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일리움, 그리고 알레프 영지(7)
(147/210)
147화 일리움, 그리고 알레프 영지(7)
(147/210)
147화 일리움, 그리고 알레프 영지(7)
2023.02.27.
-케이. 저지선은 지금 어때?
백작을 설득시켜 다시 안으로 돌려보낸 자이안은 즉시 케이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설…… 득……? 그걸 설득이라고 하나, 보통……?」
자초지종을 지켜본 아르스가 의문을 참지 못해 혼자 뭐라 중얼거렸으나 자이안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팔짱을 낀 프레이가 대신 아르스의 의문에 답했다.
「사람을 때려눕힌 것도 아니고 억지로 감금한 것도 아닌데 뭘. 잘 설득한 거지.」
「아니, 설득이 아니라 협박이지?! 이대로 전쟁을 터뜨리면 직접 전쟁터에 난입해서 깽판을 부릴 거라고 그랬잖아?!」
「어허. 협박이 아니라 정당한 협상.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상대의 주장을 꺾고 이쪽 주장을 받아들이게 만들었잖냐.」
「에엑…… 이, 이래서 영국인은…….」
티격태격하는 각성자들을 훈훈하게 지켜보며 기다리자, 곧 케이에게서 대답이 왔다.
-오, 자이안! 나 불렀어? 저지선 말이지? 지금은 괜찮아. 아주 평화로워!
-복마전은?
-아직 이거다 싶은 건 못 찾았어. 대신 마물의 수는 많이 줄여 놨어.
백작이 자이안 일행과 함께 저택에 돌아와 있는 동안, 케이는 접경지대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단순히 저지선을 침공하는 마물의 상대 말고도, 복마전의 상황을 살피는 일도 함께 맡았다.
백작의 말에 의하면 이번 대규모 침공은 최소 수백 년간 일어난 적이 없는 유례없는 일. 갑작스런 마물의 이상행동에 자이안 일행은 마족과의 관련을 의심했다.
누군가 저지선에 남아 적을 저지하며 복마전 내부를 정탐할 필요가 있었다.
의논 끝에 선발된 이가 케이였다. 일행 중에서 광역 제압력이 가장 탁월했고, 하늘을 날아다니므로 이동의 제약이 없으며, 기본적으로 마물에게 적대시되지 않았다.
소소하게는 저지선 병력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용이 확고한 아군으로서 함께 싸운다는데 기꺼워하지 않을 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면 잠시 이쪽으로 와줄 수 있을까? 저지선이 위태로울 것 같으면 어쩔 수 없지만.
-당장은 괜찮아. 아마 한 열흘 정도는 평화로울 것 같아. 바로 갈까?
-그래 주면 고맙고.
통신을 마치고, 자이안은 저택 앞에 서서 친구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뒤쪽에서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바란드였다.
“무슨 일이니?”
“형님. 필시 위험할 겁니다.”
걱정으로 얼룩진 목소리였다.
“왕실은, 국왕 전하께서는 어머니를 통해 알레프를 손에 넣으려 하지 않았습니까? 어머니가 형님을 해하려 했던 것도, 어쩌면 왕실의 사주였을지도 몰라요. 형님께서 왕실에 모습을 드러내셨다간 필시 해코지를 당할 겁니다.”
이어진 논리정연한 말에 자이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바란드에게 지난날의 미오네의 악행을 알려주기는 했다. 그러나 왕실과의 연관성이나 불확실한 혐의까지는 얘기하지 않았다.
바란드는 추론을 통해 혼자서 미오네의 배후에 왕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하하, 바란드. 내가 그렇게 쉽게 당할 것 같니?”
자이안이 짐짓 대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바란드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 그럴 리가요! 하지만…….”
우물쭈물하던 바란드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자이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형님께서 저희를 위해 애쓸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미안해하는 듯한 그 말에 자이안은 낮게 탄성을 뱉었다.
아마도 바란드는 작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이안이 가문이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 옛정이나 도덕 따위에 얽매여 사실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바란드.”
자이안은 잠시 무릎을 꿇고 바란드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말렴. 나는 하기 싫은 일은 안 하는 주의거든.”
“네?”
“제때 왕실을 막지 못하면, 국왕과 아버지 사이를 중재하지 못하면 아마 무력 충돌이 벌어지겠지. 한 번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아. 내전이 일어나면 불씨는 걷잡을 수 없이 사방으로 번질 거야. 전쟁의 광기라는 건 사람의 의지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나는 그게 싫어.”
잠시 과거를 떠올린 자이안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바란드를 보니, 그는 멍하니 자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문을 위해서라든가, 뭔가 큰 뜻을 위해서라든가, 그런 거창한 건 아냐.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지. 다행히도 내게는 그럴 만한 힘이 있고, 아버지와 달리 귀찮은 입장 같은 것도 없어. 오히려 잘된 일이지.”
마지막으로 바란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자이안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 바란드, 걱정하지 말렴.”
저택을 나선 그가 서쪽을 바라보았다. 머나먼 하늘에서 작은 점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룡의 몸이 저택 상공에 멈춰서 그림자를 드리웠다.
“금방 갔다 올게, 바란드.”
잠시 바란드를 바라보며 밝게 웃은 자이안이 그 자리에서 수십 미터를 훌쩍 뛰어올라 케이의 등에 올라탔다.
바란드는 그 모습을, 주먹을 세게 쥔 채 결의에 찬 표정으로 끝까지 지켜보았다.
* * *
케이의 머리 위. 한 쌍의 뿔 사이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자이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왕도의 모습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웨코스에서 복마전으로 향할 때에는 되도록 눈에 띄지 않도록 구름 위까지 고도를 높여 날았다. 지금은 아니었다.
굳이 케이를 부른 것은, 빠른 이동보다도 과시와 기선 제압의 의미가 더 강했다. 용이 왕궁을 향해 똑바로 날아든다면 국왕의 입장에서는 혼이 쏙 빠질 수밖에 없으리라.
때문에 굳이 케이는 지상으로부터 100미터도 채 안 되는 낮은 상공을 날고 있었다.
당연히 지상에서는 난리가 일어났다.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케이가 지나갈 때마다 돌풍이 불어 닥치고 이를 목격한 백성들이 혼비백산하며 집안으로 숨어들었다.
용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왕국 전역에 퍼지기까지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을 터였다.
“케이, 속도를 더 높여줘.”
-줄이는 게 아니라? 잘못하면 왕궁에 부딪힐 수도 있는데?
“오히려 좋아. 대신 인명 피해는 없도록 신경 써줘.”
-좋아! 자이안 생각이 그렇다면야!
케이가 아슬아슬하게 음속이 되지 않을 만큼 속도를 올렸다. 음속을 돌파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이렇게 낮은 고도를 날면서 음속을 돌파하면 충격파 때문에 지상이 정말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다.
자이안은 어디까지나 국왕에게 강한 첫인상을 심어주고 싶을 뿐이다.
마침내 왕도가 바로 아래에 들어왔다. 고도를 바짝 낮춰 왕도를 지키는 높은 성벽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듯 지나치고, 바깥의 서민 지구와 왕궁을 중심으로 안쪽에 펼쳐진 귀족지구를 차례차례 통과한다.
이윽고 왕궁의 전경이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아주 짧은 순간, 시간이 극도로 느려지는 듯한 감각이 자이안을 습격했다. 왕궁을 둘러싼 성벽과 첨탑, 성벽 안쪽에 조성된 사냥용 숲과 정원, 별궁과 본궁의 모습까지 차례차례 눈에 들어왔다.
자이안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스펙트럼을 장검의 모습으로 변형시켜 한 손에 쥐었다. 그리고 온몸에 내력을 순환시켰다.
-부― 딪― 힌― 다― 아― 아― 아―!
케이가 깔깔 웃으며 소리쳤다. 용의 입에서 퍼져나간 포효가 굉음이 되어 왕도 전체를 강타했다. 세상이 파멸을 맞이했다고 착각한 백성들이 집으로 뛰어 들어가 공포에 떨며 조상들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마침내, 거체가 성벽과 부딪혔다.
다시 한번 굉음이 왕도 전역을 뒤흔들었다. 문자 그대로 폭발해버린 성벽의 파편이 수백 미터 바깥까지 날아갔다.
케이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지면을 미끄러지듯 꼬리를 휘둘러 사냥용 숲을 쓸어버리고, 두 앞다리로 정원을 뭉개버리고, 마지막으로 두꺼운 몸체를 통째로 별궁에 때려 박았다.
별궁의 절반이 장난감처럼 무너져 내리며 파편이 케이의 위에 쏟아져 내렸다.
-아하하하하하! 신― 난― 다― 아―!
케이가 아이처럼 깔깔 웃으며 왕궁 부지를 데굴데굴 굴렀다. 지축이 뒤흔들리고 용의 포효에 자연이 반응하며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세상이 파멸을 맞이했다고 착각해도 별수 없는 광경이었다.
‘본궁 최상층. 국왕의 침소, 알현실, 집무실이 모두 거기 있을 거야.’
그리고 케이가 별궁에 부딪히기 직전 한발 앞서 뛰어오른 자이안은, 스펙트럼을 앞세우고 그대로 본궁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만약 최상층에 없으면…… 본궁 내부를 막무가내로 부수다 보면 알아서 나오겠지.’
공중에서 몸을 크게 휘돌린 자이안이 스펙트럼을 완만하게 휘둘렀다. 찰나의 순간 교차로 세 번. 첫 공격에 본궁을 지키는 견고한 결계가 파열음을 내며 깨지고, 뒤이은 두 번의 공격이 외벽 일부를 무너뜨렸다.
자이안은 무너진 외벽 틈으로 안전하게 본궁 최상층에 발을 디뎠다.
“웬 놈이냐!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투항해라!”
왕실 기사단은 과연 정예 중의 정예였다. 최상층에 들어선 자이안이 잠시 방향을 살피는 사이에 사방에서부터 몰려들어 자이안을 빈틈없이 포위했다.
“혹시 이 중에 지금 국왕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 있습니까?”
“무기를 버리라고 했다!”
포위망을 펼친 기사 중 한 명이 사납게 말하며 창을 휘둘렀다. 근처 동료 기사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간 것을 보면 평소에도 성질이 급한 모양이다.
마침 잘 됐다 싶었다. 자이안은 날아드는 창날을 맨손으로 붙잡아 세운 뒤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지금 국왕은 어디에 있죠?”
“이…… 익……!”
창대를 쥔 기사가 팔을 부들부들 떨며 어떻게든 창을 움직이려 애썼다. 그의 바람은 곧 이루어졌다.
자이안의 온몸을 순환하는 내력이 창날을 붙잡은 손을 통해 일순간 방출되고, 다음 순간 창날이 산산이 부서져 바닥으로 쏟아졌다.
“여러분, 혹시 공용어를 못 알아들으시는 건 아니죠?”
“공격해라! 죽여도 좋다!”
단장, 혹은 소대장으로 보이는 기사가 명령을 내렸다. 자이안은 작게 한숨을 삼켰다. 말을 아예 들어먹지를 않으니, 협박도 소용이 없을 듯했다.
“크게 다쳐도 모릅니다.”
텅텅텅텅! 철판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몇 번 이어지고 기사 몇 명이 거의 동시에 공중을 날았다.
풀 플레이트로 중무장한 적. 무턱대고 때리면 철판이 박살나며 몸을 찢어 치명상을 입을 우려가 있고, 그렇다고 이음새를 노리자니 전의를 잃을 만한 피해를 입히기 어렵다.
자이안의 선택은 백보신권의 응용이었다. 거리를 무시하고 적을 타격하기 위해 개발된 기술이지만, 응용에 따라서는 갑주를 무시하고 안쪽만 공격하는 식으로 쓸 수도 있다.
정밀한 MP 제어를 필요로 하는 기술인지라 위력을 조절하기도 용이했다.
“이제 당신뿐인데요. 계속하실 건가요?”
일부러 마지막까지 남겨놓은 지휘관을 제외하고 다른 기사들이 모두 사방으로 널브러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몇 초에 불과했다. 위력을 조절했다고는 해도, 앞으로 한 달 정도는 꼼짝없이 침상에 드러누워 요양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국왕수호기사단을…… 우롱하지 마라……!”
지휘관이 이를 악물며 검을 들었다. 부하들이 모두 순식간에 당했는데도, 자이안의 무력을 눈앞에서 지켜봤는데도 그 눈에 투지가 꺼지기는커녕 더욱 거칠게 이글거렸다.
자이안 역시 눈을 가늘게 뜨며 스펙트럼을 들었다.
“저 암군 밑에 당신 같은 기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게 놀랍네요.”
“전하에 대한 불경한 발언, 죽음으로 갚아라!”
지휘관이 엄숙하게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빠르고 올곧은 내려 베기. 자이안은 잠시 갈등했다. 여기서 그를 쓰러뜨리는 건 인재 한 명을 꺾어버리는 아까운 일이 아닐까?
「상대는 너를 죽이려 하고 있다. 망설이지 마라, 자이안.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프레이가 말했다. 자이안은 스펙트럼을 섬전같이 휘둘렀다.
“끄…… 윽…….”
챙강! 반 토막이 난 칼날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쩍 벌어져 피가 왈칵 쏟아지는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지휘관이 풀썩 무릎을 꿇었다.
“전…… 하…… 불충을…… 용…….”
그대로 앉은 채로, 힘없이 눈을 감았다.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던 자이안은 작게 한숨을 뱉고는 그의 가슴팍에 손을 가져다 댔다. 백마법 특유의 따뜻한 빛이 자이안의 손바닥을 물들였다.
곧 지휘관의 가슴에 난 치명상이 빠른 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이 자식아. 뭐 하러 적한테 자비를 베풀어? 내가 망설이지 말라고 한 거 못 들었냐?」
‘칼을 맞대는 중에는 안 망설였잖아요. 그럼 됐죠. 싸움이 끝난 뒤에 상대를 어떻게 하건 그건 제 마음이잖아요.’
「얼씨구. 말은 청산유수야, 아주. 하, 새끼. 가면 갈수록 말대꾸만 늘어가지고는. 대체 누굴 닮아서 저러나 몰라.」
‘삼촌인데요?’
「뭐 이 자식아?」
「아저씨, 이번에 자이안은 잘못한 거 하나도 없거든요? 자이안을 이기고 싶으면 저를 먼저 쓰러뜨려야 할 거예요!」
「그래? 마침 잘 됐다. 이리 와봐라, 좀 패게.」
자이안은 각성자들과 티격태격하며 최상층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도중에 다른 기사들과 마주치기도 했지만, 처음 마주친 집단만큼 전의가 넘치지는 않았다. 덕분에 국왕의 위치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알현실에 있다고?’
왕성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상징적인 장소이지만, 이런 시간에 굳이 왕이 머물 이유가 없는 장소이기도 했다. 묘한 예감을 느끼면서도 자이안은 알현실로 향했다.
금과 보석으로 휘황찬란하게 장식된 커다란 문. 그 너머에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 차례 심호흡을 한 자이안이 천천히 문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자이안 알레프.”
왕홀을 쥐고 옥좌에 앉은 시모스 왕이 태연하게 그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