌다.
비록 엄중한 감시 속에서 토리안을 비롯해 대부분의 부하를 잃은 상태이지만, 그래도 손발이 아예 모조리 잘려나간 것은 아니었다.
아직 그녀에 대한 충성심을 지키고 있는 소수의 부하들이 왕국 전역으로 흩어져 바쁘게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미오네는 알지 못했다.
이미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이들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고 있으며, 막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부러 막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왕실의 군대가 알레프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물러났다.’
새로이 모인 정보를 정리하고, 미오네는 끔찍한 악몽 속에 갇힌 듯한 기분으로 결론을 내렸다.
‘전하는…… 아바마마는 더 이상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거야.’
미오네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작은 창문 너머로 흐린 초승달이 홀로 망연히 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배신감은 물론 컸다. 그러나 그만큼, 허망함 역시 컸다.
이대로 얌전히 별관에 갇혀서 처우를 기다릴까? 그러나 그 끝은 결코 밝지 않으리라. 이대로 영영 갇힌 채 늙어 죽거나, 모든 권리를 빼앗기고 추방당하거나, 처형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되든 안 되든 발버둥 쳐야 하나? 그러나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혹시라도 만약에 무사히 알레프로부터 도망친다 쳐도, 그다음에는…….
‘나는…….’
그다음에는 뭘 해야 하지?
눈앞이 흐려졌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다만, 걷잡을 수 없이 피로가 쏟아졌다.
미오네는 침대 위에 모로 쓰러졌다. 그리고 아기처럼 온몸을 웅크렸다.
왕국을 위해 10년 넘게 헌신했다. 저택의 인심을 장악하고 자이안을 쫓아내고 암살을 시도한 것들 모두가 궁극적으로 왕국을 더 나은 미래로 인도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정말로 일리움의 미래가 더 나아질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애쓴 결과 돌아온 것은 왕의 배신. 삭막한 단칸방. 파멸이 예정된 미래.
베개를 끌어와, 얼굴을 파묻으며 미오네는 힘없이 탄식을 터뜨렸다.
나는 앞으로, 대체 뭘 위해 살아가야 할까.
* * *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백작이 두 주먹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의 주먹을 기점으로 파직파직하는 파열음이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갑주 틈새로 희푸른 빛이 쉴 새 없이 번쩍였다.
자이안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끼고 관람하던 프레이가 오, 하고 입술만 움직여 소리 없이 탄성을 뱉었다.
‘순수한 무인이라더니, 그런 것치고 상당히 완성도 높은 마법을 사용하는군.’
온몸에 번개를 두르고, 체내 신경과 근육을 번개로 자극해 반응속도를 높이거나 한계 이상의 근력을 발휘하는 마법. 프레이가 마안으로 파악한 백작의 마법의 골자였다.
빠른 반응과 세밀한 제어를 동시에 필요로 하는 마법이다.
자칫 너무 강하게 신경이나 근육을 자극하면 영영 폐인이 되어버릴 우려가 있다. 그러나 백작은 그런 어려운 마법을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그렇군. 이게 하이엘프의 축복의 정체야.’
백작의 가슴께에 그의 본연의 마력과는 조금 다른 에너지의 흐름이 느껴졌다. MP와 마력에 각각 반쯤 걸쳐있는 듯 보이는 그 에너지가 백작의 마법을 돕고 있었다.
기이한 에너지이지만, 프레이에게는 익숙했다. 신스의 능력의 근원과 동일한 에너지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특기로 삼을 만한 마법 계통이 하나씩은 존재하지. 각성자건 아니건. 마법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특성을 가지고 있는 각성자라도 마찬가지고. 하이엘프의 축복은 그 잠재능력을 자극해 일깨우고, 이를 효과적으로 응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프레이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호기심을 채우고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전 준비됐습니다, 아버지. 언제든 오셔도 됩니다.”
자이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 순간 백작의 모습이 파열음을 내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푸른빛의 꼬리가 길게 이어졌다. 프레이조차도 눈이 번쩍 뜨일 속도였다.
충분히 거리를 두지 않으면 프레이로서는 대처하기 어렵다. 물론 스스로에게 온갖 강화마법을 충분히 걸어놓은 상태라면 다르겠지만.
“흡!”
자이안은 달랐다. 불규칙적인 궤도를 그리다가 왼쪽 측면으로 파고들어 휘두른 백작의 주먹을 칼날의 옆면으로 정확하게 막아냈다.
그러나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번개가 칼날을 타고 뻗어 나와 자이안의 몸을 휘감았다.
짜릿한 통증에 아주 잠깐 반응이 늦었다. 백작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등 뒤에서 번갯불이 파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윽!”
급히 자세를 낮춘 자이안의 머리 위를 백작의 발길질이 휩쓸었다. 간담이 서늘해진 자이안이 몸을 숙인 자세 그대로 스펙트럼을 휘둘렀다.
카앙! 뭉툭하게 만든 칼날이 다리를 감싼 갑주와 부딪쳐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백작은 그 힘을 이용해 훌쩍 뛰며 거리를 벌렸다. 자이안 역시 백작의 몸을 감싼 번개가 만들어낸 반탄력에 몇 걸음 물러났다.
“진심으로 하고 있는 거 맞냐?”
백작이 영 불만스러운 투로 말했다. 자이안은 쓰게 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바란드를 가르치고 있던 자이안에게 대뜸 찾아와 몸을 풀고 싶다고 하기에, 혼자 운동이라도 하면 되지 않겠냐고 했다. 그러나 백작은 아무래도 자이안과 대련을 원하는 눈치였다.
이런저런 합의 끝에 몇 가지 규칙을 정하고 대련이 성립됐다. 스펙트럼의 날을 뭉툭하게 만든 것도, 백작이 무기 없이 맨손으로 싸우는 것도 규칙의 일환이었다.
“잘못하다 어디 한 군데 부러진다니까요.”
“상관없다고 했다. 너 신성술도 잘 쓴다며?”
“……제가 그걸 말해준 적이 있던가요?”
“프레이 형님이 알려줬다.”
자이안은 잠시 어이가 없어 프레이를 돌아보았다. 정작 프레이는 잘했지 않냐는 표정이었다.
자이안은 절레절레 고개만 저었다. 처음 볼 때는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리더니, 또 어느새 친해진 건지.
“진짜 크게 다쳐도 제 책임 아닙니다.”
“바라던 바다.”
백작이 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자이안이 달려 나갔다.
한 박자 늦게 안뜰 바닥이 폭발하듯 치솟았다. 백작은 눈을 부릅뜨고 자이안의 움직임에 온 의식을 집중했다.
그러나 코앞까지 자이안이 다가온 순간, 마치 거짓말처럼 그 모습이 사라졌다.
“음……!”
간신히 측면으로 몸을 틀어 두 팔을 들어 올린 순간, 거대한 충격이 팔뚝을 후려쳤다. 막았다! 하고 생각한 것도 잠시, 백작의 거구가 장난감처럼 공중에 휙 떠올랐다.
‘추격이……!’
자이안의 잔상만이 흐릿하게 간신히 보였다. 공중에 붕 뜬 채로 백작은 이번에는 머리 위를 막았다. 다시 한번 충격이 팔을 때리고, 백작은 그대로 지면으로 포탄처럼 내리꽂혔다.
안뜰 바닥이 뒤집히며 짙은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백작은 한계까지 의식을 집중했다. 이 정도로 의식을 집중한 게 언제일까. 아마도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측면!’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 흙먼지의 움직임 따위가 백작에게 정답을 고했다.
그러나 바닥에 내리꽂힌 몸이 채 자세를 정비하기도 전이었다. 이대로는 막을 수 없고, 어설프게 막아내더라도 자이안의 말대로 크게 다칠 가능성이 높다.
그 순간 백작의 전신이 새하얀 번갯불로 뒤덮였다.
꽈르릉!
천둥이 내리꽂힌 듯한 엄청난 굉음이 저택 부지 전체를 뒤흔들었다. 거대한 폭발이 안뜰을 뒤덮었다. 오죽하면 멀리 떨어진 영지민들 중에서도 희미하게 소리를 들은 이가 있을 정도였다.
“야 이 미친놈들아! 적당히 좀 해!”
프레이가 기겁하며 급히 결계를 펼쳤다. 결계를 펼치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본관에까지 피해가 미쳤으리라.
“…….”
그 말을 듣기는 한 건지, 자이안과 백작은 엉망이 된 안뜰 한가운데에서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볼 뿐이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불안정한 자세로 팔뚝을 든 백작. 그 위에 스펙트럼을 맞대고 있는 자이안.
“으어어억.”
돌연 백작이 앓는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풀썩 드러누웠다.
“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자이안이 쓰게 웃으며 스펙트럼을 거뒀다. 무리해서 힘을 끌어내 큰 폭발을 일으켰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덕분에 백작은 자이안의 마지막 공격까지 크게 다치지 않고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었다. 승리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성과였다.
“이런 배은망덕한 녀석. 지 애비를 그렇게 사정없이 뚜드려 패냐?”
“아버지가 그렇게 해달라면서요?”
“원래 어른이 말할 때는 알아서 눈치 챙겨서 말의 속뜻을 파악해야 하는 법이다.”
“……앞으로 대련 안 해줄 겁니다.”
“미안하다. 내가 농담이 좀 과했구나.”
백작이 금세 태도를 바꿔 사과했다.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밀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부축 좀 해 주거라.”
손을 붙잡은 백작이 자이안에게 반쯤 기대듯 하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번개의 폭발에 휘말린 갑주는 여기저기 깨지고 뒤틀린 채 녹아내려 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백작이 툭툭 두드리자 산산이 조각나 힘없이 바닥에 쏟아졌다.
“미오네 말이다.”
자이안에게 기댄 채, 백작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 것 같으냐?”
왕도를 찾아가 시모스 왕을 직접 설득하고 돌아온 뒤로, 일주일이 지났다.
미오네는 아직도 얌전히 저택 별관에 갇혀 있었다.
대답에 앞서 자이안은 작게 깨달았다. 백작이 맥락도 없이 갑자기 대련을 하자고 한 이유가 아마 그녀 때문이리라.
혼자서 고민해봤지만 도통 답이 나오지 않아 자이안과 의견을 나누고자 한 것이다. 겸사겸사 오랫동안 책상머리에만 붙어 있느라 쌓인 스트레스도 좀 풀고.
“죗값을 치러야죠.”
“어떤 방식으로 말이냐?”
뒤이은 질문에는 자이안도 쉽사리 답을 내지 못했다. 원론적으로는 법의 심판에 맡기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일리움의 법의 주체는 시모스 왕이고, 자이안은 그의 냉혹한 실체를 알고 있다. 그에게 미오네의 처우를 맡기면 어떤 식으로 판결이 내려지든 납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른 때와는 달리 이번 일은 자이안이 피해당사자잖아요. 그러면 자이안이 원하는 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요?」
크룩스의 조언에, 자이안도 머리로는 동의했다. 그러나 마음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자이안은 잠시 시선을 내리깔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판단을 내리더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채 섣불리 판단을 내리는 것만은 안 된다. 만약 그렇게 되면 오래도록 이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네가 원한다면 처형을 할 수도 있다. 다만 그때 왕실이 어떻게 나올지는 나도 장담 못 하겠구나. 내 선에서 최선을 다해 막아보겠다만, 자칫 왕실이 너를 대놓고 네게 보복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이제 와서 왕실의 계략 따위는 두렵지 않아요.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
잠시 침묵 끝에 자이안이 입을 열었다.
“……우선 보류라는 걸로 어떨까요.”
“그냥 놔두잔 말이냐?”
“물론 언제까지 저대로 둘 수는 없겠죠. 그러니까 시간을 내서 제가 미오네를 한 번 독대하겠습니다. 그 여자의 입으로 직접 말을 들어봐야겠어요. 무슨 생각으로 저를 학대했는지, 지금은 어떤 심정인지, 반성을 하고 있기는 한 건지, 모두 다.”
백작이 꺼끌꺼끌한 턱을 매만지며 눈을 가늘게 떴다. 솔직히 말하면 참으로 미적지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자이안답기도 했다.
“그래. 그러면 뜻대로 하거라. 어차피 그 여자가 독을 쓰든 뭘 하든 이제 와서 널 해치지는 못할 테고.”
백작이 선선히 동의하자, 자이안의 표정이 한 시름 놓은 듯 밝아졌다.
바란드를 배려해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자이안도 줄곧 미오네의 처우를 고민한 건 마찬가지였다. 시모스 왕을 한 번 만난 뒤로는 더욱더 고민이 깊어졌고.
“억지로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다. 사실을 모두 듣고, 냉철하게 판단하거라.”
엄하게 타이르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자이안을 걱정해 하는 조언이었다. 자이안은 그 속뜻을 파악하고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자이안.
그 순간이었다. 그동안 한 번도 먼저 연락한 적이 없던 케이가 다급하게 통신을 보냈다.
-케이? 무슨 일이야?
조심스럽게 되물으며, 자이안은 불길한 예감이 뱀처럼 발목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큰 이변이 벌어진 게 아니라면 케이 쪽에서 먼저 연락을 할 이유가 없다. 반대로, 지금처럼 저쪽에서 먼저 급하게 연락을 했다는 것은.
-마물이 너무 많아. 그리고 끝도 없이 나와. 미안. 나 혼자서는 못 막겠어!
자이안은 어느새 몸을 타고 기어오른 불길함이 콱 목을 조르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