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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일리움, 그리고 알레프 영지(5) (145/210)


145화 일리움, 그리고 알레프 영지(5)
2023.02.25.


안뜰 한가운데. 두 형제가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음. 자세는 깔끔하고.’

자이안은 바란드를 바라보며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바란드는 반대로 긴장한 표정으로 목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먼저 들어와.”

자이안이 허가했으나 바란드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긴장해서? 아니다. 바란드는 자이안의 빈틈을 찾고 있었다.

‘실전 감각도 충분하고.’

자이안이 발끝을 살짝 틀었다. 의도적으로 드러낸 빈틈이었다. 바란드의 얼굴에 짧은 순간 갈등의 빛이 어렸다. 그러나 정말 일순간이었다.

이대로 계속 대치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바란드의 작은 몸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속도도 빨라.’

딱! 목검이 스펙트럼과 부딪치며 메마른 소리를 냈다. 바란드는 굳은 표정으로 거리를 벌렸다. 자이안은 굳이 뒤를 추격하지 않았다. 실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가르침이니까.

‘그것보다도…….’

아직도 손바닥에 남은 작은 충격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짙어졌다. 작은 몸을 최대한으로 활용한 가장 강력한 일격. 상상한 것보다도 더 무거웠다. 지금까지 바란드가 얼마나 열심히 단련해왔는지 알 수 있는 공격이었다.

“자, 바란드. 다음엔 이렇게 해볼까?”

본격적인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바란드는 아직 아이니까, 몸에 너무 큰 부담을 주지 않는 방향으로 단련하는 게 좋아요. 어릴 때 단련 방법을 잘못 선택하면 성장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죠. 우선은 자세를…… 자이안, 제가 알려주는 대로 한 번 가르쳐볼래요?」

온갖 현대 무술을 섭렵한 달인인 크룩스가 자이안을 도왔다.

바란드는 지금까지 피땀 어린 수련을 거듭했지만, 그 수련 방법은 결코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크룩스의 조언을 받은 자이안이 자세를 조금 교정하는 것만으로도 바란드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본인도 그 사실을 느낀 것인지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재미있는 광경이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복잡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기사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알레프 백작이었다. 기사가 다급히 경례하자 백작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내가 뭘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자이안이 바란드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 같은데.”

“맞습니다. 자이안 도련님…… 께서 자진해서 나서셨습니다.”

자이안을 도련님이라고 칭하는 건 몹시도 어색했지만, 천만 다행히도 말실수를 하지는 않았다. 기사는 긴장한 얼굴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정작 백작의 시선은 안뜰 쪽으로 쏠려 있었다.

“훌륭하군.”

잠시 바라보던 백작이 나직하게 한 마디를 뱉었다. 짧지만 많은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바란드를 칭찬하는 말이었으나, 동시에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버릇들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고쳐주며 바란드에게 올바른 자세를 가르쳐주는 자이안의 실력에 대한 말이기도 했다.

“기초적인 건 이 정도면 되겠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가르침이 끝났다. 알려준 것은 어찌 보면 사소한 것들이었으나, 그로 인한 변화는 바란드 본인이 가장 강하게 느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몸에 느껴지는 부담이 한결 덜했고, 그만큼 검에 더 강하게 힘을 실을 수 있게 됐다. 방향을 바꾸거나 공세를 수세로 전환하는 과정도 이전보다 훨씬 매끄러웠다.

“감사합니다, 형님!”

몇 번 더 검을 휘둘러 본 바란드가 존경으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꾸벅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이안은 또 욕심이 났다.

미오네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이 아까울 정도로 착하고 올곧은 동생에게 뭐라도 하나 더 쥐여주고 싶은 마음.

‘이정표 정도는 되어줄 수 있을까?’

자이안이 스펙트럼을 변화시켰다. 연습용 목검보다는 조금 더 길고 무거운, 손에 가장 잘 맞는 장검의 모습. 바란드가 신기해하며 탄성을 터뜨렸다.

“마도구인 건가요? 대단해요, 형님!”

“하하, 고마워. 바란드, 조금만 멀어져 볼래? 보여줄 게 있어.”

고개를 끄덕인 바란드가 솔직하게 물러났다. 문득, 조금 떨어진 곳에 백작과 기사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란드도 곧 이를 알아채고는 백작에게 달려갔다. 백작은 굉장히 어색한 태도로 바란드를 맞이했다.

「사이가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는구만.」

프레이의 말은 백작과 바란드 사이의 관계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자이안도 내심 동의했으나, 지금은 거기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뭘 보여줄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정표다. 까마득하게 머나먼, 평생을 걸고 목표로 삼아야 하는 일종의 도달점. 그에 걸맞은 일검이어야 한다.

몇 가지 후보가 떠올랐다. 그러나 고민 끝에, 그 모든 걸 보여주기로 했다. ‘일검’이라는 건 표현일 뿐, 정말로 단 한 번의 검일 필요는 없다. 자이안이 그동안 체득한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베고, 찌르는 기본적인 동작.’

자이안이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지그시 눈을 감으며 검을 정자세로 들어 올렸다. 잠시 뒤, 천천히 눈을 떴다.

“……!”

흥미롭게 지켜보던 백작은 흠칫 놀라며 칼자루를 틀어쥘 뻔했다. 호수와도 같은 맑고 잔잔한 안광에 순간적으로 압도된 것이다.

뒤이어 검이 곧게 들어 올려지고, 세로로 천천히 베어지는 그 광경을 백작은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결코 빠르지도, 강맹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백작은 직감했다. 저 앞에 마주 선다면, 아마 백작은 저 검을 막을 수 없다.

‘막으려 한다면 물살처럼 꺾여 자연스럽게 목을 벨 거다. 피하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 거대한 마물이라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

생사를 건 무수한 실전 속에서 만들어진, 적을 최대 효율로 죽이기 위해 완성된 검. 그것이 백작의 감상이었다.

더 놀라운 건, 실전으로 완성된 검인데도 불구하고 실전 위주의 기술에서 드러나는 야성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보다는 마치 궁중 무술처럼 정갈한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백작은 대체 어떤 단련을 거쳐야 저런 검을 휘두를 수 있게 될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내가 오만했군.’

일전에 제1 저지선에서 마물들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전력을 다해도 자이안에게서 승산을 점치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

자이안은 백작 정도의 무인이 승산을 따지고 어쩌고 할 경지가 아니었다.

“후우…….”

자연스럽게 숨을 뱉으며, 다시 일검. 이번엔 횡 베기다. 완만하게 허공을 베어낸 뒤, 자이안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백작과 바란드가 있는 방향에 시선을 던졌다.

압도된 듯 보이는 백작과 공포에 질린 듯한 기사, 그리고 눈을 빛내며 자이안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는 바란드가 보였다.

‘내가 괜한 짓을 한 건 아니었네.’

혹시라도 바란드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칫 아무 의미도 없는 부질없는 행동이 될 뻔했다. 그러나 바란드의 모습을 보면 그런 걱정은 접어둬도 될 것 같았다.

‘그럼, 마지막. 찌르기.’

무수한 실전을 거치며 경지에 오른 자이안의 검술 중에서도 찌르기는 한층 더 특별했다. 프리엔 제국, 음욕과의 일전에서 간발의 차로 음욕을 놓친 이후로 자이안은 결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이를 갈고닦았다.

“스으으…….”

검을 뒤로 당기며 자세를 취했다. 눈앞에 지금까지 싸우고 쓰러뜨렸던 마족들의 모습을 차례대로 그렸다.

다음 순간, 자이안이 스펙트럼을 내질렀다.

쩌어엉! 겨울 공기가 비명을 지르며 찢어졌다. 자이안을 중심으로 거센 후폭풍이 몰아쳤다. 그러나 마무리로 검을 한 번 휘두르자, 마치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자이안은 스펙트럼을 펜던트로 되돌리고 다시 목에 걸었다. 그리고 바란드를 돌아보며 웃었다.

“어때?”

“……!”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바란드는 그저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재능이 있고 열심히 단련했다 한들 아직 8살 어린아이. 자이안의 경지를 보며 받은 감동을 말로 명확히 표현하는 건 어려웠다.

특히 마지막에 보여준 찌르기는, 바란드의 눈으로 보기에도 뭔가 달랐다. 그 찌르기에 비하면 앞에 두 번의 베기는 가벼운 몸풀기 수준에 불과했다. 그걸 그저 대단하다, 멋지다, 이렇게 표현하는 건 자이안에 대한 폄하인 것 같았다.

“저……!”

“저?”

“정진, 하겠습니다……!”

간신히 꺼낸 말이 그것이었다. 자이안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지.”

이어 그는 멍청히 서 있는 백작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여기서 뭐 하세요? 안 바쁘신가 봐요?”

“뭐? 아니, 음…….”

대답할 말이 궁했다. 사실 한창 바쁠 시기였다.

본래 알레프 가문에서는 가문의 대소사를 백작부인과 함께 가인들이 알아서 처리한다. 그러나 지금은 미오네가 유폐되고, 가인들 역시 대부분이 미오네 파벌임이 드러난 상황이었다.

그들에게 가문을 맡길 수는 없으니 백작이 직접 이를 관리해야 했다.

“그냥 잠깐 산책 좀 하면서 쉬러 나온 거다. 그러다 우연히 네가 바란드를 가르치는 걸 발견했고.”

“쉬는 건 좋지만, 아예 일을 내팽개치는 건 안 됩니다. 원론적으로 따지면 아버지 잘못이니, 아버지께서 끝까지 책임을 져야죠.”

“나도 안다.”

그리 대답하면서도 백작은 은근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들이라는 게 응원이 아니라 타박만 하고 있으니 못내 서운한 것이다.

“네가 도와주면 나도 좀 편해질 텐데 말이다.”

백작이 자이안을 슬쩍 떠보듯 말했다. 정작 자이안으로서는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마주 보았다가, 불현듯 한 가지 추측이 떠올랐다.

백작은 지금 자이안이 알레프의 정당한 후계자로서 돌아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당장 미오네가 저지른 일의 뒤처리가 급하지만,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왕도에도 직접 이 사실을 알리고 다시 자이안을 후계자로 인정시킬 심산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말씀을 드리질 않았네요.”

마침 좋은 시기였다. 이참에 백작의 착각을 바로잡아야 했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

“전 더 이상 가문을 이을 마음이 없습니다.”

“…….”

백작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었다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의 뜻입니다. 제가 알레프로 돌아온 건 미오네의 죄를 밝히고 그녀를 벌하기 위해서지, 이제 와서 후계자를 자처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백작에게 자이안은 담담하게 선고했다.

“저는 더 이상 자이안 알레프가 아닙니다. 그 이름은 1년 반 전에, 미오네의 계략으로 죽음을 코앞에 둔 순간 버렸습니다. 저는 자이안 알코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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