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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일리움, 그리고 알레프 영지(4) (144/210)


144화 일리움, 그리고 알레프 영지(4)
2023.02.24.


미오네는 두 무릎을 끌어안은 채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그녀는 몇 번이나 반복한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깊은 밤. 조용하고, 차가운 시간. 휑한 방에는 투박한 가구 몇 개가 간소하게 놓여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곁에 있어주지 않는다. 아무도 그녀를 도우려 하지 않는다. 가주의 명령은 그녀가 그동안 가문의 인심을 장악하려 애쓴 모든 노력이 사실은 부질없었던 것임을 증명하는 듯했다.

‘아마도, 처음부터.’

자이안은 쇠약증을 극복할 수 있었던 계기를 선선히 밝혔다. 암살자의 습격을 받고 죽음의 위기를 겪은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암살자의 습격이 쇠약증을 극복하는 계기가 된 것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12명의 암살자를 그 자리에서 모두 죽이고, 마물이 발호하는 숲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자이안의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점이 많았다.

아마 일부러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적이라 볼 수 있는 미오네에게 모든 것을 밝힐 생각은 없었으리라.

‘자이안을 쫓아내지 않았더라면…… 아니, 하다못해 암살을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상황이 지금과는 크게 달라졌으리라. 자이안은 공국의 별장에 갇힌 채 여전히 쇠약증에 시달리고 있었겠지. 어쩌면 지금쯤 병이 악화되어 쇠약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미오네는, 아마 자신이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불확실한 것을 믿지 않는다. 위험 요소를 만에 하나 어긋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 맡겨서는 안 된다.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손으로 직접 뿌리 뽑는 것뿐이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치 않았다.

‘이제 와서 자이안의 존재는 걸림돌에 불과해. 왕국을 위해서도, 가문을 위해서도.’

미오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음 순간, 무기력하고 멍한 표정은 그녀의 얼굴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엇보다, 바란드를 위해서도.’

미오네는 천천히 일어서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유폐 중이기는 했으나 방에 작은 창문 정도는 나 있었다. 미오네는 창문으로 다가간 다음 가슴팍에 숨겨둔 나무 공예품을 꺼냈다.

일견 평범한 공예품으로 보이는 그것은, 그러나 그녀가 한쪽 끝을 비틀어 열자 제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나무 피리였다.

왕족을 위해 특수하게 제작된 이 나무 피리는 아무리 불어도 제대로 된 소리를 내지 않는다. 대신 자격을 가진 이가 피리를 불면 오직 왕실의 극소수 인물만이 감지할 수 있는 특수한 파동을 퍼뜨린다.

본래 함부로 뚜껑을 열어서는 안 되는, 사용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물건이다. 그러나 지금은 명백한 비상사태다.

알레프 백작가의 복속은 당대 국왕 시모스의 가장 큰 야망.

이대로 미오네가 저택에 갇힌 채 무력화되면 시모스 국왕의 야망 역시 실패로 끝나는 셈이다. 의심이 많고 가족조차 믿지 않는 시모스 국왕이지만, 이런 상황을 그냥 두고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불필요하게 왕실에 빚을 지게 되는 건 내키지 않지만…….’

당장은 지금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더욱 급했다. 미오네는 마음을 다잡고 피리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 * *

저택 본관 건물 지붕 위에 드러누워 있던 유리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두 눈에 별관 일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마력 파동이 보였다.

-유리아 님, 방금 보셨습니까?

-응. 소아레스도 들었지?

짧게 통신을 나누며 상황을 교차 확인한 뒤, 자이안의 선견지명에 조용히 감탄했다.

미오네가 순순히 끌려간 뒤에도 자이안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아니, 반대로 미오네가 묵묵히 끌려갔다는 사실에 경계를 더욱 끌어올렸다.

자이안이 아는 미오네는 아무리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해도 그렇게 맥없이 당하기만 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낮의 그 모습도 우릴 방심시키려는 연기였을까?’

그러나 유리아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낮에 미오네는 진심으로 당황했고, 그대로 맥없이 끌려갔던 것도 정말 아무 대책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었다.

이건 철저하게 준비된 계략이 아니라, 어떻게든 지금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자이안은 딱히 뭘 할 필요 없다고 했으니…….’

그녀가 무슨 짓을 벌이든 파악만 해 두고 굳이 막으려 들 필요는 없다는 게 자이안의 지시였다.

물론 몇 가지 예외가 있기는 했다. 미오네 휘하에 숨겨진 병력이 존재하며, 그 병력이 죄 없는 사람들을 해치려 들 경우. 그때는 자이안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막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그럴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뭐랄까. 좀 불쌍하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제대로 파악했으면서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해 끝까지 발악하는 건지. 이대로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남은 퇴로마저 끊겨 사라지고, 자기 목을 조이는 행동이 될 뿐이다.

유리아는 안타까운 마음에 작게 한숨을 뱉었다.

‘하긴, 그걸 알았으면 처음부터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겠지.’

미오네는 죗값을 치르는 것뿐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아직 죗값을 치른 것도 아니다. 이제 겨우 그 준비를 하고 있을 뿐이다.

미오네의 행동은, 그리고 그녀의 지금 처지는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자업자득에 불과했다.

* * *

“자이안 형님! 돌아오신 건가요?!”

다음날 오전. 자이안은 실로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마주했다.

바란드 알레프. 10살 차이가 나는 배다른 동생. 대체 누구를 닮은 건지, 미오네와는 딴판으로 솔직하고 성실한 아이였다.

자이안이 미오네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저택에 머무르고 있었을 무렵에도 바란드는 그를 솔직하게 형으로서 존경하며 따랐다.

물론 누군가는 그 행동이 진실을 모르기에 가능한 것에 불과하다며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이안은, 미오네가 그 어떤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어린 바란드마저 그 책임을 함께 짊어지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진실을 알게 되면 비탄 속에서 자진해서 죄를 짊어질 아이야.’

미오네가 유폐되었다는 소식은 아직 공공연하게 퍼지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바란드도 알게 될 테지만, 되도록 나중으로 미뤄두고 싶었다.

“오랜만이네, 바란드. 몰라보게 많이 자랐는걸.”

속마음을 숨기고, 자이안은 부드러운 미소로 바란드를 맞이했다. 안뜰에서 기사에게 검술을 지도받고 있던 바란드는 잠시 기사의 눈치를 봤다가, 허가가 떨어지자 곧장 목검을 내려놓고는 쪼르르 달려왔다.

“다시 저택으로 돌아오시는 건가요, 형님? 쇠약증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설마 다 나으신 건가요?!”

“다 나았어. 바란드가 걱정해준 덕분에 금방 나았나 봐.”

“정말 다행입니다!”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춘 뒤 자이안이 먼저 바란드를 끌어안았다. 잠시 머뭇거린 바란드 역시 곧 자이안의 등에 팔을 두르고 꽉 힘을 줬다.

“많이,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형님.”

“나를? 하하, 저택 사람들이 못살게 괴롭히기라도 했니?”

“그럴 리가요! 다들 정말 잘해주십니다! 그래도, 그래도…… 하나뿐인 형님이지 않습니까. 보고 싶어 하면 이상한 건가요……?”

바란드의 목소리가 불안으로 작게 떨렸다.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바란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뒤늦게 스스로의 행동에 놀랐으나, 이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바란드를 안심시켰다.

“아니, 바란드. 하나도 이상할 거 없어.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정말입니까?”

“정말이고말고. 못 믿겠니?”

“아닙니다. 형님께서 제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니까요.”

형제가 다시 몸을 떼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기사는 다소 복잡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어제까지만 해도 저택 내부 인력의 절대다수를 차지한 미오네 파벌이었다.

그러나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자이안이 예고도 없이 돌아오고, 굳건할 줄 알았던 미오네의 권력은 그녀가 가주의 명령 하나에 맥없이 유폐됨에 따라 그렇지 않다는 게 드러났다.

저택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불온했다. 미오네를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 시종이나 기사들 사이에서 오가기도 했다. 주로 미오네에게 은혜를 입은 이들의 의견이었다.

악랄하리만치 자이안을 고립시켰던 것과 달리, 미오네는 가인들에게는 언제나 친절하고 자비로웠다. 자이안이 엮이지만 않는다면 그녀는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안주인이었다.

미오네 파벌의 상당수는 두려움이나 협박 때문이 아니라 자진해서 그녀를 따랐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고, 혹은 자진해서 그녀를 따르면서도 자이안에 대한 처사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기사의 경우는 후자였다. 어린 남동생의 병을 고치는 데 미오네의 도움을 받았다. 평생에 걸쳐 갚아야 할 큰 은혜였다. 그래서 더욱 곤혹스러웠다.

남동생의 병을 고치기 위해 선뜻 큰돈을 내어주고 저명한 사제를 소개해준 미오네. 집요하리만치 자이안의 악평을 퍼뜨리며 그를 고립무원의 처지에 몰아붙인 미오네.

미오네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면서도, 그 둘이 동일 인물임을 자각할 때마다 가슴 한편이 서늘하게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검술을 배우고 있었던 거니?”

“네! 형님께서도 한 번 지켜봐 주시겠습니까?”

“그럴까? 어차피 당장은 한가하니까.”

바란드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다시 기사에게 돌아온 바란드가 목검을 들고 의욕에 가득 찬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기사는 문득 바란드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괜히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렇게 솔직하게 자이안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럼, 수업을 계속하겠습니다.”

잠시 끊겼던 수업이 재개되었다. 자이안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멀어져 나무 그늘 아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저 나이에 저 정도라…… 재능이 있네요. 아니, 재능도 재능인데, 상당한 노력을 거듭한 것 같아요.」

「그런 것 같구만. 그래봤자 자이안 만큼은 아니지만.」

「아저씨는 참, 애도 아니고 그런 걸 자이안하고 비교를 하고 있어요?」

크룩스의 눈썰미는 정확했다. 자이안 역시 그와 비슷한 감상이었다.

조금 전의 해맑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진지한 얼굴로 목검을 휘두르는 바란드를 보며, 자이안은 어렸을 적을 떠올렸다.

나이아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그는 나이아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강박적으로 수련에 매달렸다.

‘……욕심이 나네.’

손이 근질근질한 기분이었다. 바란드를 가르치는 기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꾹 참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참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쁜 짓을 하려는 것도 아닌데. 애초에 그런 걸 참을 거였으면 이렇게 예고도 없이 저택에 들이닥쳐 미오네를 유폐 당하게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란드.”

자이안이 펜던트를 쥐었다. 스펙트럼이 날이 없이 뭉툭한 장검의 모습으로 변했다. 기사가 잠시 지도를 멈추고는 자이안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불신과 경계가 섞인 그 눈빛에 자이안은 속으로만 사과했다.

“괜찮으면 내가 좀 가르쳐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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